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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보물섬] 특별한 송년회

 


십년지기 친구들을 누추한 집으로 초대하였다. 집안 사정이 더 나빠진 것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기에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유학시절에 소포까지 보내주며 응원을 해주었던 소중한 친구들이기에 보은의 의미에서 한해를 마무리하고자 특별한 송년회를 열었다.

 

대학시절에 친구들이 된 ‘우리’는 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 취업을 한 친구들이 대부분이고 나처럼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학생도 있다. 예전에는 8명 모두가 모여도 서로의 관심사가 같았기 때문에 이야기보따리가 끝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고 관심사도 달라지다 보니 함께 모여도 이전만큼의 즐거움과 재미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결혼을 한 친구와 앞둔 친구,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는 친구들(대체적으로 남자애들), 이들이 적당히 섞이고 버무려져 맛깔난 대화를 나누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그렇다, 한마디로 적절한 대화의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8명이 항상 함께 했는데, 일자리도 각각 떨어지게 되고 만나도 예전만큼 흥이 없으니, 이제는 모일 때마다 두세 명 빠지는 것은 예삿일처럼 되어 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났었는지 만날 때면 늘 ‘까르르르~’ 웃고 자지러지던 우리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진지 오래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에서 힘들고 지쳤던 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결혼에 대한 부담 등등등 저마다 어깨에 한 가득씩 짐을 짊어지고 모임에 오게 된다.

 

서로의 가벼운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은 피어난다. 그러고 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저마다의 짐 보따리를 푼다.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영향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이너스적인 세균과 독소를 퍼뜨려 모두에게 ‘한숨’이라는 병 유발시킨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떠든다고 해도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란 그렇게 만만한 녀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균은 전염을 유발할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항체를 만들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또한 서로 분야가 다르니 진정으로 이해를 구할 리 만무하다.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대응은 감정적이지 않아 서로에게 무미건조할 뿐이다. 이쯤 되면 내가 더 말해서 무엇 하랴, 란 생각이 든다. 혹은 친구들 이야기만 다 들어주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꺼내지 못한다. 꽝! 다음 기회에, 다들 힘들어 죽겠단다. 다들 힘든데 내 힘든 것 보태면 무엇하랴.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만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말하고 싶어서, 보여주고 싶어서, 어필하고 싶어서 만나는 것인가.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변했을까. 너무나도 닮아져 버렸다. 이제는 주변의 다른 모임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여러 모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모임은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친구들을 만나면 행복 에너지가 가득했고 꿈과 열정이 있었고 만날수록 건설적인 자극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흐른 것일까, 아니면 서로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만날 때마다 서로 긍정적인 에너지만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것은 서로에게 욕심일 뿐이다. 힘든 일이 생기면 이야기도 들어주고 슬픔을 나누는 것이 친구이다. 잘 안다. 하지만 항상 힘들다고 토로하는 만남은 아닌 것 같다. 누가누가 더 힘든가, 경연 식으로 자랑을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긴 요즘은 뭐든지 경쟁하는 오디션이 트렌드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슬픈 일이 생기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주로 장례식과 같은 부고를 받았을 때, 예외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반면에 정말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 정작 그보다 많은 사람들은 모이지 않는다. 기쁨은 함께 하면 배가 되고, 슬픔은 함께 하면 반으로 덜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런데 현실에서는 기쁜 일이 생겼을 때는 꼭 본인이 아니더라도(왜? 나만 엄청 사는 게 바쁘니깐) 축하해줄 다른 이들이 그 사람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모임의 참석은 필수가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아니면 실제는 배가 아플 수도 있는 법일지 모른다. 우리는 칭찬에 인색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칭찬을 하는 방법은 잘 모르지만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누구나 일가견이 있다(마치 진심인양 혹은 세상이 꺼져라 하고). 하지만 정말로 슬픔을 나누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정말 친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온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적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꼭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닐까. 나는 사는 게 이렇게 힘든데 저 친구도 나만큼 힘든 것일까, 이렇게 확인으로써 얻어지는 안도감에 모이는 것은 아닐까. 너무 잔인한 생각인가, 인간미라고 느껴지지 않는 생각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자연스러운 법인데 그래도 나는 이 모임을 유지하고 싶었나보다. 사람들 역시 저마다 억지로라도 유지하고 싶은 모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소중해서 일까 아니면 그 관계 속에 담겨있는 나름의 추억을 잃고 싶지 않아서 때문일까.

 

항상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면 좋겠지만 한두 명 어긋난다고 해서 모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항상 8명 모두가 모여야 한다는 것은 욕심이다. 그동안 잘 참여하지 않던 친구가 오랜만에 온다고 하더라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게 친구고 그렇게 모임이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처음으로 우리 모임에 테마를 만들어 보았다. ‘2022년, 10년 뒤 당신의 모습으로 참석하는 파티’가 이번 테마였다. 식사를 하며 모이는 것은 여느 파티 때와 같았지만, 이번 모임에는 꼭 10년 뒤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으로 참석하여야 했다. 참석자들은 돌아가면서 꿈을 이룬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 발표하고, 그 꿈을 이룬 비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다.

 

우리는 각자의 꿈을 이룬 멋진 모습으로 모이게 되었다. 모대학 겸임교수이자 고용노동부 자문위원, 한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학자,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노벨상 수상자, 모 컨설턴트 회사 이사, 해외 민박 사업가, 사회적 기업가 등 정말 쟁쟁한 사람들이 우리 집에 초대된 것이다. 그 중에는 만들어온 명함을 나눠주는 친구도 있었고, 본인이 집필할 책 표지를 갖고 온 친구, PPT를 통해서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보여준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교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고, 작가의 팬이 되어서 질문을 하기도 했고, 노벨상 수상자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자식교육을 시켰는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멘토 사업에 성공을 한 사회적 기업가는 연신 성공한 친구들을 본인의 사업에 끌어들이려 노력을 보였다.

 

십년 뒤 성공의 여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이 중에서는 자신이 말하고 꿈꾸고 설계한 것처럼 성공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특별한 송년회는 꿈을 꾸라고, 아프니깐 청춘이니 희망을 가지라고, 한계를 벗어나 도전하라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여느 자기계발서처럼 지친 친구들을 위로하고자 만든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뜻 깊게 생각을 해 본적도 없다. 그들 나름의 성공 방식을 찾는 법, 그러기 위해서 본인을 정말 이해하는 것이 자기 계발서들의 지침을 따르는 것보다 선행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이라는 큰 뜻보다는 오히려 이 작은 모임을 지켜보고 싶었다. 사회에 찌들어 상처받고 날개가 꺾인 친구들에게, 그대들은 꿈을 갖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칭찬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Written by 동전오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