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도 해는 뜬다]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07:15


  남산을 오르는 버스에 있다. 아마 첫차인 듯하다.. 함께 하는 이들은 네다섯명 정도.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창밖만 바라본다.

  아직 주위가 어둡다. 저멀리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가로등 불빛과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아침의 불빛이 교차하고 있다.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빛의 경쟁. 승리자는 없다. 반복만이 있을 뿐...

  그런 날이 있다. 랜덤으로 틀어놓은 노래가 지금 내 상황과 우연히 겹치는 날.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듯한,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슬픔은 날 가로질러 저 멀리 또 흘러가는데
  허무했던 숱한 밤을 지나서
  또 다시 돌아오는 공허한 공기들
  태양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기회는 언제고 반드시 찾아온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위로...그래 나는 남산 위로 간다.



07:35


  주위는 조금 밝아져있다. 해가 뜨는 시간 7시 43분 41초.

  남산에 도착해서 동쪽이 가장 잘보이는 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나는 시야가 트인 비탈길 중간에 서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따뜻한 캔커피를 만진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긴장을 풀어준다.

  일출을 보려 한다. 동지날을 기점으로 길어지기 해가 보고 싶었다. 지난 밤에 마신 술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생각때문일 수도 있다. 각오를 다지고 싶었나?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가장 긴 밤의 끝자락이라는 시간 속에 있다. 산자락이든 도시의 빌딩 사이든 붉은 빛이 내비치면 나는 어떤 시간 속에 있게 될까?


  나는 가장 긴 밤의 한가운데 있다. 

  나는 가장 어두운 밤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길어지는 태양 앞에 있다.  



08:01


  그저 이쪽이거니 추측할 뿐이다. 거기에는 흘러가는 구름이 있다.

  해는 뜨지 않았다. 아니,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전날 눈을 뿌린 구름이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10초의 고민, 그리고 무엇에 이끌린 듯 남산을 향했다. 구름이 걷힐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는지, 동쪽하늘에 구름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 것도 기대하거나 자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구름 뒤 해를 상상한다. 보이는 듯도 하다.



08:49


  버스로 오른 길을 걷는다. 도시의 풍경이 거기에 있다. 아침의 불빛들만이 그곳에 남아있다.

  나는 무얼 한걸까?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났고, 추운 날씨에 산을 올랐다. 10분 남짓 적당한 장소를 찾았고, 동쪽을 30분 남짓 바라봤다. 길어지는 해는 보지 못하고, 해를 상상했다. 그리고 걷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산을 다 내려오고 큰길로 나섰다. 그 순간 구름 위로 해가 뜨는 것을 본다. 아주 좁은 구름의 틈이다. 그 사이로 해가 보인다. 해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보고 있지 않아도 태양은 뜬다.'

  해는 다시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17:12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7분 40초다. 오후 내내 나와있던 해는 방금 빌딩숲 아래로 넘어갔다. 5분 뒤면 해의 자취는 아예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이 위세를 떨칠 것이다. 다시 밤이 된다. 어제보다 1분 정도 짧아진 밤이다.

  

  밤이 되면,

  글은 집어치우고 나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스위트피 -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youtu.be/ud71GYV1RhM


 

written by 요리사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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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0 02:54

 

 

오늘따라 바람이 잘 분다. 15노트. 그야말로 쾌속선이다. 하늘은 별무리로 가득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다와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뒤엉켜 분간하기 힘들다. 하늘에 배가 두둥실 떠가는 것 같다. 심심한 마음에 갑판에 나오니 오늘은 사샤가 없고 요리사가 앉아 있다. 무얼 쥐고 있는지 가만히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뭐해 안자고?"

"그냥요."

"그냥 뭐하는데?"

"그냥 있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손에 온통 허연 가루다. 아아, 그제 아침에 마데이라 섬에 들러 샀던 그 설탕이구나. 설탕은 달콤해서 얼른 팔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샤가 차를 마신다, 빵에 발라먹는다 별 핑계로 야금야금 다 갉아먹을 것이다. 그것에 대비해서 요리사에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더니 아직까진 큰 문제가 없나보다.

 

"왜 그렇게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하얀 게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한데?"

"별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요. 반짝반짝한게 그렇지 않아요?"

