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무엇을 들었습니까?

<선생님의 세 곡을 들었어요. 아디오스 노니노, 무무키, 리베르탱고. 너무나 인상깊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을 곡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삼십대의 제가 듣기에는 너무나 먼 그런 느낌 말이죠. 어쩌면 선생님의 곡들은 제가 육십칠십이 되어도 들을 수 없는 곡일지도 모르겠네요.

> 왜 그런 생각을 했죠?

< 글쎄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요. 다만, 다만 말이죠. 선생님의 반도네온이 가슴을 훔쳐갑니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가서는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곳으로 마음 덩어리를 한 줌 뚝 떼어가는, 그런 구구절절한 느낌이 있어요. 제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선생님이 없습니다. 전혀 다른 별에 발을 딛은 순간이 찾아온 거에요. 반도네온을 아예 접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의 반도네온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어떤 장면 같아요.

> 특별한 장면이라도 떠오릅니까?

< 암요. 이베리아 반도요. 저는 리스본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 앉아있네요. 탱고를 추고 있는 한 여인이 있어요. 이미 저는 적포도주를 한참 마셔 정신이 몽롱하군요. 어디서 온지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 춤추던 그 여인이 곁에 다가와 잔을 들고 수작을 거네요.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손과 발짓으로 서로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네요.

> 저로서는 영광이군요. 제 잔도 받으세요.

<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장면에 등장하는 사나이는 엄밀히 따지면 제가 아닙니다. 저는 베토벤, 모짜르트, 쇼팽의 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집을 사랑해요. 선생님의 음악은 너무 뜨거워요. 그렇다고 베토벤이 뜨겁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의 반도네온은 당장이라도 떠날 여인처럼 너무 두렵고 달구어진 빨강색의 치마에요. 30대의 저로선 가질 수 없는 음악입니다. 그래도 가끔 찾아와 선생님을 뵙고 갈께요. 대신 술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 언제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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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의 클래식은 도대체 왜 듣는거야?"


친구들이 종종 내게 묻는 질문이다. 묻는 투로 봐서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거의 질타에 가깝다. '그 졸음오는 재미없는 음악을 들으면 니가 잘난 것처럼 보여서 그런거야?'라는 비아냥도 꽤 담겨있는 것 같다. 아예 없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거다. 실제로 클래식을 들어서 주변으로부터 덕 아닌 덕을 본 적도 몇 번 있으니 그것도 아주 조금 첨가되었다고 하면 맞겠다. 재즈 클래식도 아닌 주로 18-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을 선호하는 까닭에 늙은이라는 소리도 적지 않게 들었다. 노친네라고 놀려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남들 홍대 클럽가서 최신 음악에 흔들대며 젊음을 만끽할 시기에, 지산 롹 페스티벌 가서 두 손 치켜 올려들고 반 정신나간 놈처럼 헤드빙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그 시덥지 않은 클래식이라니! 그럼에도 나는 클래식을 듣는다. 그것도 아주 깊고 진지하게. 


