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일지 - 적이 있다는 것, 적이 된다는 것.] 


파도가 거세졌다. 배가 꽤 출렁인다. 이제서야 비교적 먼 바다로 나온 것 같다. 우리의 이동경로에 여러 적함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가급적 밤을 이용해서 항해하는 것이 좋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 밤하늘에는 호빵만한 하얀 달이 둥그러니 떠 있고, 주위에는 깨알같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다. 배를 둘러본다. 아침에 실은 함포가 묵직한 것이 든든해 보인다.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우리도 어느 정도 규모가 커 지면 좀 더 내구성이 강하고 노트가 좋은 갤리온급의 배로 바꿔야 한다. 지금의 배로서는 앞으로의 애로사항들을 헤쳐나아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하나둘 겹친다. 갑판대에 나와 앉아있는데, 저편에서 사샤가 걸어온다. 


"선장, 추워죽겠는데 밖에서 뭐해요?"

"넌 뭐 하고 있냐?"

"난 이것저것 그려보려는데 쉽지 않아서, 그리다 관뒀어요. 술 좀 남은 거 있어요?"


사샤 입에서 포도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놈이 배에 있는 술의 족히 반은 먹어치우는 것 같다. 옷 이곳저곳에 온통 물감 투성이에 술 자국 천지다. 배에 있으면서 단 한번도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리 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러워보이지 않는다. 냄새도 딱히 나지 않는 것 같고. 눈이 파래서 그런가? 잠시 훑어보고 있자니 더럽게 트림을 연거푸 해댄다. 


"요리사한테 가면 술을 왕창 줄 거야. 저번 전쟁에서 어디 불타고 있는 배에 들어가더니 포도주 스무통 정도 건져서 들고 오는 걸 내 눈으로 봤어."

"그거 다행이군."

"의사는 뭘하고 있지?"

"파도가 심하다고 멀미 중이라 못 움직인데요."

"으휴, 의사가 멀미를 하다니, 병이 나면 간호를 해줘야할 지경이군."

"의사에게 술을 주고 올까요?" 

"사샤."

"왜요?"

"저번 육지 때 머리좀 자르지 그랬어. 영 거지꼴인데?"

"누가 볼 것도 아닌데 뭘 신경써요?"

"그럼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그림은 왜 그리지?"

"같은 질문이잖아요. 그럼 선장은 누구 보라고 약탈질 해요?"

"하하, 따는 그렇기도 하군. 넌 그런 도발적인 면이 아주 해적스러워."

"해적보고 해적스럽다고 하는 건 어이가 없군요."

"사샤."

"아, 그렇게 진지하게 부르지 좀 마요. 그냥 어이! 이렇게 부르던가."

"내 맘이다 이 자식아."

"알게 뭐야. 젠장."


투덜투덜대면서도 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옆에 붙어 있는 놈이다. 그건 또 특이한 이 놈만의 성격 중 하나다.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데, 말투는 틱틱 내뱉는게 영 재수가 없는 게, 그게 이 놈의 문제다. 뭐 그렇다고 그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난 왜 해적이 됐을까를 생각해봤어."

"또 어이없는 철학적인 세계로 빠져들었군요. 그래서...답을 냈어요?"

"아니, 돌이켜 봤는데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어."

"그게 답이에요."

"응?"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면, 태어났으니까 태어난거지 다른 이유는 없잖아요? 선장은 해적이 됐고, 그 과정에서 뭐 여러가지 일들은 있었겠죠. 자 봐요, 내가 걸치고 있는 앞치마가 참 깨끗하죠?"

"너 만큼 깨끗하다."

"이렇게 이 색 저 색 묻히다 보면,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그리고 있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 때부턴 달려들어서  마구 이것저것 더 넣어보기도 하고, 파도가 심하면 잠시 붓을 놨다가도 또 그려대고...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는거라구요. 선장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하나의 그림이죠."

"사샤 니가 더 철학적인 것 같다."
"웃기는 소리. 난 그런거 몰라요. 그냥 물어보니까 술 취한 김에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거지."


이 놈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왜 육지에 분노하고, 바다를 택해 이렇게 망망대해로 나와 선원들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떠도는지, 그 원인을 따지자고 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사샤가 떠들어대는 말은 그냥 아무거나 다 갖다 붙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느 한 구석엔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럼 하나 또 물어보지."

"아, 이 양반 술을 안먹어서 그런가 참 질문도 많네."

"그럼 적이란 건 왜 있지? 어느 새부터인가 보이지 않던 적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 같아서."

"어느 새부턴가? 늘 있던 게 아니구?"

"아, 적은 늘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눈에 띄게 식별되는 것 같아서."

"여봐요, 선장. 선장!"

"왜?"

"적포도주는 무슨 색깔이죠?"

"옷에 묻은 색깔보니 대충 보라색 아닌가?"

"보라색은 뭔데요?"

"보라색이 뭐냐니?"

"보라색은 파랑과 빨강이 만나서 이루어진 색이라구요. 파랑과 빨강을 섞어쓰면 그림에서 불이 나요."

"불이 난다구?"

"그냥, 내가 즐겨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해둬요. 상극과 상극이 만나니 그림이 상대적으로 자극적이고 강한 인상을 주게 되죠. 중간에 어떤 색깔들이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희석시켜주지 않으면 안되요. 만약 둘이 만나 부딪히면 보라색이 되는 거구요. 그거 알아요? 보라색은 죽음의 색이라는거?"

"누가 그래?"

"내가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

"파랑이 있고, 빨강이 있어요. 파랑이 있으니까 빨강이 있고, 빨강이 있으니까 파랑이 있죠. 둘 보고 왜 있냐 물어보면 할 말은 없는 거에요. 원래부터 있는 거에요 아군 적군은. 수면 위에 적이 올라와서 무서워요?"

"조금 무섭기도 해. 그런데 뭐 별 건 없지."

"좋은 자세군요. 조금 무서워 할 줄도 알아야죠. 그래야 우리도 죽지 않고 살아남지. 근데 너무 심각하게 적에게 곤두세우지 마요. 원래부터 빨강과 파랑은 있었던 거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아요."

"시원한 답이군."

"추운데 들어가요. 술이나 먹어요 같이."


초겨울의 밤이 깊고 검게 흘러간다. 출렁출렁대는 배의 움직임이 좋다. 주말에 또 한번의 풍랑이 예고된다. 그 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충분히 휴식을 취해둬야 한다. 좋은 밤이라고 해두자.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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