"음...썩 그래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육지에 있을 때였어요. 어떤 할아버지한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미난 이야기? 뭔데?"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할아버지였어요. 옷차림은 남루했는데, 눈이 굉장히 맑은 분이었죠. 범상치 않다는 건 당장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매일 그 시장에 놀러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 할아버지와 친구가 됐죠. 그 할아버지가 얘기해주기를 별은 사람의 영혼이랬어요.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씨앗이 되서 하늘로 올라간대요."

 

"오호, 별이 씨앗이라...그럼 꽃도 피나?"

"그럼요.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얼만큼 훌륭한 일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느냐에 따라서 별의 밝기도 달라진대요. 마음에 드는 별을 몇 개 골라서 매일 같이 살펴보면 별빛이 달라지는 걸 금방 알 수 있어요. 점점 빛의 기운이 세지는 건 별이 꽃을 활짝 피우는 거라고 했어요"

"별꽃이 핀다...꽃이 피면 지기도 하나?"

"물론이죠. 그게 바로 혜성이죠. 저기 봐요. 하나가 떨어지잖아요."

"떨어지면 영혼도 사라지나?"

"아뇨. 거꾸로죠. 별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대요. 별꽃을 활짝 피웠던 사람은 그만큼 좋은 가정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고 하네요. 타고난 복이라고 해야하나. 결국엔 모두가 돌고 도는 거죠."

"죽어서 별이 되고, 꽃을 피운다...그리고 꽃잎이 지면 혜성으로 떨어져 다시 살아난다...저기 활짝 핀 꽃들 중엔 내 조상님들도 있겠군. 그치?"

 

"있을 거에요. 언젠가 선장도 저기 어딘가의 별이 되겠죠. 얼마나 빛이 날진 모르겠지만 ㅎㅎㅎ"

"그렇겠군. 그럼 저기 어딘가엔 내 할아버지 할머니 별도 있겠구만."

"그럼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저 별들이 자신의 조상들의 영혼이라고 믿었대요. 왜 밤 12시에 제사를 지내는지 아시겠죠?"

"별이, 아니지. 조상님들이 가장 잘 보이는 때라서?"

"그렇죠. 죽은 영혼들의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라고 하네요. 영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

"나름 일리가 있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웬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나의 조상들을 별꽃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밤이라...요리사 옆에 우두커니 앉아 몇 시간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리사 손에는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별>

 

                                        박영신

 

지상에서 심은 씨앗 중에

가장 멀리에 심은 것이 별이다.

 

떡잎 자라는 가슴이 푸릇푸릇해지는 밤.

 

오늘도 어느 별에서는 꽃이 피고 있다.

 

 

Written by 선장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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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해적라디오의 DJ 세이렌이었어요.


끝 곡으로 전설 속으로 사라진 밴드 부아나 비디따 술샤 클럽의 노래를 보내드릴게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해체하고, 행방이 묘연한 그들을 추모하며 들어볼게요.


어딘지 모를 바다의 밑바닥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부아나 비디따 술샤 클럽의 애니팡을 남기고 저는 이만 물러날게요.


난파당하지 말고 좋은 항해 하세요.~~~굿 럭~~~

 



 

오랜세월 모아왔던 논문 파일들을 지워 버리고

목숨같은 나의 책들을 헐값에 팔아버렸지 예~

미안해 멤버들아 나는 더이상 인문학을 하지 않을거야

함께 울며 웃으며 공부한 추억을 가슴속에 남길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쓸데없는 개멋에 취해 (개멋에 취해)

미련하게 청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이런 비호감적인 학문을 해봤자 더이상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늦지 않았어 그 책들을 팔아버리고 스마트폰을 사 (그리고)

카페에서 연습한 애니팡을 그녀에게 보여줘 레디고~ 팡~

다시는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폼 잡지 않을거야

함께 해봐 애니팡

라스트 파앙

 

아직도 학교 안 도서관 구석에서 피땀 흘려 공부하고있을 (라스트 파앙)

이시대의 모든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라스트 파앙)

세이 애니팡 (애니팡) 세이 애니팡 (애니팡) (라스트 파앙)

소리 질러 팡~ (팡~) 팡팡팡~ (팡팡팡~)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만 믿고 팡~

다른 학문은 철저한 자본주의 상술이라 믿었지 팡~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

구직난에 빠져 있기 때문에

 

늦지 않았어 그 책들을 팔아버리고 스마트폰을 사 (그리고)

