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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선요리 - 연말 달력 이야기 2

  앞 이야기 - 특선요리 - 연말 달력 이야기 1

 

 

  감색양복을 멋지게 입은 사람이 은행창구에 앉아 있어. 맞아. 아까 봤던 달력아저씨야. 이때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네. 은행직원이 마주 웃으며 말을 건네고 있어. 우리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볼까?

 

  "상환이 완료되었어요. 축하합니다. A고객님"

 

  이름을 듣지 못해서 급하게 A라고 했어. 괜찮지? 우리 아저씨는 여전히 웃고 있어. 지하철에서의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아마 이때가 은행대출을 모두 갚은 시점인 모양이야. 아저씨 축하해요. 앞으로 탄탄대로만 남았네요.

 

  "덕분에 아주 빨리 갚은 것 갚아요. 고마워요."

 

  하고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섰어. 이제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일만 남은 거지. 근데 아저씨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은행직원에게,

 

  "아참 잊을 뻔 했군. 저기 달력 주시오. 2013년 은행달력 말이오."

 

  아, 아까 들고 있던 달력을 여기서 받은 모양이야. 은행직원이 달력을 찾고 있어. 자기 자리에는 없는지 주변 직원에게 물어보다가, 그도 없는지 지점 전체를 뒤지고 있어. 공짜 달력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 은행직원이 분주해지는 것에 맞춰 아저씨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죄송합니다. 이번에 달력 찾으시는 고객이 많아 달력이 전부 소진된 상태입니다."

 

  하는 순간, 아저씨의 얼굴은 처음으로 굳어졌어. 아주 심각한 얼굴, 봐. 미간에 그려진 내 천川자를. 그깟 달력 하나에 뭐 그리 심각해지냐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은행에서 다음해 달력을 받는 일은 아저씨한테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

 

  내가 아저씨한테 들은 이야기를 해줄게.

 

  아저씨는 스물세 살의 첫 월급날에 처음으로 K은행에서 첫 통장을 만들었어. 그 날이 바로 12월 달이라 은행에서 달력을 주었어. 그날부터 아저씨의 은행달력 역사가 쌓인 거야. 무슨 역사냐고. 아저씨의 역사, 아저씨 가족의 역사. 달력 숫자 하나하나에 차곡하게 하루하루의 일들을 쌓아간 거야.

 

  매달 7일에는 별표가 그려지고 숫자가 새겨져. 30여 년 동안 조금씩 늘어간 숫자들, 7일이 무슨 날이냐면? 바로 월급날이었지. 아내와의 첫 데이트 날에는 194×2=388원이라고 적혀있대. 그때 다방커피 한잔이 194원이었거든. 이게 아저씨의 생애 첫 커피였어. 겉으로는 맛을 음미하는 척 해도 속으로는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느냐며 투덜거렸다고 해.

*타인의 첫 커피에 관심이 있다면?  두 남자의 커피 비긴즈*

*고은 시인의 생애 첫 커피가 관심이 있다면? [차 마시는 앵무새] 내 생애 첫 커피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는 매일매일 작은 숫자들이 이어지지. 여기서 퀴즈. 이 숫자들이 뭘까? 3, 2, 1, 0. 정답은 바로 아저씨가 아내에게 사다준 과일의 기록이야. 자두, 복숭아, 바나나, 수박, 귤. 아내가 과일만 찾았거든.

 

  이렇게 35년이라는 시간이 쌓인 거야. 아저씨의 안방 문갑에는 35개의 달력이 소중히 모셔져 있어. 아내가 이따금 꺼내보며 미소 짓는 게 아저씨의 취미야.

 

  한번은 딸애가 무슨 커피 집에서 쿠폰으로 받았다며 다이어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어. 신식이라며 며칠 써본 아저씨는 금방 은행달력을 돌아갔어. 다이어리는 글씨도 작은 게 영 쓸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저녁에 아내와 팔 베게하고 누워 벽에 걸린 달력 보는 재미도 없다며…….

 

  이런 아저씨에게 2013년 은행달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2012년을 마지막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일하고 똑같은 거야. 쌓아갈 내일이 없다는 의미인거지.

*2012년 지구 멸망에 관심이 있다면? 지구 멸망과 동지 팥죽의 관계*

 

  다른 은행달력도 있잖아. 달력을 사도되고. 라고 생각했지? 나도 지하철에서 들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 근데 생각해봐. 다들 '이거 아니면 절대 안 돼.'라는 물건이 하나쯤은 있지 않아? 그게 너구리 라면일 수도 있고, 아이폰일 수도 있고, 스타벅스 커피이기도 하고. 하나의 물건에 하나씩의 사연을 간직하며.

 

  스타벅스 다이어리하고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열심히 17장을 모아서 다이어리를 교환하러 갔는데, "다이어리 물량이 소진되어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점원이 말하면 어떤 기분이겠어? 참담하지. 그리곤 어떤 행동을 하겠어? 스타벅스 다이어리 구하겠다며 이 동네 저 동네 매장은 다 찾아다닐 거잖아.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관심이 있다면? 스타벅스 다이어리- 스티커 모으기 대작전 돌아보기

 

  아저씨도 마찬가지야. 내일까지 꼭 구해주겠다는 은행직원을 뒤로 하고 가장 가까운 매장부터 뒤지기 시작하는 거 보이지? 집념의 사나이. 은행달력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라고 갈 기세야.

 

  결국 아저씨가 들린 은행지점이 10군데야. 자그마치 지하철역 다섯 개야. 대단하지. 그러고 결국엔 득템. 박수 쳐야지. 짝짝짝짝짝. 다행히도 지구가 멸망하는 일 따윈 없어. 2개나 얻고 집에 가는 길에 만난 게 바로 나였지.

 

  "집에 가면서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갈거야. 사과, 배, 바나나, 멜론……."

 

  하고 아저씨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 2012년의 마지막 역사가 채워지는 거지. 상상을 해봐. 과일을 먹으며 아내와 2013년을 써나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나의 이야기는. 아니지. 아저씨의 이야기는 이게 다야.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달력에 삶이 깃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 집안을 한번 둘러봐. 어떤 달력이 걸려있어? 은행달력이야? 회사달력? 아니면 학교달력일까? 병원달력? 아하, 무한도전 달력도 있을 거야. 보여? 그 달력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어때?

 

written by 요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