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독도서관 옆 소격동 길을 지나다가 이 그림을 마주쳤을 때, 생전 처음 '그림을 사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12월의 겨울. 추위도 까맣게 잊은 채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림이 그림같지 않았다. 새로운 차원의 신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듯 했다. 내가 무의식 중에 꿈꾸던 진짜 이상향의 안식처에 다다른 듯한 완벽한 환상을 맛보았다. 


온 빛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 온 빛이 산과 바다에 내려 앉았다. 이곳은 물결도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 곳. 모든 것이 멈추었다. 빛과 그림자로 빚어낸 이 담박하고도 신비한 능선을 따라 차근차근 걸어가본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산 중턱에 잠시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바닷 속 세상이 훤히 보인다. 팔깍지를 끼고 그 자리에 누워버린다. 나도 이 그림의 풍경이 된다. 


갤러리 안에 있는 그림이 궁금해졌다.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걸려있는 것은 온통 산 뿐이다. 이영길이라는 화가의 작품이다. 수묵화도 아닌, 그렇다고 채색화도 아닌 수묵채색화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한국화에서는 금기로 여기는 빛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한국화는 선과 여백에서 그림의 여유로움을 찾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사람, 빛에서 그림의 안정감과 한적함을 끌어내고 있다. 재미있는 양반이다. 


한지 위에 일필휘지로 휘두른 먹의 굵직한 선과 농담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빛과 색채를 가득 채웠다. 수채화를 끌어들였지만 결코 거추장스럽다거나 인위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화에서 강조하는 어떤 유교적인 이념이나 정신같은 것은 애시당초 버린 것 같다. 그는 기존의 한국화가 요구하는 계보의 목적성을 내려놓았다. 꺾어내지르는 협곡과 그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 조그맣게 자연 속을 거니는 선비와 동자는 이 사람의 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는 단지 그가 생각하는 내면의 마음을 내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보이는 풍경이 아니다. 마음의 풍경이다. 그는 수묵화와 수채화의 중간계에서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둘 중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 화가의 세계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 결국 두 세계의 혼합 가운데 여러 실험을 거쳐 그는 답을 찾은 듯 싶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한 남자를 감동시키에 충분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빛깔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한방에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 하나로 쾌히 증명했다. 


한참을 감상하고 있으니, 멀찌감치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영길 화가다. 열중해서 보고 있는 모습이 좋았는지 흔쾌히 도록 한권을 선물로 준다. 웃으며 한 마디 던진다. "자주 와요"


나는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매일 이 갤러리 앞에 찾아와 한참 동안 이 그림을 감상했다. 좋은 술에 좋은 안주가 빠질 수 없는 법. 백건우가 연주한 에릭 사티의 Ogive # 1, 2를 연달아 듣는다. 사람, 그림, 음악이 모두 멈췄다. 진짜 내가 보인다.

 


<작품: A world opened with the light...- mountain_130.3x162cmㆍ장지에 채색_이영길_2009>

    - 이영길 개인전 / 2009 12. 23 WED - 12. 30 WED / AKA Space 


Written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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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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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DELSSOHN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나타: 2 Sonata for Cello and Fortepiano]


  누군가의 음악을 들을 때 나는 ‘그 사람의 기운을 받는다’는 말을 즐겨 쓴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음악에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열정, 기쁨, 슬픔, 고뇌, 좌절, 초탈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은 음악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해당되는 얘기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매일같이 아침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두드리고, 서류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쓰는 동안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켜고, 온 몸에 잉크를 묻혀가며 악보를 썼다. 평생을 그렇게 말이다. 그들이 마신 수천 잔의 커피, 숨소리, 움켜쥔 머리칼, 환희에 찬 손짓, 페달을 밟는 유쾌한 발동작, 연인과의 달콤한 키스까지 그의 모든 것이 그 한 곡에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는 명반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클래식의 영원한 귀공자 멘델스존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나타: 2 Sonata for Cello and Fortepiano]. 첼로를 화두에 놓고 피아노의 선율을 밑바탕에 둔 멘델스존의 걸작 중 하나다. 그는 작곡가이기 전에 앞서 당대의 피아니스트와 어깨를 견주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 파울이 아마추어 첼리스트였기 때문에 그는 첼로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첼로의 우아함과 피아노의 경쾌함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실내악곡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정식이름은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펠릭스(행운아)라는 말 뜻대로 그는 클래식계의 타고난 '럭키가이’였다. 경제적, 정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안식과 평화의 온실 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쳤다. 할아버지는 계몽주의 철학가,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는 인텔리 음악애호가였다. 집안에는 자신을 위한 전속 오케스트라가 있어 언제든지 이들을 이용하여 여러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음악을 사랑했던 그의 가족들은 멘델스존가(家) 음악회를 만들어 당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정도였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피아노 한 대 살 수 없어 기타로 대신 작곡을 해야만 했던 암담한 현실과 비교하면 더욱 ‘행운아’라는 단어가 와 닿는다.  





  곡의 느낌은 한마디로 '즐거움' 그 자체다. 무리하지 않는 첼로 특유의 저음과 담백한 포르테피아노의 핑거링이 어우러져 보드라운 한편의 시를 써 내려 나아간다. 웅장한 저택의 아침, 멘델스존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실내악을 연주하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음폭의 큰 기복이 없고, 곡 전체가 완만한 음률의 곡선을 이루고 있어 귀의 거슬림이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이 곡이 아침에 듣기에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침은 하루 중 가장 예민한 시간이다. 몸의 구석구석이 휴식에서 깨어나는 때이므로 함부로 깨우면 하루가 삐걱댄다. 그래서 혹자는 아침 10시까지 웃으면 그날 하루 종일 웃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아침을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하루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10분만 일찍 일어나보자. 그리고 멘델스존이 당신에게 선물한 이 곡을 살며시 틀어보자. 볼륨을 가운데에 맞추고 귀부터 슬며시 깨워보자. 그리고 풍족하고 즐거웠던 멘델스존의 럭셔리한 삶 그 자체를 흐르게 하자. 그가 웃음 지으며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나의 인생도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포근한 이불 속에서 같이 웃음 지어주자. 나의 아침에 좋은 음악을 선물해주는 것, 그리고 나에게 살며시 웃음 지어주는 것,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면 이제 당신의 방에 커튼을 활짝 열어라. 오늘 하루도 활짝 열린다는 그 마음으로 활기차게 시작해보자. 당신의 오늘 하루, 당신의 한번뿐인 인생, 이 멘델스존의 명반으로 응원하겠다.    