카페에서 연습한 애니팡을 그녀에게 보여줘 레디고~

다시는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폼 잡지 않을거야

함께 해봐 애니팡 (애니팡)

라스트 파앙~ 타임오버~

 

 



 

원곡 -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알앤비

http://youtu.be/-bTxmu75tYQ    <<<<<---노래 링크

 

Written by 낡은 라디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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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빵집이 하나 있는데 그 가게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한 명 있다. 매일 저녁 퇴근길, 동네 어귀에 이르면 빵집 쇼윈도 너머로 항상 그녀를 볼 수 있다. 이 순간만큼은 단순히 내가 퇴근하는 길에 그녀를 본 것인지, 그녀를 보기 위해 일하러 갔다 온 것인지 헛갈릴 때도 있다. 달코롬한 빵 냄새에도 홀려 자연스럽게 눈길이 향할 만도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언젠가는 턱을 궤고 TV를 보고 있고, 언젠가는 폐장 준비로 막대걸레질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그냥 서 있기도 한다.
 
그녀는 몇 살일까? 얼핏 보면 나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주인일까, 주인네 딸일까? 내가 스쳐가는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날 감지하기는 할까?
 
궁금함도 잠시 내가 그녀를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은 단지 1~2초 정도에 불과하다.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빵을 사면서 대화도 걸어볼 수 있고 가까이서 얼굴도 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단지 지금이 좋아서이다. 쇼윈도 너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그냥 좋다. 쇼윈도 얼룩 때문에 선명하진 않지만 어떤 목소리인지 들리진 않지만 그래서 더 좋다. 가게에 들어가서 얼굴을 마주 보거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왠지 나의 환상은 깨질 것 같기 때문이다. 마치 가게 문을 열 때의 알림종 소리에 환상이 깨어지듯이.

 

짝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 아닐까. 쇼윈도 사이에서 그 사람의 실재가 아닌 단지 ‘상상적 이미지’에서 만들어진 이상(理想)과의 사랑.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더 위력을 가하는지도 모르겠다.

 

유리창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의 판단은 내 손에서 벗어나 있다. 아직 나에게 빵집 아가씨는 빵집 아가씨일 때가 좋다. 빵집 아가씨를 완벽한 여인으로(정작 본인은 엄청 부담스러워 할) 만든 것은 내가 만든 것이지 그녀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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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주인이 사라지면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장난감 병정들과 같이

 

교수님께서 퇴근하시면

어김없이 연구실의 책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음껏 그들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좁은 연구실에서 드넓은 세상을 만나고, 

그렇게 꿈을 키워 간다.




어렸을 적에는 몰랐다, 교수님께서 본인의 연구실에 제자를 들여놓는 그 진정한 의미를. 돌이켜보면 나도 모르게 가장가까이에서 나의 미래를 바라보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따뜻한 차를 타주시며 정성스레 그네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교수님의 모습, 논문과 수업 준비를 하느라 컴퓨터 자판을 치는 모습, 교수님이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았지만 끊임없이 책과 싸움하며 고뇌하는 모습, 한강이 바라보이는 창문에 서서 사색하는 모습,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 모습, 대학원생 제자들과 세미나에서 토론하는 모습, 책 출판을 위해서 원고를 쓰는 모습, 동료 교수들과 식사하면서 근래 고민하는 주제에 대해서 대화하는 모습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만큼 구체적으로 나의 미래를 꿈꿔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담긴 교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현재 꿈을 갖고 있다면, 당신이 꿈꾸고 있는 그 일을 현재 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 보기 바란다. 그 사람의 모습이 바로 미래의 당신이 될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그 사람이 당신의 멘토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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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지구 멸망과 동지 팥죽의 관계


1221? 세상이 망하는 날이잖아. 지구 종말, 마야사람들 똑똑해요. 진짜로 멸망할거야? 사과를 심을까? 여긴 배잖아. 그럼 배를 심어야지.”

 

요리사가 불안해하네요. 선장이라는 사람이 한소리 하니 요리사가 아까부터 저러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은 요리사에게 밥 얻어먹기 힘들 수도 있겠어요. 나쁜 선장 같으니라고.

 

2012 1221일이 무슨 날인줄 알아?

 

선장이 이렇게 말했는데요. 그날에 요리사에게 무슨 큰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걱정입니다. 요리사가 없어지면 제가 굶어 죽을 수도 있거든요.

