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30 01:29



  몇 시쯤 되었을까.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파도소리가 멀리서부터 밀려온다. 누구의 명령으로 육지에 내렸던 말인가. 당장 눈앞에는 먼지자국이 가득히 쌓인 허름한 벽과 바람 치는 소리에 덜컹대는 나무 창틀이 들어온다.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고 있다. 도무지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뒷골이 뻑적지근하다. 귀도 먹먹하다. 해머로 뒤통수를 실컷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아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실신하듯 잠든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머리를 드는 순간 포기한다. 아직 두통기가 뇌를 지배하고 있다. 


“그냥 누워 있어요.”


문을 열고 레나스가 들어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려진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곳에서 제법 큰 검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 놈이 의사인지 저승사자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이내 손과 발에 뜨거운 수건을 감아준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지?”

“이틀, 아니 오늘로 3일째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왜...이렇게...?”

“선장이 직접 느껴지지 않아요? 두통입니다. 선장의 가장 큰 적이죠.”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요. 요리사는 과일 씻고 있고, 사샤는 마을에 이것저것 사러 내려갔어요. 이번 전투에서 얻은 수확이 많지 않아요. 다들 사기가 떨어져 있어요. 더구나 선장까지...”

“여기는...?”

“세빌리아 인근 마을이에요. 기억 안 나죠?”

“글쎄...알제리항에서 나와서...이스탄불 함대 1척과 붙었고, 배의 전리품을 확인하는 중이었는데...거기까지야.”

“거기부터 선장의 두통이 심해졌죠. 늘 달고 다니는 두통이라고 해도 이렇게 심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나중엔 헛소리도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긴급 상륙을 명령했어요. 당분간 선장은 쉬어야 돼요. 가짜로 쉬는 거 말고.”

“가짜든 진짜든 쉴 틈이 어디 있나.”

“그 생각에서부터 두통을 차곡차곡 쌓아온 거에요. 뇌가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고서 한 방에 보낸 거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겁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다들 기분이 좋지 않겠군.”

“기분들이야 각자 알아서 챙길 거에요. 그런 건 의사인 나로서도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 지금은 신경 꺼요. 선장이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 약초를 달였어요. 이 물부터 마셔요.”


  물이 뜨겁고, 쓰다. 마신지 10분 정도 지나니 차가웠던 손과 발에 점점 열기가 돈다. 꽉 막혔던 뒷머리와 위장이 서서히 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파른 숨이 점점 고르게 흐른다. 두통에 못 이겨 채 뜨지 못했던 왼쪽 눈꺼풀이 서서히 문을 연다. 살 것 같다. 


“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어떤 때요?”

“고통에서 회복할 때, 몸에서 열이 풀리고, 손끝과 발끝에 촉감이 뱅글뱅글 돌 때가 가장 몸의 오감이 잘 느껴져.”

“두통의 맛을 제대로 보여줄까요?”

“너도 사샤 닮아가는 거냐? 아무튼...괜한 지병에 모두에게 피해만 줬군.”

“선장의 그 피해의식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겁니다.”

“피해의식?”

“두통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난 지병이니 유전이라고 할 밖에.”

“두통이 났다는 건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두통은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증상입니다.”

“성실한 나를 칭찬해줘야겠군.”

“그런 뜻이 아니구요. 두통을 겪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정리정돈과 편식입니다.”

“내가 평소에 음식을 가려서 먹었나?”

“내가 말한 편식은 음식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 편식, 기호 편식, 술 편식, 등등.”

“그래서?”

“선장 같은 사람들은 순결주의자란 말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꾸리는 데서 잘 나타나죠.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선장은 더러운 것, 특히 본인이 생각하는 개 같은 인간들을 보았을 때 1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정리하거나 제거하지 못했을 때 2차 충격의 잔해가 남죠.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범위에 선장의 행동이 겹쳤다고 판단했을 때 가장 큰 3차의 충격으로 이어지죠. 3차 충격에 휩싸이고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응어리로 남으면 바로 이런 두통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구요. 제가 지켜 본 관찰결과입니다.”

“순결주의자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

“너무 그렇게 순결, 고결을 고집하지 말아요. 물론 그 생각이 저를 배에 타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늘 유지하고 살면 본인의 삶이 힘들어져요. 너무 무언가를 정리하려고도, 그렇다고 너무 사람을 가리고 챙길 필요도 없어요. 기본에만 충실하면 그 뿐입니다. 기본을 완전으로 가져가려고 하지 마시구요. 완전이라는 것은 단어 상에만 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구요.”

“이젠 심리테스트도 하는군.”

“선장이 생각한 완전의 범주에서 놓쳤다고 판단되는 것들, 놓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것들, 다 주우고 정돈하려 하지 마세요. 여기 선장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눠 갖고, 같이 가는 거에요.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거라구요. 면도도 당분간 하지 말아요. 사샤처럼 턱수염도 더부룩하게 내버려둬야 얼굴도 숨을 쉽니다.”


  잠시 떠든 사이, 창가에 해가 걸렸다. 따스한 햇볓이 내려앉으니 한결 낫다. 요리사가 오더니 레모네이드를 건네주고 간다. 레나스가 몸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컵을 입에 물려준다. 새콤한 물이 들어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샤가 왔나보다. 마을에서 무슨 요리를 봤는데 그걸 해달라고 요리사에게 계속 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알아서 조르고,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들 잘 하고 있다. 나는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 되겠다. 조만간 레나스에게 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시 이불을 깊게 감고, 눈을 덮는다. 


Written/Photo by 선장

Photo: 인천역 카페 팟알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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