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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on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서울에도 해는 뜬다]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07:15 남산을 오르는 버스에 있다. 아마 첫차인 듯하다.. 함께 하는 이들은 네다섯명 정도.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창밖만 바라본다. 아직 주위가 어둡다. 저멀리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가로등 불빛과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아침의 불빛이 교차하고 있다.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빛의 경쟁. 승리자는 없다. 반복만이 있을 뿐... 그런 날이 있다. 랜덤으로 틀어놓은 노래가 지금 내 상황과 우연히 겹치는 날.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듯한,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슬픔은 날 가로질러 저 멀리 또 흘러가는데 허무했던 숱한 밤을 지나서 또 다시 돌아오는 공허한 공기들 태양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기회는 언제고 반드시 찾.. 더보기
별과 영혼 오늘따라 바람이 잘 분다. 15노트. 그야말로 쾌속선이다. 하늘은 별무리로 가득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다와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뒤엉켜 분간하기 힘들다. 하늘에 배가 두둥실 떠가는 것 같다. 심심한 마음에 갑판에 나오니 오늘은 사샤가 없고 요리사가 앉아 있다. 무얼 쥐고 있는지 가만히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뭐해 안자고?" "그냥요." "그냥 뭐하는데?" "그냥 있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손에 온통 허연 가루다. 아아, 그제 아침에 마데이라 섬에 들러 샀던 그 설탕이구나. 설탕은 달콤해서 얼른 팔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샤가 차를 마신다, 빵에 발라먹는다 별 핑계로 야금야금 다 갉아먹을 것이다. 그것에 대비해서 요리사에게 잘 지키고 .. 더보기
부아나 비디따 술샤 클럽 - 애니팡 지금까지 해적라디오의 DJ 세이렌이었어요. 끝 곡으로 전설 속으로 사라진 밴드 부아나 비디따 술샤 클럽의 노래를 보내드릴게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해체하고, 행방이 묘연한 그들을 추모하며 들어볼게요. 어딘지 모를 바다의 밑바닥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부아나 비디따 술샤 클럽의 애니팡을 남기고 저는 이만 물러날게요. 난파당하지 말고 좋은 항해 하세요.~~~굿 럭~~~ 오랜세월 모아왔던 논문 파일들을 지워 버리고 목숨같은 나의 책들을 헐값에 팔아버렸지 예~ 미안해 멤버들아 나는 더이상 인문학을 하지 않을거야 함께 울며 웃으며 공부한 추억을 가슴속에 남길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쓸데없는 개멋에 취해 (개멋에 취해) 미련하게 청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이런 비호감적인 학문을 해.. 더보기
[500원] 우리 동네 빵집가게에는 아가씨가 이쁘다네 우리 동네에는 빵집이 하나 있는데 그 가게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한 명 있다. 매일 저녁 퇴근길, 동네 어귀에 이르면 빵집 쇼윈도 너머로 항상 그녀를 볼 수 있다. 이 순간만큼은 단순히 내가 퇴근하는 길에 그녀를 본 것인지, 그녀를 보기 위해 일하러 갔다 온 것인지 헛갈릴 때도 있다. 달코롬한 빵 냄새에도 홀려 자연스럽게 눈길이 향할 만도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언젠가는 턱을 궤고 TV를 보고 있고, 언젠가는 폐장 준비로 막대걸레질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그냥 서 있기도 한다. 그녀는 몇 살일까? 얼핏 보면 나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주인일까, 주인네 딸일까? 내가 스쳐가는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날 감지하기는 할까? 궁금함도 잠시 내가 그녀를 유리창 너.. 더보기
[보물섬] 꿈꾸는 연구실 꼬마 주인이 사라지면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장난감 병정들과 같이 교수님께서 퇴근하시면 어김없이 연구실의 책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음껏 그들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좁은 연구실에서 드넓은 세상을 만나고, 그렇게 꿈을 키워 간다. 어렸을 적에는 몰랐다, 교수님께서 본인의 연구실에 제자를 들여놓는 그 진정한 의미를. 돌이켜보면 나도 모르게 가장가까이에서 나의 미래를 바라보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따뜻한 차를 타주시며 정성스레 그네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교수님의 모습, 논문과 수업 준비를 하느라 컴퓨터 자판을 치는 모습, 교수님이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았지만 끊임없이 책과 싸움하며 고뇌하는 모습, 한강이 바라보이는 창문에 서서 사색하는 모습,.. 더보기