 

옆에서 숙취를 이기기 위해(?) 해장술을 마시고 있던 선의가 끙끙거리면서 물어보네요. 그리고 선장은 대답을 하고요.

 

선의 선장이 지구 멸망 같은 거 기다릴 사람 같지는 않고. 그럼 20121221, 그날이 무슨 날인데요?”

 

선장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 팥죽 먹는 날!!!!

 

선의 맞다. 그날이 동지(冬至)군요. 그래서 아까 요리사한테 팥을 씻으라고 했군요. 그런데 의미심장하네. 지구 종말과 해가 가장 짧은 날이라. 뭔가 연관이 있나 봐요?

 

 저는 치즈 먹는 것을 그만두고 싱크대에 있는 요리사를 봤어요. 아까부터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더라니, 팥죽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맛있을 것 같아요. 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대화를 계속 합니다. 누구보고 들으라는 건지.

 

선장 동지를 한해의 끝으로 보기도 해. 해가 가장 짧은 날이니까.”

 

선의 , 그래서 마야사람들이 그 날을 지구 멸망의 날로 생각했던 거군요. 어둠이 제일 긴 날이니 그럴 법도 하네요.”

 

선장 부활에 더 의미를 두지 않았을까? 해가 가장 짧다는 것은 다시 길어진다는 말이니까. 크리스마스가 말야, 크리스마스랑 동지랑 며칠 차이 안 나잖아, 원래는 페르시아, 유럽 등지에서 태양신, 농경신 등을 기리는 축일이었다고 해. 말하자면 태양의 생일이라는 거지. 나중에 예수의 생일이라는 의미가 덧씌워진 거거든.”

 

선의 그러면 왜 사람들은 마야 사람들이 지구 멸망을 예언했다고 하는 거죠? 선장 말대로 라면 1221일은 멸망의 걱정하는 날이 아니라 시작을 축하하는 날이잖아요. 새해처럼

 

선장 지금 마야에서 지구멸망을 예언 했니 어쩌니 하는데 사실 그건 다 구라야. 마야사람들은 멸망을 예언한 게 아니야. 그냥 자기들이 쓸 달력을 20121221일까지만 만들었던 거지. 달력 만드는데 93일까지 만들겠어? 아니면 한해 넘어가서 112일까지 만들겠어? 12 31일까지 만들지. 마야에서는 20121221, 올해 동짓날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한 시대의 마지막 날인거야. 그리고 새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선의 . 기술력이 대단하네요. 몇 백 년 뒤 태양 위치도 계산하고. 그래도 이상하네요. 왜 굳이 2012년인 거죠. 2013년도 아닌.”

 

선장 마야 사람들 기준으로 한 시대가 5125년 정도였다고 해. 세상이 창조된 날, 즉 한 시대의 시작부터 5125년이 흐른 날이 바로 서기로 20121221일인거지.

 

선의 , 1365일도 길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쪽은 말하자면 1년이 5125년이라는 말이군요. 그 사람들은 정말 엄청나게 긴 세월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군요.”

 

선장 우리가 새해부터 새 달력을 쓰는 것처럼 마야 사람들도 그때부터 새로운 달력을 쓰려고 했겠지. 500년 뒤의 달력을 뭐 하러 미리 만들겠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선의 . 말하자면 내년에 한글날이 휴일인지 아닌지 확정되지 않아서 달력제작업자가 2013년 달력을 늦게 인쇄하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선장 오 괜찮은 비유. 마야문명이 침략자들을 물리쳤다면 올해부터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 사람들한테 나눠준다고 부산을 떨었겠지. 아니면 기존에 쓰던 달력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마야달력은 해, , 행성의 운행을 모두 고려해서 만들었다고 하자나. 그러니까 마야사람들은 5125년마다 정확히 반복되는 천체운행의 비밀을 알았던 거지. 믿거나 말거나.”

 

선의 쓸 자리가 모자랐을 수도 있겠네요. 아쉽네요. 마야문명이 남아있었으면 5125년 만에 오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축제를 크게 했을 텐데. 우리도 가서 신년음식 먹으면서 축제를 즐겼을 거고, 술도 먹고......아침 먹고 술, 점심 먹고 술, 저녁 먹고 술, 창문을 열어보니 술이 오네요. 술고래 세 마리가 비틀거리는데 아이구 좋아라 술꾸러기.”