Written by 사샤


[각주:1]

  1. 이 앨범은 마지막 LP세대이기도 한 네덜란드의 노장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의 연주와 노련한 포르테피아니스트 스텐리 호흘란드가 호흡을 맞추었다. 현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고 포르테피아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 피아노로 연주할 경우, 피아니스트의 색깔에 더 비중을 두어 개발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음향이 지나치게 강하고 풍만하여 첼로의 색깔을 오히려 덮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대에 만들어진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하면 음의 지속 시간이 짧고 음색이 훨씬 밝고 투명해서 베이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첼리스트는 자신의 개성을 뽐내기 위해 애써 무리할 필요 없이 멘델스존이 기획한 감미로움 그대로를 온전히 살려낼 수 있다. 연주자의 균형뿐만 아니라 악기의 균형까지 섬세하게 고려한 명반 중의 명반이니 꼭 들어보기 바란다. [본문으로]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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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제목이 톰과 제리다. 70년대중반~80년대초반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고 듣고 자란 친숙한 만화 주인공들이다. 2011년, 그들을 다시 캔버스 위에 올려놨다. 이런 그림이 아주 잘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림을 보는 감상자에게 무한한 해석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현대미술의 묘미에 아주 충실한 작품이다. 

 

제리가 테이블 가운데 놓인 그릇 위에 맘편히 걸터 앉아 치즈의 맛에 흠뻑 취해있다. 그 옆에 톰이 보인다. 눈을 부라리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당장이라도 제리를 낚아챌 기세다. 매번 골려주는데 재미붙인 제리와 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톰의 심리상태가 그림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둘을 사이에 두고 검은 액자틀 하나가 놓여져 있다. 문제는 그 검은 액자틀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의 여부다. 어찌보면 뚫려 있는 액자틀 속에 톰이 고요히 잠복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톰을 그린 그림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감상자를 갸우뚱하게 하는 데는 뒤에 놓인 액자들도 한몫한다. 화가는 맨 앞에 놓여진 액자틀만 정면으로 제시한 채 나머지 액자는 측면으로 돌려 그것이 어떤 그림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탁월한 센스다. 

 

나는 아마 모든 액자에 톰이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이 화실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화가의 화실일 것이며 그 화가는 자신의 반려자와 다름없는 고양이 톰을 이번 전시 작품의 모델로 삼아 화실 전체를 꾸며 놓았을 것이다.  


'톰의 화실'에 잠입한 제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양반처럼 앉아 느긋하게 승리의 자세를 취했을 것 같진 않다. '이게 진짜 톰이야 아니야?' 하며 슬금슬금 곁눈질로 톰의 액자들을 신중하게 하나하나 짚어 나가면서 결국 '이건 그림이야!' 결론 내린 후에야 마음을 놓았겠지. 

 

제리의 털이 흰색이란 점도 퍽 흥미롭다. 원래 제리의 털 색깔은 붉갈색이다. 일반적인 쥐에 대비되는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한 듯 보이는데, 실험용 쥐처럼 정말 우둔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특출난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지, 그것을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제리가 모든 치즈를 의기양양하게 먹어치울지, 톰이 액자틀에서 튀어나와 제리를 먹어치울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과연 무엇이 맞는지는 이 그림을 그린 짓궂은 톰의 화가만이 알겠지. 

 

<작품: Tom and Jerry_유민석_2011>

    - 한국미술, 내일을 보다 / 2011 2. 9 WED - 2. 18 FRI / AKA Space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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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길에서 서울역을 만났다. 거대한 현재의 驛舍가 아닌 舊역사 말이다. 입구가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닫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歷史에 한자리를 마련하고서 말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니 안쪽에서 북소리가 흘러나온다. 북소리에 이끌려 역사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이 문을 지난 것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 다녀올 때가 아닌가 싶다. 여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문을 나섰을까.


중앙홀로 들어서니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사람들의 행선지에 대해 궁금해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린다. 홀의 중앙에서 공연자가 큰북을 치고 있다. 천장이 높은 홀에 북소리가 울린다. 홀로 연주하는 북공연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홀을 지나 예전에는 대합실이었을 공간으로 들어간다. 설치미술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술 문외한에게도 흥미로운 전시들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라는 생각을 한다. 찬찬히 구성요소들을 뜯어보고, 구성요소가 결합한 방식을 찾아내고, 결합하여 이룬 전체형태를 파악한다. 적어도 나의 경험 안에서 나만의 의미로 즐길 수 있다.


이 와중에도 북소리는 귀를 울린다. 지금 공간을 통해 전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10분전의 북소리가 남아있는 건지.


익숙하지 않은 미술을 감상하는 것에 지쳤는지. 서울역의 예전 모습을 찾고 있다. 흔적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철로 위에 KTX가 정차해 있는 것이 보인다. 흑백사진 속에서 증기기관차가 있던 철로에 지금은 고속열차가 있다.


섹소폰을 부는 사람이 좁은 복도를 오가고 있다.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두둥둥소리에 맑은 멜로디가 섞인다.


잠든 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있다. 엄마의 손을 잡고 표를 끊는 아빠를 기다리는 꼬마가 있다. 한 가족이 뛰어와 간신히 열차에 오른다. 기차 출발 전에 가락국수 사오면서 아빠가 웃는다. 요이땡을 감싼 비닐 벗겨 소년에게 주는 엄마도 보인다. 시간이 여기에 동시에 설치된다.