지구 멸망과 동지 팥죽의 관계 [주방에서] 지구 멸망과 동지 팥죽의 관계 “12월 21일? 세상이 망하는 날이잖아. 지구 종말, 마야사람들 똑똑해요. 진짜로 멸망할거야? 사과를 심을까? 여긴 배잖아. 그럼 배를 심어야지.” 요리사가 불안해하네요. 선장이라는 사람이 한소리 하니 요리사가 아까부터 저러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은 요리사에게 밥 얻어먹기 힘들 수도 있겠어요. 나쁜 선장 같으니라고. “2012년 12월 21일이 무슨 날인줄 알아?” 선장이 이렇게 말했는데요. 그날에 요리사에게 무슨 큰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걱정입니다. 요리사가 없어지면 제가 굶어 죽을 수도 있거든요. 옆에서 숙취를 이기기 위해(?) 해장술을 마시고 있던 선의가 끙끙거리면서 물어보네요. 그리고 선장은 대답을 하고요. 선의 “선장이 지구 멸망 같은 거 기다릴 사.. 더보기
[500원] 안부인사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군 입대했을 때, 휴가 나와서, 제대하고, 졸업했을 때, 취업할 때, 친구 결혼식 때, 그리고 상갓집에서…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꼭 만나고 싶어서 불러냈던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십년을 넘게 알아왔으면서도 만난 횟수가 반년 사귀다 헤어진 지난 여친과의 만남보다도 적은 사람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저의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네요. 그런 날이 있습니다. 꼭 그 사람을 보고 싶은 날. 그날은 돌이켜 보면 제게는 인생의 통과의례라는 주요관문이었더군요. 저를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보다, 그런 중요한 날이면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들키지 않고 불러낼 수 있었으니까요. “잘 .. 더보기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다 경기도 과천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 몇 주 전부터 대형 프로젝트에 올인하며 밤낮없이 분주한 남편이 마냥 안쓰럽기만 한 요즘이었다. 다행히 성공리에 프로젝트를 맞추고 꿀맛 같은 휴식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마냥 부러웠단다. “자기야, 근데 월요일엔 뭐 할 거야?” 다가오는 월요일이 그의 휴가인지를 지난주부터 알고 있던 그녀다. “나? 민정이 만나기로 했는데?” “민정이?!” 하마터면 ‘그게 어떤 X이야?’하고 반자동으로 나올법한데, 아니 진심 나올 뻔 했단다. ‘민!정!이!’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남편에게서 불렸던 것이 참 낯설었고 한편으론 설렜단다. 이 이야기를 해줄 때 그녀의 표정을 상기시켜 보면 굉장히, 무지하게, 더없이 설렜던 것 같다. 40대 아줌마의 얼굴에서도 이런.. 더보기
[500원] Intro。500원 짜리 남자 소녀는 나를 알기에 더더욱 슬퍼지네.. - 회상Ⅲ/김태원 “♬~♫~~♪” 익숙해진 핸드폰 알람음, 가장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바꿔 놓았건만 ― iPhone4의 ‘공상과학’ 사운드, 사람 속을 뒤집음과 동시에 달팽이관에서 고막을 거쳐 외이도까지 쭉 긁는 느낌을 줌 ― 그 조차도 어느새 귀에 익어버린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과 함께 분주하기만한 어느 아침 날. 여전히 잠에 취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남몰래 숨어 있던 동전 500원과 해후(邂逅)하게 되는 그런 날이 꼭 있다. 그럼 보통 우리는 살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딱 그 느낌과 그 타이밍이다.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 된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말이다. 단지 그 느낌의 남자로만 남아있으면 된다. 크게 신경 쓸 사람도, 마.. 더보기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항해일지 -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요리사가 즉석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동댕이치더니 곧바로 슥슥 회를 떠버린다. 멍때리던 선원들이 고기를 보니 저글링처럼 달려든다. 물고기 크기가 엄청크다. 허리만큼 오는 정도의 길이에 늘씬하게 빠진 몸매. 프리즘이 빛나는 비늘이 온 몸을 덮고 있는 녀석인데, 힘이 그야말로 장사다. 펄떡펄떡 뛰더니 꼬리로 요리사 엉덩이를 힘껏 후려친다. 요리사도 지지 않고 물고기의 몸뚱이를 힘껏 내동댕이친다. 저편으로 떨어져 나간다. 물고기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그냥 먹으랜다. 적어도 독은 없으니까 맘 편히 먹으라는 말에 삽시간에 몸뚱이 살점이 사람들의 입으로 흡수된다. 자연은 돌고 도는 법. 초고추장이 모자르다. 나가사키산 와사비가 물고기의 눈가에 점점이 번져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