이유를 뭉뚱그려 말하자면 이렇다.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삼십대 사이에서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을 공부하는 극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면 우리 세대 전체를 통틀어 클래식을 듣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내 주변만 돌아봐도 클래식을 듣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여기서 '그냥 그게 그건가 보다'하고 듣는 사람은 감상자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능동적 감상자가 아니라 '그냥 틀어서 나오면 좋은 건가보다' 하고 한 귀로 흘려 보내는 수동적인 부류이기 때문이다. 마치 맛좋은 레스토랑에 와서 정말 최고급의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도 '이 피자나 저 피자나 그게 그거네' 생각하면서 막상 나갈 때는 동료에게 '야~여기 피자맛 기가 막히네' 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애호의 이유가 된다. 한번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온통 인스턴트식 정원으로 뒤덮인 인공 숲 사이를 매일같이 거닐다 어느날 우연히 나무와 나무 사이에 빼꼼 열려 있는 낡아빠진 문을 발견한 거다. 조심스레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이 곳은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신비의 숲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사람들을 단숨에 휘어잡을 만한 화려한 나무나 꽃은 없다. 대신 수백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고고한 고목나무들이 장대비처럼 내려앉아 마법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이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하다. 신선한 공기가 몸의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사색에 빠지기 좋은 나만의 아지트인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나는 남들과 즐기는 시간보다 나 혼자 보내는 시간에 더 애정을 두었다. 요즘 것에 관한 그 무언가에 대해 주변의 누군가와 공유하고 함께 즐기기보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된 먼 누군가와 단독으로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신났고 가치있게 느껴졌다. 저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책과 음악. 오래된 것일수록 더 끌렸다. 시류를 따라가는 것들은 최대한 배제했다. 최대한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서 그 속에서 스스로 사색에 잠겨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그 가운데 클래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의 분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찮은 평민이었기에 10대의 클래식 감상에서 그다지 특별한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저 들어서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것들을 택해서 집중적으로 든는 것, 그것 뿐이었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요한 슈트라우스, 드보르작과 같은 누구라도 들어서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법한 유명한 작곡가들 위주로 감상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듣는다는 의미는 학습이 전제된 의도적인 측면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저 좋은 것을 습관적으로 곁에 두는 게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내가 택한 클래식을 제외한 그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저 매일같이 똑같은 테이프를 돌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 그것으로 족했다. 이러한 나만의 습성은 오늘날 클래식에 더욱더 몰입하게 되는데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런 나만의 습성은 초등학교 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것. 연주는 감상만큼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바이올린은 재미있었지만, 피아노는 최악이었다.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도 너무 기계적인데다가 억지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가면서 연습한다는 건 정말 구속 중의 구속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런 경험과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나의 밑바탕, 머릿 속 심연의 바다에 굵직한 음악적 지층을 형성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바이올린 합주부 생활은 클래식이 안겨주는 엄청난 스케일을 잘 빨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바이올린 교사가 쉬는 시간이면 기가 막히게 연주했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내 인생에서 클래식만 들은 건 결코 아니었다. 클래식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수많은 음악의 산맥을 넘나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추장스럽고, 그냥 여기저기 장르에 기웃기웃대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클래식 다음으로 접한 것은 팝, 그 중에서도 비틀즈였다. 똘기충만한 비틀즈의 음악은 다른 장르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가교 역할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실험한 갖가지 형식들이 어떤 음악도 거부감 없이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미 은퇴한지 한참 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재주목했고 그들이 남기고 떠난 모든 앨범을 수집했다. 교실이데아에 젖어있던 나는 곧 롹의 세계에 급격히 빠져들었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무섭게 롹커가 되었다. 군입대 전까지 나는 오직 롹만 들었다. 가요를 듣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완전 사기라고 봐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풍류에 그쳤다. 놀고 마시고 즐길 때 불러대는 니나노의 느낌 정도로 가요감상의 레벨을 맞춰 두었다. 


힙합, 트립합, 일렉트로닉 등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적지 않은 분야를 건드렸다. 그런데 그것들 역시 대중의 귀에 익숙한 범위를 훨씬 넘어선 그 이면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투팍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누가 손수 투팍의 앨범을 차곡차곡 모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와 비트를 즐길 생각을 하겠나. 어떤 면에서 보면 클래식을 듣는 이유나 롹을 듣는 이유나 힙합을 듣는 이유나 다 비슷비슷한 맥락이다. 남들이 최대한 기웃대지 않는 영역에서 나는 최대한 나 자신에게 신성성을 안겨줄 수 있는 대상을 찾고 그것을 신봉하고 경외를 표했다. 


클래식에서 나의 줄기는 피아노다. 피아노 소나타, 변주곡, 야상곡에서부터 이중주, 삼중주까지 가릴 것 없이 다 듣는다. 그 중에서도 단연 피아노협주곡을 가장 좋아한다. 오케스트라의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홀로 당당하게 버티고 앉아 호탕하게 건반을 쓸어내리는 비르투오소의 모습이 가장 나를 사로잡는 포인트다. 똑같은 악보를 놓고 쳐도 각자가 지닌 성향에 따라 곡을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똑같은 바둑판에서 흰돌, 검은돌이 격돌하는 데에서도 수십만개의 경우의 수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무궁무진한 세계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곳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나만의 안식처다. 


당돌한 꿈도 꿔본다. 이렇게 10년 정도 듣다보면 정말 클래식 애호가라는 명함도 부끄럽지 않게 내밀 수 있을 날이 오겠지. 이렇게 30년 정도 피아노를 치다보면 나 역시 언젠가 동네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깜냥은 되겠지. 요즘 작품에 자꾸 동기화가 되어 나도 모르게 자꾸 볼륨을 높이다 보니 청각에 무리가 온 것 같다. 당분간 이어폰을 자제하고 오디오로 감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도박보다 무서운 중독이다. 