기억을 지나 어느 방안에서 비올라-혹은 첼로-의 선굵은 소리가 추가된다. 그리고 문을 지나 어느 순간에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을 만난다. 시간 혹은 공간의 차이를 두고 펼쳐지는 4중주.


기묘한 4중주는 다시 중앙홀에 들어서자 끝이 났다. 움직이지 않고선 연주되지 않을, 걷기도 완성되는 음악은 거기서 끝이 난다. 나는 관람자인 동시에 연주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다.


다른 플레이어의 음악을 상상해본다. 누군에게는 타악음악이고, 다른 이에게는 바이올린과 큰북의 2중주이다. 또 다른 조합의 3중주도 있을 것이다. 브레이크 타임의 연주자는 침묵의 음악을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동선에 따라 음악은 무한히 늘어난다.


1925년 완성된 이후로 서울역사는 이미 하나의 공연장이자 전시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것이 연주고, 기억이 미술이다. 우리는 누구나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아주 긴 음악을 연주하는 예술가가 아닐까?


구 서울역사가 문화역서울284로 다시 태어난 것이 반갑다. 과거 한 시점으로의 복원도 좋지만, 한 아이가 누군가의 음악에 감격하고, 새로운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



왼쪽 건축초기 1, 2등 대합실, 오른쪽 복원 후 전시실1로 활용



  o 구 서울역사가 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로 개장한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2011년 서울역 복원을 마치고, 2012년 4월부터 복합문화공간으로 탄생했다. 개장이후 19개의 전시, 공연, 강연, 축제 등이 열리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아직 예정된 연주가 없는 상태이다.

최근까지 6주동안 55인의 작가와 함께하는 150여회의 퍼포먼스 전시 '플레이타임'이 연주되었다. 본문은 6주중 하루에 연주된 음악의 기록이다.

홈페이지(seoul284.org)에서 프로그램 소개와 함께 과거와 현재의 공간 비교, 서울역과 서울에 대한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Written by 여행비둘기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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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가 사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너무 춥다. 시베리아 벌판을 우리 동네 밑장에 깔았나보다. 밤이면 밤마다 울어대던 길 고양이들도 자취를 감췄다. (아마 그들의 아지트에 모여앉아 고래고래 욕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러나 고양이처럼 마냥 춥다고 집에서 웅크릴 수만은 없는 법. 카페라도 나와 앉아있어야 책이라도 한 줄 볼 것 같아 추운 밤 할리스로 향했다. 허허, 역시 연말은 연말이다. 할리스 4층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다행히 4층 가운데 빈자리 하나 남아 있어 냉큼 앉아 가방으로 영역 표시를 하고, 우당탕 내려가 라떼 한잔 시켜 올라왔다. 할리스는 회원카드만 있으면 사이즈 업 또는 샷 추가를 무료로 해준다. 야호, GRANDE 사이즈! 맛있게 냠냠.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공부거리를 펼치고 앉아, 손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한번 주욱 펴본다. 주위를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A, B, C, D, E, F, G ~ Z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굳이 보려고 보는 것은 아니요, 굳이 들으려고 듣는 것은 아닌데, 2시 방향의 커플이 매우 매우 매우 눈에 띈다. 둘의 몸이 찰흙처럼 엉키고 섞여 스크류바를 이루었다. 아나콘다 같기도 하고, 아무튼 죽어 못산다. 두 눈이 마주칠 때마다 번갯불이 번쩍번쩍 일면서 쪽쪽 입맞춤을 나누고, 신났어 아주 그냥 신났어 ㅋㅋㅋㅋㅋ.


 남자가 무얼 발견한 듯 여자의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만히 그녀의 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어, 못보던 귀걸이네? 귀걸이 샀어?”

“아냐, 언니가 준거야. 나 별로 악세사리 하는거 안 좋아하잖아.”

“아...난 또, 너 귀걸이 잘 안하는데 웬일로 샀나 했지. 근데 왜 했어?”

“아 몰라 진짜, 아침에 나오는데 언니가 이거 하고 나가라고 하면서 끼워주잖아. 해주는데 또 싫다고 하기도 그렇고 냅뒀어 그냥.”


 그냥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귀걸이. 수수한 롱코트에 니트와 청바지 차림의 여자. 헐, 귀걸이만 무지하게 튀어 보인다. 브랜드는 스와로브스키. 귀 밑으로 길게 드리워진 깨알 같은 보석들이 반짝 반짝대며 무도회 입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귀걸이만 보면 그녀는 지금 영화제 시상식이라도 갈 기세다. 언밸런스하다는 게 요런 걸 두고 이야기하는 거다. 남자가 꽤나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언니는 되게 화려한 거 좋아하나보다?”

“우리 언니 이런 거 되게 좋아해.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반지 다 해. 지가 무슨 클레오파트라인줄 알아. 나 참.”


 여자가 큭큭 대며 웃는다.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우리 언니 대따 특이해.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언니 때문에 고생 엄청 했어. 하하하. 생각하니까 진짜 욱기다 ㅋㅋㅋ.”

“왜왜, 뭐가 웃기는데?”

“우리 언니가 옛날에 어렸을 때 툭하면 없어졌거든? 그게 다른 애들처럼 길에서 가다 잃어버리고 그러는 게 아냐. 어떻게 잃어버리는 거냐면, 우리 언니가 지금도 진짜 나대거든? 옛날에도 똑같았는데, 집에만 나가서 놀면 다른 집 초인종을 막 누르고 그냥 다짜고짜 ‘안녕하세요 저는 모모모에요’ 꾸벅 인사하고 들어가서 저녁 7시고 8시고 그 집에서 계속 노는거야. 그러니까 집에서는 잃어버렸다고 난리가 나는거지!”

“모르는 집에 그냥 들어가서?”

“어어, 미친거지 ㅋㅋㅋㅋㅋ. 그러니 우리 엄마 속이 안 타들어가겠어? 그래서 우리 엄마가 짱구를 굴렸어. 요 기집애를 어떻게 해야 안 잃어버리나 하다가 생각한 게 악세사린거야.”

