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샤

숨겨진 보물찾기 - 알라딘서점편 숨겨진 보물찾기 - 알라딘 서점편: 서혜경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집 종로에 알라딘 책방이 생겨 종종 들르곤 한다. 헌 물건을 다루어 그런 것이지는 몰라도 교보, 영풍, 반디 이런 윤기 번지르르나는 새책방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책이나 음반을 팔러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그 판 물건을 사려고 기웃대는 사람들로 내내 북적인다. 나 역시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한다. 우글우글 시장통 같다. 사람에 치어 책 한권 제대로 보기 힘들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거의 새책이나 다름없는 찜책을 잡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기대반, 구경삼아 반 나는 어슬렁댄다. 며칠 전, 듣지도 않는 씨디 팔아버릴 심산으로 알라딘에 들렀더니 꽤 값을 쳐 줬다. 네 장 팔아 만 오천원. 유행지난 대중가요 팔아 이 정도 이문 남겼으면 .. 더보기
새해맞이 둘 - 새 필통, 병사의 재편성 [새해맞이 둘 - 새 필통, 병사의 재편성] 필통을 잃어버렸다. 얼추 3주 전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했으니까 12월 초순에 분실한 게 틀림없다.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집안 곳곳 다 찾아봐도 없으니 이건 ‘실종사고’로 마무리 지어도 크게 문제 없으리라 본다. 그 녀석은 나의 글쓰기에 거의 5년을 넘게 종사했다. 그러니까 내가 쓴 대부분의 글들은 그 필통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밝은 황토색을 지닌 비닐류의 원통형 필통이었다. 쟈크도 튼튼해서 쓰는 내내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다. 믿음직한 친구였다. 슬프다. 이젠 그가 없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나의 듬직했던 펜과 기타도구 등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 상당수를 잃었다.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더보기
백건우, 라벨을 노래하다 라벨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백건우. 그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 중의 하나가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 말 그대로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한편으로 갸우뚱했다. ‘한 손으로만 다채로운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상을 마친 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지손가락이 건반을 주도해 나아가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명쾌한 건반 하나하나가 가슴에 거대한 울림을 자아낸다. 라벨은 대단한 고집쟁이였다. 그 고집만큼 자신에 대한 실력과 자부심도 꼿꼿했다. 청년 백건우는 프랑스와 라벨을 사랑했다. 그의 왼손에서 뿌려지는 타건의 신비로움이란 마치 땅거미가 지는 석양의 마지막 어스름을 불러일으킨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 이내 청량한 바람과 고슬고슬 풀벌레 소리가 그 빈 자리를 고독하게 채워.. 더보기
새해맞이 하나 - 색연필 깎기, 그리고 꿈 [새해맞이- 색연필 깎기, 그리고 꿈]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새해가 오고 있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생전 처음이다. 그 동안의 연말에는 "크리스마스에 뭘하지?"만 고민했지, "새해는 어떻게 준비하지?"가 늘 빠져 있었다. 그만큼 나에겐 '새해'라는 것이 무의미했고, '새해맞이'라는 것이 무색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명절되면 일가친척한테 새배하고 새뱃돈 두둑히 받으면 그게 새해인가보다 했다. 조금 더 커서는 1월 1일이 되면 일찌감치 일어나 반쯤 뜬 눈으로 안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전화기를 귀에 걸고 집안어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안부인사 1~2분 묻고 끊는 것이 예사였다. 새뱃돈 받기는 뭐한 나이고, 나이값 한답시고 의례적으로 하는 새해를 위한 일종의 .. 더보기
두통의 원인 몇 시쯤 되었을까.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파도소리가 멀리서부터 밀려온다. 누구의 명령으로 육지에 내렸던 말인가. 당장 눈앞에는 먼지자국이 가득히 쌓인 허름한 벽과 바람 치는 소리에 덜컹대는 나무 창틀이 들어온다.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고 있다. 도무지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뒷골이 뻑적지근하다. 귀도 먹먹하다. 해머로 뒤통수를 실컷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아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실신하듯 잠든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머리를 드는 순간 포기한다. 아직 두통기가 뇌를 지배하고 있다. “그냥 누워 있어요.” 문을 열고 레나스가 들어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려진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 더보기
두 남자의 커피 비긴즈 두 남자의 커피를 마신 기억은 군대를 기점으로 나뉜다. A(31세): 글쎄, 군대 전에 뭘 마셨는지 기억이 전혀 안나요. 그냥 믹스커피 정도는 마신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별 생각이 없던 거겠죠. B(30세): 대학동기 두 사람과 어딜 놀러가던 중 동료 한 사람이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겠다며 뭘 마실지를 물었어요. 그 때 두 사람은 캔커피를 택했고, 저는 베지밀을 선택했죠. 전 군대가기 전까지 한번도 안 마셔본 것 같아요. 두 남자의 커피와의 인연은 군대에서부터 시작된다. A: 특수한 보직이었죠. 적기를 레이더로 감시하고 보고하는 뭐 그런 보직이라. 새벽12시부터 아침 7시반까지 근무하는 일이 잦았죠. 그 때 마침 에스프레소 정도를 마실만한 육군호랑이가 그려진 컵을 누군가가 줬죠. 아마도 간부였던 것 같은.. 더보기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항해일지 -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요리사가 즉석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동댕이치더니 곧바로 슥슥 회를 떠버린다. 멍때리던 선원들이 고기를 보니 저글링처럼 달려든다. 물고기 크기가 엄청크다. 허리만큼 오는 정도의 길이에 늘씬하게 빠진 몸매. 프리즘이 빛나는 비늘이 온 몸을 덮고 있는 녀석인데, 힘이 그야말로 장사다. 펄떡펄떡 뛰더니 꼬리로 요리사 엉덩이를 힘껏 후려친다. 요리사도 지지 않고 물고기의 몸뚱이를 힘껏 내동댕이친다. 저편으로 떨어져 나간다. 물고기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그냥 먹으랜다. 적어도 독은 없으니까 맘 편히 먹으라는 말에 삽시간에 몸뚱이 살점이 사람들의 입으로 흡수된다. 자연은 돌고 도는 법. 초고추장이 모자르다. 나가사키산 와사비가 물고기의 눈가에 점점이 번져 있다.. 더보기
적이 있다는 것, 적이 된다는 것 [항해일지 - 적이 있다는 것, 적이 된다는 것.] 파도가 거세졌다. 배가 꽤 출렁인다. 이제서야 비교적 먼 바다로 나온 것 같다. 우리의 이동경로에 여러 적함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가급적 밤을 이용해서 항해하는 것이 좋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 밤하늘에는 호빵만한 하얀 달이 둥그러니 떠 있고, 주위에는 깨알같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다. 배를 둘러본다. 아침에 실은 함포가 묵직한 것이 든든해 보인다.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우리도 어느 정도 규모가 커 지면 좀 더 내구성이 강하고 노트가 좋은 갤리온급의 배로 바꿔야 한다. 지금의 배로서는 앞으로의 애로사항들을 헤쳐나아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하나둘 겹친다. 갑판대에 나와 앉..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