선장 그놈의 술타령 그만 해라. 안 그래도 우리끼리 동짓날 축제라도 벌이자고 하던 참이었어. 팥죽도 먹고, 선의가 좋아하는 술도 먹고. 그만 둘까보다.”

 

선의 반드시 해야해요. 술 때문이 아니라 마야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술을 먹, 아니 축제를 해야 해요. 그들이 못다한 축제를......”

 

선장 어쩌다보니 마야 이야기만 길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동지를 한해의 시작으로 생각하기도 했어.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부르고, 동짓날에 다음해 달력을 나눠주기도 했대. 떡국같은 새해음식인 팥죽도 쑤어먹고. 팥죽은 겨우내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준대. 또 팥죽이 악귀를 쫓아서 죽음이나 나쁜 일도 예방 한다고 하고.”

 

지루한 연극 같은 대화를 이제야 끝났어요. 누가 쓴 대본인지 진짜 연극이었으면 망했을 걸요. 적어도 저는 저런 이야기에 관심 없거든요. 팥죽이라는 음식에는 조금 관심이 가지만요. 이때 지금까지 말이 없던 요리사가 입을 열었어요. 


요리사 그럼. 팥죽 먹으면 지구 멸망 안 해? 안 죽는 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선장이 대답합니다.

 

선장 그래그래. 팥죽 먹으면 안 죽어. 다 살아. 멸망 안 해.”

 

요리사 신난다. 팥죽 만들어야지. 1221일은 팥죽 먹는 날이다!!!

 

선장 그래그래. 1221일은 멸망하는 날도, 해가 가장 짧은 날도, 동지도 아니다. 그냥 팥죽 먹는 날이야. 팥죽 먹는 날.”

 

착한요리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오늘 저녁은 거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장과 선의가 계속 말을 합니다. 저는 관심 없지만요.

 

선의 그나저나 마야사람들 말대로 새시대가 왔으면 좋겠어요.”

 

선장 제발 좀 왔으면 좋겠어. 우리 해적질도 좀 잘되고.”

 

선의 1221일에 다 같이 해 뜨는 거 봐요. 다시 길어지는 태양 보면서 술이나 마시죠. 맛나게.”

 

선장 새시대의 태양이라. 좋지."


요리사가 커다란 솥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어요. 아마도 저게 팥죽이라는 건가 봅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고, 달콤한 냄새가 나네요. 배가 고프네요. 조용히 있던 앵무새가 크게 울음소리를 냅니다. 앵무새도 배가 고픈 모양입니다. 빨리 요리사가 팥죽을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Fin-

 

Written by 주방의 새앙쥐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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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3 16:50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군 입대했을 때, 휴가 나와서, 제대하고, 졸업했을 때, 취업할 때, 친구 결혼식 때, 그리고 상갓집에서…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꼭 만나고 싶어서 불러냈던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십년을 넘게 알아왔으면서도 만난 횟수가 반년 사귀다 헤어진 지난 여친과의 만남보다도 적은 사람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저의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네요. 


그런 날이 있습니다. 꼭 그 사람을 보고 싶은 날.

그날은 돌이켜 보면 제게는 인생의 통과의례라는 주요관문이었더군요. 저를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보다, 그런 중요한 날이면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들키지 않고 불러낼 수 있었으니까요.

    

“잘 지내?”

“…(잘 지내냐고? 너는 지금 내 얼굴을 보면서 그런 말이 나오지? 네가 그 사람과 웃고 행복하게 지내니깐, 야윈 내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거겠지. 뭐, 잘 지내냐고? 그동안 보고 싶어서 혼났지, 임마. 페이스북이랑 미니홈피 글 보면서 참았다. 글은 또 왜 그렇게 뜸하게 올리니? 사진은 참 행복해보이더라. 그 사람이 너한테 아주 잘 해주는 것 같네. 야, 너만 잘 살았는지 알지? 나도 열심히 살았어. 너한테서 성공한 모습 보여주려고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산다, 내가 아주. 야, 그리고 나도 요즘 여자 만나.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 너 아니래도 나 멋지다고 하는 여자 많아…참…보고 싶었다, 많이. 여전히 예쁘구나, 너란 여자.)”

“뭐 해? 잘 지냈냐니깐?”

“응…그…그냥.”          