“악세사리로 뭘?”

“인제 언니한테는 ‘예쁜 악세사리를 하고 다녀야지 사람들이 이쁘다고 하는 거에요, 길도 안 잃어버리고’ 얘기해주면서, 팔찌랑 목걸이를 해줘. 근데 그 팔찌랑 목걸이에 집 주소랑 전화번호, 엄마 아빠 이름, 애 집에 보내주세요 메시지 딱 적힌 꼬리표를 거기다 같이 붙여주는거야. 찾은 사람이 보라고. 사람들 눈에 잘 띄라고 또 보석 이따 만한거로 해주고, 화려한 거 막 이런 걸로 해주고. 웃기지 않아? ㅋㅋㅋㅋㅋㅋㅋ”

“아~~그래서...언니는 지금도 악세사리 다 하고 다니는 거야?”

“어어, 언니는 진짜 꼬맹이때부터 온 몸에 보석치장 한 거지. 지가 맨날 그러고 다니니까 커서도 이게 버릇이 된거야. 나중엔 엄마가 안 사줘도 자기가 알아서 다 사. 고등학교 때 엄마 몰래 카드 갖고 백화점 가서 50만원 긁어서 뒤지게 맞은 적도 있어.ㅋㅋㅋㅋㅋ”

“아 진짜? 대박이네...”

“지가 하다가 또 질리면 나를 줘. 나보고 하라고. 근데 난 뭐 어렸을 때부터 언니가 그러고다니는 거 보니까 별로 악세사리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너가 악세사리 별로 안좋아하는구나. 핫핫.”

“무슨 목걸이가 위치추적 장치도 아니고 그게 뭐야. 그냥 보기에도 답답해. 그래서 안해. 그냥 오늘같이 억지로 끼워주면 해. 해준다는 거 안한다고 그러면 완전 삐지거든. ㅋㅋㅋ”

“진짜 특이하네 하하”





  우와. 악세사리도 다 여자 나름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구나. 스와로브스키에도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넣을 수가 있는 거구나. 


Written by 선장


[스와로브스키 사진: 대림미술관 스와로브스키 展]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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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백건우. 그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 중의 하나가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


말 그대로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한편으로 갸우뚱했다. ‘한 손으로만 다채로운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상을 마친 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지손가락이 건반을 주도해 나아가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명쾌한 건반 하나하나가 가슴에 거대한 울림을 자아낸다. 라벨은 대단한 고집쟁이였다. 그 고집만큼 자신에 대한 실력과 자부심도 꼿꼿했다.  


청년 백건우는 프랑스와 라벨을 사랑했다. 그의 왼손에서 뿌려지는 타건의 신비로움이란 마치 땅거미가 지는 석양의 마지막 어스름을 불러일으킨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 이내 청량한 바람과 고슬고슬 풀벌레 소리가 그 빈 자리를 고독하게 채워준다. 찬찬히 밀려오는 피아노 음률에 검푸른 호수가 일렁이고, 오케스트라의 향연에 보라빛 하늘이 별꽃으로 물든다. 


백건우 연주의 백미는 역시 견실한 타건과 단단한 음향이다. 기교보다는 과감한 구도설정과 포치에 무게를 둔다. 커다랗고 새까만 거미 한 마리가 건반 위를 둥당둥당 기어가는 것 같다. 리듬미컬하지만 결코 인위적이지 않다. 


라벨의 화려하고 색채 띤 음의 구현을 수용하되, 결코 극단의 낭만에 치닫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음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은 과감하게 쳐내고 살릴 부분만 확실히 살린다. '라벨은 라벨이고 나는 나니까 듣고 싶으면 들어라'하고 배짱부리는 것 같다. 과연 배짱부릴만한 피아니스트다.


Written by 사샤




[추천] 백건우를 원한다면?
▶ 백건우 / Gary Bertini - 라벨: 피아노 협주곡 (Ravel: Piano Concertos), ORFEO, 1991. 

[추천] 라벨을 원한다면?
▶ This Is RAVEL, SONY, 2002. 
  (CD1: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어미 거위> 모음곡, <밤의 가스파르>, <우아하고 감상적인 활츠>)
  (CD2: <소나티네>,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스페인 광시곡>, <쿠프랭의 무덤>)
  (CD3: <볼레로>, <물의 희롱>,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라 발스>, <현악사중주 F장조>)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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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시대의 해적이다] 늑대소년, 그 시절을 향한 무한긍정, 그리고...

 

 

 

 

용산에서 늑대소년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다. 동창회 부부동반 모임인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이 정겨웠다.

 

신호가 얼른 바뀌지 않아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어르신 한 분이 또다른 어르신에게 핀잔를 준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안그래도 그 어르신이 뭘 그렇게 찾으실까 궁금해하던 중이었다. 자연히 귀를 쫑긋 세웠다.

 

"입대할 때 용산에 모였잖아. 육이오 때. 육십년만에 처음 오는 것 같네."

 

대답을 하면서도 어르신은 계속 무언가를 찾았다. 핀잔을 줬던 어르신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스물도 안된 소년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의 심정이란...그가 마지막으로 본 용산의 풍경은 참으로 남달랐겠지. 구름 한 점, 들꽃 하나, 돌맹이 한 개 조차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증기기관차에서 용산역을 바라보며 '돌아올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306보충대에 입소할 때의 느낌조차 세상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라는데...)

 

1953년 용산역 플랫폼의 증기기관차

 

용감했지만 미숙했던, 순수했지만 불안했던, 앳된 청년은 열차를 타고 떠났다가 6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다시 용산역 앞에 섰다. 몸을 실었던 증기기관차는 고물이 되어버린지 오래고, 지금은 KTX가 다니는 세상이다.

 

연륜있지만 쇠잔했고, 현명하지만 겁많은, 주름진 노인은 역전에서 무얼 찾고 있는 걸까?

