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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이러지도 저러지도



세상엔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이 많다. 내 경우엔 물건 사고 난 후의 포장 상자와 사용설명서가 꼭 그렇다. 

물건을 꺼내고 그냥 버려도 되는 상자를 이상하게 나는 잘 버리지 못한다. 이유는 별다른 게 없다. 꼭 어딘가에 쓸 수 있을 거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번 방에 한 구석에 두었다 나중에 엄마의 잔소리를 한차례 듣고 나서야 버린다.

버린다고 버려도 아직도 방 한구석엔 많은 상자들이 있다. 얼마 전에 정리하다 안 사실인데 스마트폰 이전의 휴대폰 상자부터 처음 산 스마트폰의 상자, 얼마 전 새로이 바꾼 상자까지 다 있었다. 누가 보면 대리점 하냐고 할 것 같다. 물론 이 상자들은 활용성보단 예뻐서 남아있었지만 지금도 ‘버려야하나?’하고 고민한다. 상자도 상자지만 함께 있는 설명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나름 ‘언젠간 보겠지’하고 두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설명서를 찾아본 적은 없다. 그러니 책상 서랍은 지금 있지도 않은 물건의 설명서로 한 가득이다. 이것도 어느 날인가 날 잡아서 싹 다 버렸지만 언제 다시 가득찰지 모르겠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나에게 있어 물건의 설명서와 상자는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물건이다. 그러다보니 신발을 사올 때 마다 참 곤욕이다. 매번 크고 예쁜 상자에 담겨 있어 ‘아, 이걸 어떻게 하나?’하고 고민하기 때문이다.


못 버리는 게 또 있는데 바로 어릴 적 풀던 문제집이다. 지금 책 꽂아 놓을 자리가 부족해 책들이 슬금슬금 방바닥으로 밀고 나오는 판국에 내 방 책장에는 예전에 풀던 문제집이 책장을 한 칸이나 차지하고 있다. 물론 절대 보지 않는다. 엄마의 잔소리도 심하다.


“그놈의 문제집 좀 버려! 볼 거야?! 안 볼 거면 좀 버려” 계절 바뀔 때마다 듣는 소리다. 내가 생각해도 문제의 문제집들은 절대 안 본다. 앞으로도 물론 안볼 거 같다. 근데 못 버리겠다. 이건 상자나 설명서보다 심한데 버려야지 하면서도 왠지 어릴 적 물건을 버리면 내 추억 한 부분을 찢어 버리는 거 같아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선 평생 끌어안고 가고 싶다. 


이런 물건, 물질적인 것들 말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도 참 많다. 우선 라면에 밥 말아 먹기가 그런 편이다. 그냥 라면만 먹으면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고 밥을 말아 먹으면 너무 배불러 속이 안 좋다. 그래서 매번 고민한다. ‘말아야하나?’하고.


자정 가까이 된 시간에 오는 친구 전화도 비슷하다.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보람찬 내일을 위해 일찌감치 씻고 이불속에 들어갔더니 울리는 친구의 전화한통. 받자니 왠지 지금 나가야 할 거 같고, 안 받자니 친구녀석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특히 애인이 있는 녀석 전화의 경우 그게 더 심하다. ‘여자친구랑 헤어졌나?’하는 생각과 함께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외근 후 4시 30분에도 많은 고민을 한다. 회사로 가자니 자리에 앉자마자 퇴근할 거 같고, 그냥 퇴근하자니 뭔가 불안하고 아무튼 참 미치겠다. 그래서 나는 그 절충안으로 커피숍을 택했는데 커피숍에 가서 일을 한다. 그리고 퇴근시간에 집에 간다. 뭐 나름의 합리화이자 절충안이었다.


추운 겨울 10분 빨리 도착한 약속, 걷기엔 멀고 택시나 버스를 타기엔 가까운 거리, 엄마와 아내가 싸울 때 등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이 세상엔 참 많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짜장, 짬뽕의 선택은 쉬운 거 같다. 짬짜면이 있으니 말이다.


written by 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