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선 요리] 연말 달력 이야기 1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집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대여섯 정거장을 지났을까. 나는 자리에 앉아 보고 있던 책을 가방 속에 넣어 버리고 새삼스럽게,

"이젠 정말 연말이군!"

하였다.

  달력의 숫자가 12월 31일이어서가 아니라 지하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포오즈로 앉아 있어도 표정만은 한결 같다.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표정은 무엇보다도 더 나에게 2012년의 마지막 날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반대편 문이 열리며 50대 후반의 아저씨가 탄다. 감색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긴 모습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얼굴 가득한 함박웃음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편안해지는 기분을 돋워주는 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생각하면서 보니 돌돌 말린 종이뭉치 두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가 하도 궁금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이거 달력이요. 은행달력."

한다.

  보니 종이몽치를 감싼 노란 포장지에 은행이름이 프린트되어 있다.

"아, 그렇군요. 은행 다녀오시나봐요."

하니,

"그래. 은행 여러 곳을 들렀어."

한다.

"은행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봐요?"

물으니 아저씨는 얼른 대답하는 말이,

"이제 다시 시작이요."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35년 전 23살의 나이로 상경했다는 것, 처음에는 남의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는 것, 4년 전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창업을 했다는 것, 저금하던 은행 한 지점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 장사가 더럽게 안 된 것, 1년도 안되어 은행 빚은 커녕 가게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는 것, 2년 만에 가게를 접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빚을 갚기 시작했다는 것, 오늘 부로 그 빚을 다 갚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웃고 계신 거였군요."

하니,

  "빚청산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 근데 그것만이 아니라오. 그러니까"

하면서 다시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문득 낯선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대개 자신에게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식당이나 버스, 지하철에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을 때면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말을 주고받았다.

  달력아저씨는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이야기에 진실로 감격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기 전에 끝났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저는 다음에 내려야 되요."

하니, 달력아저씨는

  "늙은 사람 말 재밌게 들어줘서 내가 고맙지. 이거 가져가."

하면서 내손에 달력 한개를 꼭 쥐어준다. 나는 손사레를 치며 사양하다 못이기는 척 달력뭉치를 받았다. 승강장을 출발하는 열차를 돌아보니 달력아저씨는 여전히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아내와 함께 새 달력을 채워 나가는 아저씨는 상상하며,

  "이제 정말 새해구나."

하였다. 2013년 달력을 봐서가 아니라 달력아저씨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 이태준 '달밤'의 일부분을 따라했습니다.

※ 다음 예고 - 연말 달력 이야기 2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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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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