 

60년 전 길가에 피어있던 이름 모를 들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먹었던 국밥집을 찾고 있다. 많이 먹고 힘내서 살아오라며 한그릇 더 말아주던 주인아주머니는 살아계실까. 혹시나 해서 찾아들어간 60년 전통 원조 할매 국밥집에서 눈물과 함께 했던 그 맛을 느낀다면...

 

순수했더라고, 좋았더라고, 두렵고 불안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고, 이제는 알았노라고 그 시절을 한없이 긍정하지 않을까?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삶에 힘들어서, 생활에 지쳐 잊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변하지 않은 무언인가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미묘한 장면의 교차, 가끔 이럴 때 주변을 의심하곤 한다...

 

송중기는 잘 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자가 아닌지라,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치들을 때에도 무언가 부족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치열한 소중함의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지막 10분에서 부족한 감정은 채웠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시절의 철수와 순이가 아니라 나이들어버린 순이일지도 모른다고...

 

때론 모르는게 용감한거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는것이 많아져서 겁쟁이가 되버려.

나이 들어 어른이 되면 눈에 안 보이던게 많이 보여. 그렇게 아는게 많아져서 못하는게 많아져.

인생에 딱 한 번 뿐이야. 그 때가 지나면 다신 안 와.

- 늙은 순이가 젊은 손녀에게 -

 

[이미지 출처]

http://wolfboy.interest.me/

http://donsdepot.donrossgroup.net/dr141.htm

 

written by 요리사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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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0:34



“겨울이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이렇게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Wham의 ‘Last christmas’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노래지만 내가 처음 들었을 땐 나의 첫 스무 살의 겨울이었다.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고 성인으로서 발돋움의 설렘과 겨울의 푸근함이 만나 한껏 들떠있던 때였다. 오는 눈만 봐도 두근거림에 밖을 뛰다닐 정도로 풋풋함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Last christmas를 처음 들었을 당시에도 그 풋풋함과 두근거림 그리고 설렘이 함께했다. 


눈 오던 스무 살 겨울. 내가 좋아하는 누나와 함께 탄 버스에서 난 누나의 이어폰을 통해 Last christmas를 들었다. 누나가 듣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뺏어 내 귀에 꽂자 처음이지만 참으로 따듯한 멜로디가 나오고 있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지만 그래도 똑똑히 잘 들리는 단어는 ‘Last christmas’라는 단어. 고개를 돌려고 나는 누나에게 물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왜 캐럴을 듣고 있어?” 누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이 노래는 캐럴이 아니고 팝송이란다.” 팝은커녕 국내 가요도 잘 안 듣던 나로선 크리스마스가 들어가니 당연히 캐럴인줄 알았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그 사람과 난 연인이 됐고 함께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Last christmas를 함께 듣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도 스무 살 밖에 안 된 나로서는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성인으로 맞는 겨울, 첫 여자 친구 그리고 첫눈. 하는 대부분이 처음이어서 인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설랬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 해 겨울이 끝날 때쯤 나는 그 사람과 이별을 했다. 수원 어딘가에 있는 커피숍에서 이별을 통보 받았다. “우리 그냥 누나 동생사이로 지냈으면 좋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이별통보를 받은 그 커피숍에서도 Last christmas가 따뜻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노래 나올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그 사람은 이별을 했다. 첫 이별인 만큼 많이도 아팠다. 죽을 만큼. 이별 후 나는 Last christmas를 듣지 않았다. 

다음 해 더운 여름날 나는 입대를 했다. 이별에 대한 홧김은 아니었지만 예정보다 빠른 입대였다. 입대 후 선임 절반 정도를 전역시켰을 때 쯤 Last christmas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겨울은 아니었지만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리움에 잠시 먹먹했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인지 통칭 싸제의 겨울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노래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상당히 선임이 된 후에도 나는 줄곧 Last christmas를 듣고는 했다. 잘 때도, 내무실에서 쉴 때도. 그러자 어느 날 한 후임이 내게 물었다. “겨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캐럴을 들으십니까?” 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이 노래는 캐럴이 아니고 팝송이란다.” 


예비역이 끝난 지금에도 내 이어폰에는 여지없이 Last christmas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사람 이어폰에서 따사로이 흘러나왔던 멜로디처럼 올 해 겨울도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다. 그 해 겨울처럼.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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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e(1996)]


"아버지는 없지만, 난 살아있어. 세월은 가고 절대 영원한 건 없지. 하지만 중요한 건 인생은 멈춰 있지 않다는 거야. 포기하지 말고 결국 살아가야 해. 모든 순간에서 이유를 찾아야 해."


현존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의 일대기를 그린 명화, Shine의 마지막 명대사다. 아내 길리언의 도움으로 중년의 나이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을 되찾은 데이빗은 성공적인 콘서트 데뷔 후 고향에 잠든 아버지 피터 헬프갓의 무덤을 찾아간다. 수많은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독보적인 피아니스트 한 사람으로 재기하기까지, 그의 혹독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지독하리만큼 '아빠와 아들'의 애증스러운 관계의 틀에서 이야기를 풀어나아가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는 8살의 데이빗이 마을에서 열린 어린이 연주대회에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는 데이빗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I'm gonna win, gonna win, win, win, win..."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다짐의 다짐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차분히 피아노에 앉아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형편없는 연주실력에 지쳐 떨어진 심사위원 벤 로덴이 데이빗의 놀라운 연주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뜬다. 뒤이어, 데이빗이 연주하는 피아노의 바닥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피아노가 앞으로 점점 밀려간다. 연주 중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은 당황하지 않고 의자에 왼발을 걸어 죽죽 앞으로 끌고 나가면서 연주하더니 나중엔 아예 일어서서 곡을 끝까지 완주해낸다. 사회자가 "완벽해요. 완벽한 연주입니다." 감탄을 하자. 데이빗의 아버지 피터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읊조린다. "제 아들입니다. 제 아들."






