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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백수의 겨울




겨울은 잔인한 계절이다. 여유롭고 있는 자야 설경이 아름다고 낭만적인 계절일지 모르지만 겨울은 없으면 없을수록 잔인해진다. 특히 백수에게 겨울은 더욱 혹독하고 잔인한 계절이다. 겨울이 백수들에게 지옥인 건 일단 춥기 때문이다. 


추워서 어딜 나갈 수가 없다. 날이나 따뜻하면 산책도하고 공원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지만 한겨울에 공원가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집에 뒹구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럼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방구들 무너져 이놈아!!”하시며 등짝 스매시를 날리신다. 


여기서 어머니의 잔소리 강도는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 길수록 강도가 높아진다. 초기에는 넋두리 식으로 “이제 나이도 있는데 빨리 좋은 자리 잡아야할 텐데.”, “너만 취직을 하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정도의 잔소리다.

 

백수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식 존재 자체의 부정을 시작하시며 생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예를 들어 “어휴~ 귀신은 뭐하나 몰라 저놈 안 잡아가고” 식으로 사신에게 죽음을 요청하기도 하며 “내가 저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으니 내가 미쳤지”, “으휴~ 저런 게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나 몰라!” 식의 자식존재를 부정하신다. 물론 이런 잔소리를 들을 때쯤이면 이미 백수생활에 익숙해졌기에 큰 멘탈의 손상은 없다.


백수생활이 장기화되었을 땐 오히려 어머니의 잔소리가 줄어든다. 다만 얼굴만 보면 그저 한숨만 쉬신다. 이쯤 되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죄인이 따로 없다.

본론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잠시 외출이라도 하려면 옷이 문제다. 밖에 나갈 일이 많이 없다보니 옷을 살 일도 없다. 여름이면 그냥 천 쪼가리 몇 개 걸고 나가겠지만 겨울엔 답이 없다. 언제산지도 기억 없는 옷들로 꽁꽁 싸매고 나가도 갈 곳이 없으니 춥다. 돈 없고 갈 곳 없는 백수에게 겨울은 뭘 어떻게 해도 추울 뿐이다.


그래도 백수가 겨울 내내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름보다 겨울에 공식적인 외출이 많을 수 있는데 바로 연말연시 모임들 때문이다. 그러나 백수에게 연말모임은 그리 즐거운 자리는 아니다. 


동네서 가볍게 친구들과 만난다면 얼굴에 철판 깔고 친구들에게 빌붙기 쿠폰을 사용하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회비는 차마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모든 상황을 아는 친구들이야 회비보다 얼굴 한번 비춰주는 선에서 모든 걸 용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참 자리하기가 어렵다. 이와 비슷하게 지인의 ‘결혼’이라는 비보를 들을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백수에게 겨울이 잔혹한 건 명절이 있는 탓도 있다. 신정이야 그냥 넘어간다지만 온 친인척이 다 모이는 구정연휴엔 심한 고행의 길을 걷게 된다. 만나는 친척어른들은 하나 빠짐없이 “취업은 했니?”라며 물어오게 되는데 여기서부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래도 백수인 본인의 선에서 끝내는 잔소리는 그저 “알겠습니다.”하면 넘어갈 일이지만 간혹 부모님을 언급하시며 “이제 부모님 나이도 있는데 니가 이러고 있으면 되니? 집에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라!”라고 하실 때면 잘 잡고 있던 멘탈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거기에 함께 온 사촌이 꽤나 근사한 직장에 들어 갔다면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 되어 있다.



예전 뉴스에서는 청년 실업에 대한 기사를 자주 다뤘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기사를 본지 꽤 지난 거 같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이슈가 될 정도의 문제인가 싶다. 사실 백수짓도 젊었을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근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백수를 사회적 문제로 다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백수는 죄인이 아니다. 빈둥거릴 수 있을 때 빈둥거려야한다. 하루 종일 잠만 자도 좋고 게임을 해도 좋다. 갈 곳 없어도 그냥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도 좋다. 백수 때 아니면 이런 일들은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언젠간 이 시간들이 삶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백수는 죄인이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의 잔소리는 피할 수 없으니 감내하고 상황이 조금 힘들더라도 당당지자! 백수에게도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니까.


written by 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