 

그동안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수천수만 가지 이야기 대신,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 단어뿐이었습니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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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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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과천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 몇 주 전부터 대형 프로젝트에 올인하며 밤낮없이 분주한 남편이 마냥 안쓰럽기만 한 요즘이었다. 다행히 성공리에 프로젝트를 맞추고 꿀맛 같은 휴식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마냥 부러웠단다.

“자기야, 근데 월요일엔 뭐 할 거야?”

다가오는 월요일이 그의 휴가인지를 지난주부터 알고 있던 그녀다.

“나? 민정이 만나기로 했는데?”

“민정이?!”


하마터면 ‘그게 어떤 X이야?’하고 반자동으로 나올법한데, 아니 진심 나올 뻔 했단다. ‘민!정!이!’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남편에게서 불렸던 것이 참 낯설었고 한편으론 설렜단다. 이 이야기를 해줄 때 그녀의 표정을 상기시켜 보면 굉장히, 무지하게, 더없이 설렜던 것 같다. 


40대 아줌마의 얼굴에서도 이런 표정을 볼 수 있구나, 하고 잠시 생각했던 나였다. 그렇다, 여기서 잠시 내가 또 잊었던 것이 있는데 아줌마도 여자인 것이다(내가 나의 엄마를 객관적인 여자로 보게 된 계기를 조만간 번외로 올리도록 하겠다). 그녀가 평소 들었던 호칭을 나열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줌마, ○○이 엄마, 안성댁(친정이 안성이다), 김 실장님, 김 집사님…어디에서도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주는 곳은 없었더란다. 대한민국 보편적인 아줌마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들이 본인의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은 참 친절하게도 세금 고지서, 각종 지로용지와 카드 명세서에 정확하게 기재 되어 있는 이름, 그리고 인터넷 쇼핑몰 할 때의 실명 확인과 각종 소비 상담에 관련된 통화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안전한 거래를 위해서 실명 확인은 필수지만 어딘가 씁쓸한 마음도 든다. ‘언제부터 소비자 각각 개인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그 정체성의 상징인 그녀의 이름을 반갑게 낭랑한 목소리로 ○○○고갱님! 하고 부를 수 있다니‘, 이렇게 생각한다면 배알이 너무 꼬인 건가.


같은 그녀의 이름 석 자인데, 남편에게서 불리는 그 이름. 무뚝뚝하기만 하고 이제는 너무 아저씨 같기만 한 그에게서 뜻밖에 불린 그 이름으로 인해서, 그녀는 20대 그들의 사랑스럽던 연애시절이 떠올랐고, 그동안 시누이와 시어머니께 쌓였던 남모를 감정, 남편과 아이들에게 치이며 쌓인 속상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루 종일 그녀에게서는 웃음이 사라질 수가 없었더란다. 도통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지만 이 얼마나 단순한가.

 

그렇다면 이번 주말에는 그대의 아내 손을 지그시 잡고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을 한 번 불러보자. 아니, 시도해보자(그대를 위한 적절한 표현인가?) 그동안 참 고마웠다고. 하지만 개인차에 따라 역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는 말자(너무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면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법)


Written by 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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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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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나를 알기에 더더욱 슬퍼지네.. 

                                                                - 회상Ⅲ/김태원



~♫~~

익숙해진 핸드폰 알람음, 가장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바꿔 놓았건만 ― iPhone4의 ‘공상과학’ 사운드, 사람 속을 뒤집음과 동시에 달팽이관에서 고막을 거쳐 외이도까지 쭉 긁는 느낌을 줌 ― 그 조차도 어느새 귀에 익어버린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과 함께 분주하기만한 어느 아침 날. 


여전히 잠에 취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남몰래 숨어 있던 동전 500원과 해후(邂逅)하게 되는 그런 날이 꼭 있다. 그럼 보통 우리는 살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딱 그 느낌과 그 타이밍이다.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 된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말이다. 단지 그 느낌의 남자로만 남아있으면 된다. 크게 신경 쓸 사람도, 마음 가는 사람도 아닌, 그냥 바쁜 하루의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하지만 가벼운 미소 정도는 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백원은 너무 작고, 천원부터는 너무 크다. ‘왜 이 돈이 주머니에 남겨져 있지?’ ‘무슨 돈이지?’하며 불안해진다. 심지어 대형마트에서 백원을 넣고 카트를 쓰느냐 오백원을 넣느냐에 따라 카트 회수율과 정돈 상태가 달라진다고 한다. 아직 동전오백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 존재인 것 같다. 디지털 공상과학 사운드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함께 있으면, ‘기적’이라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던 사람, 이 <동전오백원> 카테고리의 글들은 그 한 명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받쳐질 것이다. 10년이란 세월동안 내 마음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그 세월은 한 남자를 500원이라는 값어치로 흥정을 맺게 만들었지만 ― 그렇다. 바로 당신을 위한 글이다. 


