"그 놈의 클래식은 도대체 왜 듣는거야?"


친구들이 종종 내게 묻는 질문이다. 묻는 투로 봐서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거의 질타에 가깝다. '그 졸음오는 재미없는 음악을 들으면 니가 잘난 것처럼 보여서 그런거야?'라는 비아냥도 꽤 담겨있는 것 같다. 아예 없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거다. 실제로 클래식을 들어서 주변으로부터 덕 아닌 덕을 본 적도 몇 번 있으니 그것도 아주 조금 첨가되었다고 하면 맞겠다. 재즈 클래식도 아닌 주로 18-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을 선호하는 까닭에 늙은이라는 소리도 적지 않게 들었다. 노친네라고 놀려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남들 홍대 클럽가서 최신 음악에 흔들대며 젊음을 만끽할 시기에, 지산 롹 페스티벌 가서 두 손 치켜 올려들고 반 정신나간 놈처럼 헤드빙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그 시덥지 않은 클래식이라니! 그럼에도 나는 클래식을 듣는다. 그것도 아주 깊고 진지하게. 


이유를 뭉뚱그려 말하자면 이렇다.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삼십대 사이에서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을 공부하는 극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면 우리 세대 전체를 통틀어 클래식을 듣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내 주변만 돌아봐도 클래식을 듣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여기서 '그냥 그게 그건가 보다'하고 듣는 사람은 감상자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능동적 감상자가 아니라 '그냥 틀어서 나오면 좋은 건가보다' 하고 한 귀로 흘려 보내는 수동적인 부류이기 때문이다. 마치 맛좋은 레스토랑에 와서 정말 최고급의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도 '이 피자나 저 피자나 그게 그거네' 생각하면서 막상 나갈 때는 동료에게 '야~여기 피자맛 기가 막히네' 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애호의 이유가 된다. 한번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온통 인스턴트식 정원으로 뒤덮인 인공 숲 사이를 매일같이 거닐다 어느날 우연히 나무와 나무 사이에 빼꼼 열려 있는 낡아빠진 문을 발견한 거다. 조심스레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이 곳은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신비의 숲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사람들을 단숨에 휘어잡을 만한 화려한 나무나 꽃은 없다. 대신 수백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고고한 고목나무들이 장대비처럼 내려앉아 마법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이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하다. 신선한 공기가 몸의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사색에 빠지기 좋은 나만의 아지트인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나는 남들과 즐기는 시간보다 나 혼자 보내는 시간에 더 애정을 두었다. 요즘 것에 관한 그 무언가에 대해 주변의 누군가와 공유하고 함께 즐기기보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된 먼 누군가와 단독으로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신났고 가치있게 느껴졌다. 저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책과 음악. 오래된 것일수록 더 끌렸다. 시류를 따라가는 것들은 최대한 배제했다. 최대한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서 그 속에서 스스로 사색에 잠겨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그 가운데 클래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의 분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찮은 평민이었기에 10대의 클래식 감상에서 그다지 특별한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저 들어서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것들을 택해서 집중적으로 든는 것, 그것 뿐이었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요한 슈트라우스, 드보르작과 같은 누구라도 들어서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법한 유명한 작곡가들 위주로 감상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듣는다는 의미는 학습이 전제된 의도적인 측면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저 좋은 것을 습관적으로 곁에 두는 게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내가 택한 클래식을 제외한 그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저 매일같이 똑같은 테이프를 돌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 그것으로 족했다. 이러한 나만의 습성은 오늘날 클래식에 더욱더 몰입하게 되는데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런 나만의 습성은 초등학교 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것. 연주는 감상만큼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바이올린은 재미있었지만, 피아노는 최악이었다.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도 너무 기계적인데다가 억지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가면서 연습한다는 건 정말 구속 중의 구속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런 경험과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나의 밑바탕, 머릿 속 심연의 바다에 굵직한 음악적 지층을 형성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바이올린 합주부 생활은 클래식이 안겨주는 엄청난 스케일을 잘 빨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바이올린 교사가 쉬는 시간이면 기가 막히게 연주했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내 인생에서 클래식만 들은 건 결코 아니었다. 클래식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수많은 음악의 산맥을 넘나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추장스럽고, 그냥 여기저기 장르에 기웃기웃대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클래식 다음으로 접한 것은 팝, 그 중에서도 비틀즈였다. 똘기충만한 비틀즈의 음악은 다른 장르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가교 역할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실험한 갖가지 형식들이 어떤 음악도 거부감 없이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미 은퇴한지 한참 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재주목했고 그들이 남기고 떠난 모든 앨범을 수집했다. 교실이데아에 젖어있던 나는 곧 롹의 세계에 급격히 빠져들었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무섭게 롹커가 되었다. 군입대 전까지 나는 오직 롹만 들었다. 가요를 듣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완전 사기라고 봐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풍류에 그쳤다. 놀고 마시고 즐길 때 불러대는 니나노의 느낌 정도로 가요감상의 레벨을 맞춰 두었다. 


힙합, 트립합, 일렉트로닉 등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적지 않은 분야를 건드렸다. 그런데 그것들 역시 대중의 귀에 익숙한 범위를 훨씬 넘어선 그 이면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투팍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누가 손수 투팍의 앨범을 차곡차곡 모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와 비트를 즐길 생각을 하겠나. 어떤 면에서 보면 클래식을 듣는 이유나 롹을 듣는 이유나 힙합을 듣는 이유나 다 비슷비슷한 맥락이다. 남들이 최대한 기웃대지 않는 영역에서 나는 최대한 나 자신에게 신성성을 안겨줄 수 있는 대상을 찾고 그것을 신봉하고 경외를 표했다. 


클래식에서 나의 줄기는 피아노다. 피아노 소나타, 변주곡, 야상곡에서부터 이중주, 삼중주까지 가릴 것 없이 다 듣는다. 그 중에서도 단연 피아노협주곡을 가장 좋아한다. 오케스트라의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홀로 당당하게 버티고 앉아 호탕하게 건반을 쓸어내리는 비르투오소의 모습이 가장 나를 사로잡는 포인트다. 똑같은 악보를 놓고 쳐도 각자가 지닌 성향에 따라 곡을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똑같은 바둑판에서 흰돌, 검은돌이 격돌하는 데에서도 수십만개의 경우의 수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무궁무진한 세계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곳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나만의 안식처다. 


당돌한 꿈도 꿔본다. 이렇게 10년 정도 듣다보면 정말 클래식 애호가라는 명함도 부끄럽지 않게 내밀 수 있을 날이 오겠지. 이렇게 30년 정도 피아노를 치다보면 나 역시 언젠가 동네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깜냥은 되겠지. 요즘 작품에 자꾸 동기화가 되어 나도 모르게 자꾸 볼륨을 높이다 보니 청각에 무리가 온 것 같다. 당분간 이어폰을 자제하고 오디오로 감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도박보다 무서운 중독이다. 


Written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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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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