그러나 데이빗은 그 연주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아빠와 아들은 조용히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아들이 체스에서 수세에 몰리자 아버지는 체스판을 쾅쾅 내리치며 이야기한다.  


"또 지겠구나 또 지겠어. 항상 이겨야 돼! 이겨야 된다구! 데이빗, 내가 너만한 나이 때였단다. 아주 예쁜 바이올린을 샀단다. 참 아꼈는데 그게 어떻게 된 줄 아니?"

"네, 박살났어요."

"그래! 박살났지!. 데이빗, 넌 운이 매우 좋은 녀석이야. 할아버진 음악을 싫어하셨단다. 넌 아주 운이 좋은 애야. 말해봐."

"전 아주 운이 좋아요."

"그래, 아주 좋아. 이거나 치워라."


아버지 피터는 거실 끝에 조용히 앉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연주를 듣기 시작한다. 데이빗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는 피터의 마음 한 켠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았던 음악에 대한 냉대와 멸시의 아픔이 깊게 깔려 있음을 서두에서부터 비춰준다. 그날 밤, 데이빗은 새벽에 피아노 앞에 앉아 낮에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을 조그마한 손으로 떠듬떠듬 연주한다. 그 소리에 깬 아버지가 나와서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쳐다본다. "아빠, 저도 이 곡을 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언젠간 칠 수 있을거다." 아들을 꼬옥 껴앉는 아버지의 모습. 라흐마니노프의 위대함을 데이빗을 통해 완수해 내겠다는 피터의 보상심리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장면이다.  


피터는 연주회 당일에 특별상을 주러 집까지 찾아왔던 심사위원 벤 로덴을 떠올린다. "우승이 아니니 패자가 된거죠."라고 일축하여 그를 돌려보내긴 했지만, 데이빗이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력을 뛰어넘는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찾아간 벤 로덴은 데이빗을 따듯하게 맞아준다. 벤은 데이빗의 천재성을 감지하고, 어떤 레슨 비용도 받지 않고 그의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완성시켜 나아간다. 피터는 라흐마니노프를 계속 요구했지만 벤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기본기인 모차르트부터 가르친다. 그리고 천재의 탄생. 데이빗은 각종 피아노 대회에서 수도없는 상을 거머쥐며 클래식계의 단연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이런 데이빗을 세상이 그냥 놔둘리가 없다. 한 대회에서 미국 장학금 유학의 기회가 찾아오고야 만다. 그러나 데이빗은 여기서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라는 난관을 만나게 된다. 피터는 데이빗에게 이야기한다. "미국엔 갈 수 없다. 우린 한 가족이야. 가족은 함께 있어야 돼. 이게 가장 현명한 길이란 걸 안다." 단호한 아버지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데이빗은 큰 시름에 빠지게 된다. 




곧이어 영국 왕립학교 전액 장학금 입학이라는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두 번째는 달랐다. 데이빗은 아버지의 혹독한 반대를 뿌리치고 집을 떠난다. 무작정 문을 박차고 나가는 데이빗에게 피터는 소리친다. "지금 나가면 다시는 못돌아 온다. 데이빗, 가지마라 부탁이다." 그 말을 뒤로 한 채 데이빗은 떠났고,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피터는 그동안 아들의 수상에 관한 기사 스크랩을 꺼내 모두 불태워 버린다. 


천재에게는 천재를 알아주는 스승이 있다고 했다. 영국 왕립학교에서 새로운 음악의 삶을 연 데이빗은 제 2의 아버지 파크스 교수를 만난다. 만남의 시작은 Franz Liszt의 La Campanella의 연주로 열린다. 피아노 건반을 땅!땅! 누르며 파크스가 외친다.  


"잘봐, 데이빗! 공격적으로 쳐봐! 악마처럼!"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죠?" 

"리스트도 줄을 끊어먹었지." 

"네 맞아요"

"딴 데를 보지 말고 악보에 시선을 고정시켜."




파크스가 데이빗에게 '악마의 연주'를 요구한다. 기본의 단계에서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한 인간의 개성을 폭발적으로 뿜어내는 격상의 단계임을 암시한다. 위대한 스승 파크스의 지도 하에 데이빗은 점점 천재 본연의 기질을 뿜어내기 시작하고, 그는 곧이어 다가올 오디션 연주회의 곡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 피터가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3번. 


"라흐마니노프...정말인가? 3번은 불멸의 곡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연주할 수 없네."

"전 충분히 미쳤다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 그렇지 않나요?"




끝없는 노력의 노력, 연습의 연습. 쉬지 않고 반복되는 악보와의 사투, 건반과의 전쟁.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반미친사람의 모습으로 라흐마니노프 곡을 완성해가는 데이빗의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연습하는 피아노 앞에는 아버지와 다정하게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신문기사 스크랩이 붙어있다. 데이빗은 이 불멸의 곡을 완주함으로써 아버지를 떠난 죄스러움을 만회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연주회 당일을 맞게 된다. 그리고 파크스는 음악적으로 자신의 대를 계승할 최고의 제자 데이빗에게 말한다.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연주하게." 스승과 제자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곡의 카텐차 부분이 흘러나온다. 이 곡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소름 그 자체의 씬이다. 




오디션 연주회에서의 데이빗의 환상적인 손놀림은 이 명작의 하이라이트다. 이 곡은 데이빗 헬프갓이 직접 녹음한 것을 내보낸 것인데, 대단히 특출하다고까진 말할 수 없겠지만 유명 연주가들과 비교했을 때 적어도 내공면에서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 보드랍게 건반을 어루만지며 선율의 능선을 넘어가다가도 급히 꺾어지는 협곡을 만난 것처럼 굽이굽이 쉴새없이 몰아치는 연주로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악마와 천사의 대비성을 면밀하게 그려낸다.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협연으로 타건의 정점을 찍은 데이빗. '브라보', '앵콜'. 사방천지에서 갈채박수가 쏟아진다. 지구 한편에는 아버지 피터가 서 있다. 아들의 완벽한 연주를 듣고 끝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그의 손엔 아들의 어렸을 적 수상메달과 녹음곡이 꼭 쥐어져 있다. 