앞으로 해적단 수컷들의 눈물겨운 구애 공세를 기대하시라. 당신은 그저 오백원 만큼의 미소만 지어주면 된다. 



* 작곡가 김태원씨는 작곡을 할 때 첫사랑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 역시 이뤄지지 않은 아픈 사랑이다.

* 이글의 초안은 2009년 6월 여름날이다. 언젠가부터 한 코미디언이 “궁금하면 500원~”해서, 나의 동전오백원 프로젝트가 희화화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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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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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요리사가 즉석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동댕이치더니 곧바로 슥슥 회를 떠버린다. 멍때리던 선원들이 고기를 보니 저글링처럼 달려든다. 물고기 크기가 엄청크다. 허리만큼 오는 정도의 길이에 늘씬하게 빠진 몸매. 프리즘이 빛나는 비늘이 온 몸을 덮고 있는 녀석인데, 힘이 그야말로 장사다. 펄떡펄떡 뛰더니 꼬리로 요리사 엉덩이를 힘껏 후려친다. 요리사도 지지 않고 물고기의 몸뚱이를 힘껏 내동댕이친다. 저편으로 떨어져 나간다. 물고기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그냥 먹으랜다. 적어도 독은 없으니까 맘 편히 먹으라는 말에 삽시간에 몸뚱이 살점이 사람들의 입으로 흡수된다. 자연은 돌고 도는 법. 초고추장이 모자르다. 나가사키산 와사비가 물고기의 눈가에 점점이 번져 있다. 이 녀석의 눈은 아직도 껌뻑대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맛 있냐?" 최후의 한 마디를 던지고 끝내 눈을 감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마음씨 고운 사샤가 녀석의 눈을 가만히 감겨준다. 뭐라고 중얼중얼 기도를 한다. 종교도 없으면서. 그냥 곱게 먹지 않는다. 


"왜 살려줬어요?"

"뭐?"

"왜 살려줬냐구요?"

"누구?"

"그 때 있잖아요. 그 남자, 멀쩡하게 생긴 허연 사람."

"아."


괜한 질문으로 또 시비를 건다. 딱히 할 말도 없거니와 뭔가 대응하기도 꺼림직한 마음에 입을 잠근다. 질문을 한 건 맞는건지, 그새 손으로 회를 집어 입 안에 가득 넣는다. 또 지껄인다. 


"선장은 그런 사람 싫어하잖아요. 왜 살려줬어요?"

"그러게, 나보고 치료는 또 왜 해주라고 했지? 우리 약품도 별로 없어요. 다음 번 육지 때 사야돼요."


의사 레나스도 거든다. 파도가 잔잔해지니 입도 살아났다. 몸이 안좋은건지, 먹는게 불편해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도 쩝쩝 잘 먹는다. 몸져 누워있던 시체가 살아나 활동을 하니 보기에도 좋다. 좀비 같다. 웃긴 마음에 갑자기 대답을 해주고 싶다. 


"아, 그 사람. 재밌더라구."

"뭐가?"

"그냥, 말하는 게 꽤 흥미로웠어. 아니지, 말은 별로 안했지. 그 사람 직업이 교사더라구."

"교산데 왜 이런데 잡혀오고 그러지? 교사 구라아냐?"

"글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고향에 갈 모양이었던 것 같아. 배를 갈아타고 가는 길에 우리한테 걸린 것 같아."

"그래서 뭐가 잼있었어요?"


요리사도 묻는다. 손이고 몸이고 온통 시뻘건 피투성이다. 야생적인 인간. 


"먹으면서도 잘도 묻는구만. 뭐 딱히 집어 말하면...음..."

"뭔데요 빨리 말해요!!!"


셋이서 일제히 달려든다. 


"뭐야 이 분위기는;;; 그래, 그 놈. 대화를 그림으로 하더라고."

"그림??? 무슨 그림???"


사샤의 눈이 빛난다. 왜 나에게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다. 