Written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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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DELSSOHN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나타: 2 Sonata for Cello and Fortepiano]


  누군가의 음악을 들을 때 나는 ‘그 사람의 기운을 받는다’는 말을 즐겨 쓴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음악에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열정, 기쁨, 슬픔, 고뇌, 좌절, 초탈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은 음악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해당되는 얘기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매일같이 아침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두드리고, 서류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쓰는 동안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켜고, 온 몸에 잉크를 묻혀가며 악보를 썼다. 평생을 그렇게 말이다. 그들이 마신 수천 잔의 커피, 숨소리, 움켜쥔 머리칼, 환희에 찬 손짓, 페달을 밟는 유쾌한 발동작, 연인과의 달콤한 키스까지 그의 모든 것이 그 한 곡에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는 명반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클래식의 영원한 귀공자 멘델스존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나타: 2 Sonata for Cello and Fortepiano]. 첼로를 화두에 놓고 피아노의 선율을 밑바탕에 둔 멘델스존의 걸작 중 하나다. 그는 작곡가이기 전에 앞서 당대의 피아니스트와 어깨를 견주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 파울이 아마추어 첼리스트였기 때문에 그는 첼로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첼로의 우아함과 피아노의 경쾌함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실내악곡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정식이름은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펠릭스(행운아)라는 말 뜻대로 그는 클래식계의 타고난 '럭키가이’였다. 경제적, 정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안식과 평화의 온실 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쳤다. 할아버지는 계몽주의 철학가,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는 인텔리 음악애호가였다. 집안에는 자신을 위한 전속 오케스트라가 있어 언제든지 이들을 이용하여 여러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음악을 사랑했던 그의 가족들은 멘델스존가(家) 음악회를 만들어 당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정도였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피아노 한 대 살 수 없어 기타로 대신 작곡을 해야만 했던 암담한 현실과 비교하면 더욱 ‘행운아’라는 단어가 와 닿는다.  





  곡의 느낌은 한마디로 '즐거움' 그 자체다. 무리하지 않는 첼로 특유의 저음과 담백한 포르테피아노의 핑거링이 어우러져 보드라운 한편의 시를 써 내려 나아간다. 웅장한 저택의 아침, 멘델스존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실내악을 연주하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음폭의 큰 기복이 없고, 곡 전체가 완만한 음률의 곡선을 이루고 있어 귀의 거슬림이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이 곡이 아침에 듣기에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침은 하루 중 가장 예민한 시간이다. 몸의 구석구석이 휴식에서 깨어나는 때이므로 함부로 깨우면 하루가 삐걱댄다. 그래서 혹자는 아침 10시까지 웃으면 그날 하루 종일 웃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아침을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하루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10분만 일찍 일어나보자. 그리고 멘델스존이 당신에게 선물한 이 곡을 살며시 틀어보자. 볼륨을 가운데에 맞추고 귀부터 슬며시 깨워보자. 그리고 풍족하고 즐거웠던 멘델스존의 럭셔리한 삶 그 자체를 흐르게 하자. 그가 웃음 지으며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나의 인생도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포근한 이불 속에서 같이 웃음 지어주자. 나의 아침에 좋은 음악을 선물해주는 것, 그리고 나에게 살며시 웃음 지어주는 것,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면 이제 당신의 방에 커튼을 활짝 열어라. 오늘 하루도 활짝 열린다는 그 마음으로 활기차게 시작해보자. 당신의 오늘 하루, 당신의 한번뿐인 인생, 이 멘델스존의 명반으로 응원하겠다.    


Written by 사샤


[각주:1]

  1. 이 앨범은 마지막 LP세대이기도 한 네덜란드의 노장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의 연주와 노련한 포르테피아니스트 스텐리 호흘란드가 호흡을 맞추었다. 현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고 포르테피아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 피아노로 연주할 경우, 피아니스트의 색깔에 더 비중을 두어 개발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음향이 지나치게 강하고 풍만하여 첼로의 색깔을 오히려 덮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대에 만들어진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하면 음의 지속 시간이 짧고 음색이 훨씬 밝고 투명해서 베이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첼리스트는 자신의 개성을 뽐내기 위해 애써 무리할 필요 없이 멘델스존이 기획한 감미로움 그대로를 온전히 살려낼 수 있다. 연주자의 균형뿐만 아니라 악기의 균형까지 섬세하게 고려한 명반 중의 명반이니 꼭 들어보기 바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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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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