그러나 데이빗은 연주 직후 심각한 정신분열에 빠져 천재 청년으로서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갇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파탄의 지경에 이른다. 유아기로의 퇴행. 피아노를 쳐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경고에 그는 매일같이 피아노가 있는 쉼터 앞에 가서 차마 들어가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하지만 데이빗은 병원의 피아노 재능기부로 온 한 여교사에 의해 발견되어, 곧장 퇴원수속을 밟게 되고 병원 인근의 한적한 마을의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절대절명의 기회가 찾아온다. 


'길잃은 개'로 마을사람들에게 홀대받던 데이빗. 집안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인근의 피아노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사람들의 멸시어린 눈빛과 비난을 뒤로 하고 피아노 다리에 왼발을 걸고 앉는다. "데이빗, 제발." 만류하는 레스토랑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피아노 전체를 단숨에 훑어내듯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연주하여 대중을 격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곡은 데이빗 역을 맡은 레프리 러쉬가 직접 연주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때부터 레스토랑은 데이빗 헬프갓의 명연주를 들으러 오는 관객들로 언제나 만원을 이루게 된다. Liszt의 '탄식'이 흘러나온다. 모두 숨을 죽이고 곡에 빠져있다. 차분히 내려앉는 마지막 건반에 관객은 모두 마음을 내려놓는다.  




한편, 신문기사에서 데이빗의 소식을 접하게 된 피터는 그날 밤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수십년만의 아버지와 아들의 재회. 여전히 아버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니? 어떻게 된 줄 알지?" 어린 시절 그 때의 데이빗에게 매일같이 던졌던 그 질문으로 자신과 아들과의 관계를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아들을 달라졌다. "아뇨,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애써 아버지의 간곡한 질문을 외면한다. 아버지의 아들 데이빗으로서가 아닌, 인간 데이빗으로 살고자 하는 심정이 바로 이 장면에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싶어하는 데이빗. 그에게 혜성같은 여성이 나타났다. 휴가 차 친구의 레스토랑에 놀러온 점성술사 갈리안은 데이빗을 만나게 되고, 그의 순수한 열정과 감성에 푹 빠지고 만다. 짧았던 휴가 동안, 그녀는 그 대신 편지를 써주기도 하고, 데이빗의 라이벌 로저 우드의 연주회에 데이빗을 데려가기도 하고, 바닷가에 그를 데려가서 마음껏 뛰놀게 해주었다. 고심끝에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있던 약혼자의 선물반지를 뺀다. 그리고 평생 데이빗의 반려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의 피아니스트 재기를 알리는 콘서트를 후원한다. 





연주회 마지막 곡은 자신의 스승 파크스와 처음 호흡을 맞췄던 그 곡,  Franz Liszt의 La Campanella로 장식한다. 청년시절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을 완주했을 때 쏟아졌던 그 갈채의 환호가 다시 터져나온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마음의 안식처인 자신의 아내, 오랜 세월을 묵묵히 기다려 준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자신의 기본기를 닦아준 벤 로덴이 힘찬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가족과 스승이 그를 다시 일으켜 주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정신질환 후 데이빗이 늘 중얼거리던 말이다. 아버지에게 냉대받은 그 아들 밑에서 자란 아들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아버지, 나아가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죄책감의 반대급부로 인해 데이빗의 뇌 속에는 '나의 잘못이다'라는 명제가 깊게 뿌리박힌 한 인간의 모습이 서 있다. 우리의 삶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영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는 거꾸로 '나의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너무나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피아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데이빗 헬프갓. 결국 그는 가족과 그의 소중한 지인의 도움으로 새 삶을 얻었다. 


라흐마니노프 제 3번은 아무나 칠 수 있는 곡이 아니다. 이 불멸의 곡이 탄생하기까지 라흐마니노프 역시 작곡 실패에 대한 뼈아픈 기억에서 붉어진 트라우마를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결국 그 곡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과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혹독한 시련을 겪고, 그것의 아픔과 절실함을 곡에 쏟아붓지 못하면 이 곡은 주저앉아 버린다. 모두들 애초에 연주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결국 데이빗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했고, 트라우마에서 허우적댔던 지난날의 외로움과 고통, 자아분열의 응어리를 혼신을 다해 연주에 담아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렇게 만만히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의 인생 전반에서, 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꿈틀대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되돌아봄의 시간이 필요할 때다.  


Written by 선장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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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령 : 다 끝났어 존!!! 다 끝났다구!!!

람보 :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대령님은 절대 끝낼 수 없어요!!! 이건 내가 시작한 전쟁이 아니라구요!!!

 

람보는 총을 냅다 집어던졌다. 그리고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RAMBO FIRST BLOODⅠ의 마지막 명대사 명장면이다.

 

람보는 베트남 참전용사다. 그 중에서도 적 주요인물 암살, 중요시설 폭파와 같은 고도의 게릴라 임무를 수행하는 그린베리 특수요원 중 단연 에이스로 손꼽히던 군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제대 후 전우가 살고 있는 록키산맥의 어느 한적한 마을을 찾아갔다. 그러나 전우는 만나지 못했고, 그가 고엽제로 인해 생긴 피부암으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온다.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았다. 오는 길이 문제였다. 그는 그 지역일대 모두를 그야말로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것도 수천 명의 미국 군경을 상대로 말이다.

