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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힐링클래식] 7. 베토벤 황제, 정명훈과 줄리니


지휘자 정명훈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이끄는 서울시향과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베토벤 황제 실황 음반을 통해서였다.

'빰~~~'하고 시작하는 오케스트라의 첫 음에서부터 '아 협연이구나'를 알 수 있다. 관현악의 소리를 강하게 뿜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있다. 이렇게 하면 피아니스트는 온전히 자기 색깔대로 연주를 이끌어갈 수 있다. 정명훈은 곡의 전체 구도에서 조화와 균형에 큰 비중을 두는 스타일의 지휘자였다.

세네번 정도 들었을 때 음반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줄리니와 미켈란젤리의 황제 음반. 정명훈의 '첫 음'과 줄리니의 '첫 음'이 굉장히 흡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장 인터넷에서 '줄리니 정명훈'을 검색해봤다. 하하 이런,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있었다.

정명훈은 줄리니가 이끄는 로스엔젤레스 교향악단의 어시트턴트로 3년을 근무했다. 그는 3년 내내 줄리니를 보좌하면서도 말 한 마디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다고 하니, 젊은 날의 그는 꽤나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너무나 난해한 곡을 접한 정명훈이 답답하다 못해 드디어 줄리니에게 찾아가 곡의 해석에 대한 답을 물었다. 그런데 줄리니는 해결책 대신 내일 다시 오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정명훈을 돌려 보냈다.

다음 날 줄리니의 방을 찾아갔을 때, 줄리니는 역시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정명훈 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이 말 한 마디가 정명훈 지휘인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줄리니는 정명훈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길 원했다. 그는 정명훈이 가지고 있는 지휘자로서의 자질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1978년, 로스엔젤레스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스물다섯살의 정명훈을 발탁했다.

정명훈은 평생 줄리니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지휘에 임했다고 한다. 베토벤 황제의 첫 음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깊은 사연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계기를 통해 집에 묵혀 두고 있었던 줄리니의 브람스 협주곡 전집을 꺼내들게 되었고,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 하나씩 들리는 것을 보니 이제 서당개 노릇을 해볼만도 하겠다. 무언가를 이루는 데에는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초조한 것은 내 욕심일 뿐이다.

Written by 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