"아, 보통 잡혀들어오는 놈들은 눈도 제대로 못마주치고 늘 땅만 보잖아? 근데 그 놈은 아니었어. 나를 편하게...지긋이...바라보더라구."

"형이랑 잘해보고 싶었던 거에요."

"닥쳐. 입에 총알 박아 줄까? 그런 게 아니고. 뭔가...뭔가 모르게 별종이었어. 열의 아홉은, 아니지. 열의 열은 다들 살고 싶어 안달을 내잖아? 돈을 주겠다는 둥, 육지에 누구를 안다는 둥, 별 개소리 다 하고, 가족이 아프다느니 누가 어쨌다느니 착 엎드려서 다들 말이 많다구. 나한테 얘기해야 뭐 통하겠어? 근데 그 놈은 달랐어. 눈이 뭔가가..."

"눈깔이?"

"어, 눈깔이 굉장히 편안해 보였어. 넌 파랗잖아? 그 인간은 붉갈색이었는데, 눈이 말해주더라구."
"뭘?"

"억울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다."

"어떻게 알아요?"


속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그 교사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가 남긴 작은 노트. 소금기에 그새 눅눅해져 버렸다. 그가 그린 집이며, 사람, 동물, 나무, 편지지, 궁전 등등 단 3일만에 제법 여러 가지를 그리고 떠났다. 


"스페니쉬 계열의 사람이었던 것 같아. 요 쏘이 뭐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가까이 가서 얼굴을 쳐다봤더니 웃더라고."

"웃어요? 선장을 보고?"

"깔깔 웃는 거 말고, 그냥 희미하게 웃더라구. 근데 어쩐지 정겨운 느낌이 들더라구. 그래서 손을 풀어줬더니 주머니에서 노트랑 펜을 꺼내던데?"

"그냥 보기엔...뭐 별거 없는데?"


사샤가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그림의 실력도 형편 없거니와 뭔가 자신과 비교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인지 눈썹 가운데에 한자로 '내 천'자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림이 잘났다는 건 아니고 ㅋㅋ.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고는 그냥 그림을 그리더라고. 근데 신기한 건 그림 하나 가지고도 이 놈이 어디 사람이고 가족이 누구고, 누구를 가르쳤는지 다 알겠는거야."

"그래서, 어딜 가던 길이었대요?"

"리스본, 아테네에서 10년 정도 무슨 귀족 아들을 가르쳤던 모양이야."

"그걸 그림을 보고 알았어요?"

"그러니까 신기하단 거야."

"그래서???"


물고기는 이미 끝장이 나 있는 상태였다. 요리사가 일어나더니 포도주를 가져온다. 다들 목이 탔는지 벌컥벌컥 마셔댄다. 다들 얘기에 관심이 많다. 


"아...그래서. 리스본이 지 고향인데,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대."

"그래서 놔준거에요?"

"아니, 우낀 건 결혼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대. 단 한번도."

"........"

"우연한 기회에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거진 8년 동안 편지만 주고 받았다는거야."

"희한한 사람도 있네요."

"그 편지 하나를 보여줬어. 근데 편지지에 별 얘기도 없어. 글씨 몇 자 없는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 줄 알아?"

"이미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거잖아요."

"그래, 나중엔 둘이서 글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마음을 전했다 그러더라고. 정말 별 게 없어. 그냥 단순한 드로잉이야. 그 녀석이 산 새 책장. 여자가 가꾸는 화분, 화장대. 그냥 일상의 이런저런 것들을 간단하게 그려서 서로 그림으로 대화를 나누더라고. 그 그림을 보여주는데...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너희들이 봤어야 해."

"나 배에서 내릴까요?"

"어디 헤엄쳐서 가봐. 어쨌든,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을 편지로...더군다나 그림으로 소통하는 그 방법이 꽤 흥미롭더라고. 그게 나한테도 먹혔으니 그 놈은 목숨을 건진거고."

"역시, 남자는 한방이 필요하군요."

"여기 다 한방씩은 갖고 탔잖아?"

"죽빵 한 방 드릴까요?"

"먹었으면 치우고 가서 닥치고 잠이나 자."


날이 슬슬 어둑어둑 저물어 간다. 다 먹고 남은 물고기의 잔해를 햇볕에 널어놨더니 갈매기들이 훨훨 날아와 조근조근 쪼아 먹는다. 그래, 다같이 사는 세상. 너희도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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