 

람보Ⅰ의 가장 흥미로운 발상은 전쟁 장소와 대결 방식이다. 베트남 격전지에서의 미군 대 현지군의 대결이 아닌, 미국 내에서 벌어진 아군 대 아군의 전쟁을 주제로 다룬 것이다. 게릴라 특수요원 한 명과 떼거지 군경이 록키 산맥에서 대치하는 상황을 그려냈다. 람보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배경은 간단하다. 베트남전에서 겪은 극심한 고통과 트라우마, 돌아온 조국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와 냉대 이 두 가지다. ‘세계평화수호’라는 조국의 대의명분을 걸고 목숨 내 놓고 싸운 참전용사 람보 존 제이에게 돌아온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살인마’라는 피켓을 든 자국민의 우글우글한 시위현장을 지켜봐야 했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한 마을에서는 ‘갈 곳 없는 더러운 부랑자’라는 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조국에서 그는 참전용사가 아니었다. 참전용 소모품이라고 ‘쿵!’ 낙인찍힌 오고 갈 데 없는 쓸쓸한 ‘괴물’이었다.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극심한 외로움에 벌벌 떠는 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를 작은 마을의 보안관 윌 티즐이 건드렸다. 그것도 매우 비인격적인 가혹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윌은 람보를 얕봤고, 결국 그의 뿌리깊은 트라우마를 일깨워 록키산맥의 새로운 ‘참전용사’로 만들어버렸다. 람보를 계속 자극하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 경고한 트루먼 대령의 충고를 무시하고 윌은 결국 람보를 끝까지 잡아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한다. 결국 윌에게 돌아온 것은 ‘괴물 포획’의 기쁨이 아닌 ‘괴물’로부터의 총알 세례였다. 그가 람보의 포획망에 걸려들어 죽기 일보직전, 트루먼 대령이 나타나 람보를 말리지 않았다면 대갈통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람보 영화 한 편의 대흥행으로 인해 미국에서 베트남 참전용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이 영화의 마지막 앤딩은 두 가지였다. 람보가 자살하는 것 하나, 대령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교도소로 가는 것 하나. 시사회에서 두 가지 장면을 보여준 결과, 람보를 살려줘야 한다는 대중의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들이 주인공 람보를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 것은, 단순히 실버스타 스텔론이 보여준 화려한 액션과 육중한 근육, 현란한 무기술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베트남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군인으로서가 아닌 한 개인, 한 인간이 겪었을 사회로부터의 소외와 외로움의 아픔을 대중도 똑같이 느꼈던 것이다. ‘사회가 요구해서, 사회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해서 나는 이렇게 했는데 왜 지금 나는 사회의 소모품, 아니 그보다도 못한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하는 그 가슴저림의 공감 말이다.

 

람보가 마지막에 흐느끼며 트루먼 대령에게 이야기한다. 매일같이 동료들과 함께 전쟁이 끝나면 조국에서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하루는 귀여운 꼬마가 와서 구두를 닦지 않겠냐고 재촉하며 물었다고, 동료는 마지못해 승낙을 했고 구두통을 여는 순간 지뢰가 터지며 그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그의 살점이 내 몸에 튀었을 때 그 느낌을 아느냐고, 나는 지금도 매일같이 그 때의 악몽을 꾸면서 살고 있다고. 그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3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절대 절명의 목소리로 내 귀에 꽂힌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찾아와 밤늦게 술을 청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의 좋은 대학을 졸업했고, 기업이 그토록 원하는 외국어 실력과 대학성적, 자원봉사, 갖가지 사회활동을 모두 갖추어 내밀어 봤지만 나에게 진정 손을 내민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자신의 면접 방법에 문제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은 ‘면접,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에 관한 책이란 책은 모두 사서 읽어보고 있다고 했다. PPT 프레젠테이션 연습에 목소리 가다듬기, 거울을 보며 억지로 스마일 짓기 등 갖가지 원맨쇼를 준비 중이라고도 했다. 게다가 정신과에서 심리 치료를 통해 근근이 버틴다고, 빌어먹을. 조금만 더 힘내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나까지 거짓말을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엿이나 먹으라고 얘기해 주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카톡에 올라와 있는 친구들의 대화명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내 인생 어디로 가나”, “휴”, “고독의 언덕”, “어디까지 추락하나”, “비에도 쓰러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이게 사는 건가”, “우울”, “나는 개처럼”, “공부는 스트뤠스”, “암흑기”, “그저 그렇지 않은 사람”. 아주 가관이다. 미니홈피에도 들어가 보라. 당신의 친구들이 남긴 다이어리를 읽어보기 바란다. 우울함과 외로움의 N극S극을 치달려가는 글들이 수면 위에 떠오르고 있다. 어떤가? 정말 그들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복받쳐 그런 글귀를 남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나는가?

 

최근에 책 하나 나왔더라. 1000번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나? 내가 그 어른에게 묻겠다. 당신 세대들은 정말 천 번 흔들려서 ‘어른’이 되었는가? 내가 알기론 50번, 아니 10번 정도 흔들리고도 좋은 자리, 좋은 환경 잘 찾아간 사람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묻지마 살인, 말 못할 자살, 무개념 지하철녀와 버스남, 무차별 폭행, 청소년 왕따 등, 그 어른이 청년이던 시절에 보기 힘들었던 비이상적 사회현상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당신 말대로 1000번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 때의 고도 성장기 시절이 아니란 말이다. 굶어죽는 ‘올곧은 어른’. 적어도 나는 거부하겠다. 나는 람보Ⅰ의 마지막 대사가 이렇게 들리더라.

 

권력자 : 모두 끝났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모두 자네가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라고!!!

88만원 세대 : 아무것도 끝난 건 없어요!!! 절대 아무것도!!! 난 조국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스펙을 쌓았어요!!! 그런데 내게 돌아오는 건 뭐죠??? 난 괴물이 아니라구요!!!

 

돈에 굶주리고, 사람에 굶주린, 부모님에게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수천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아. 조국을 떠나라. 뼈빠지게 일해 준 대가로 소외와 냉대, 100만원 한 장 쥐어주는 그런 나라는 너의 조국이 아니다. 권력을 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소모품으로서의 고통을 느껴볼 최고의 기회를 주도록 하자. 대신, 투표는 하고 가라.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 분명한 자기 의사를 보여주고 지워지지 않을 우리의 족적을 남겨두고 떠나자.

 

우린 해적이니깐.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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