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왜왔니] 2. 임송희 선생님 댁의 보물구경


“아! 선생님!”

“아이구, 오래간만이네. 여기서 또 만나구.”


올 늦가을 즈음이다. 성북동 최순우 옛집에서 우연치 않게 선생님을 만났다. 동네 산책 나오셨다가 마침 이 곳에 들르신 모양이시다. 내가 석사과정 시절, ‘기본이 튼튼해야 쓸데없는 기교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며 좋은 말씀을 주셨던 그 분이시다. 툇마루에 앉아 수국차 한잔 기울이시는 모습이 흡사 한 마리 고고한 학이 속세에 잠시 내려와 쉬어가는 한 폭의 그림이다. 오늘도 역시 환한 미소로 맞아주신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이런저런 얘기를 한창 나누던 중 번뜩 생각이 나셨는지 다짜고짜 물으신다. 


“자네, 우리 집 구경 한번 안 갈 텐가?”


거절할 리가 만무하다. 집 구경이라면 환장하는 나인데 하물며 동양화의 대가의 집은 더더욱 구미가 당기는 법. 


“예, 가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 꼭 구경하고 싶었어요 선생님.”


옛집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성북동 깊숙한 골목으로 올라간다. 보이는 집들이 죄다 으리으리하다. 담장이 무지무지 높다. 옛 봉건영주의 성들이 모여 또 다른 세상을 이룬 것 같다. 그렇게 15분쯤을 들어갔을까. 대리석 계단이 펼쳐진 집 앞에 다다랐다. 


“자네, 우리 집 처음이지?”

“예, 선생님.”

“그럼 우리 집 보물 구경 좀 시켜줄게.”





선생님 댁에는 갖가지 진귀한 돌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들어가는 정문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마석(옛날 말을 탈 때 딛는 돌)에서부터 수석, 동자석, 돌확, 괴석, 석등, 돌상과 돌의자 등 옛 돌이란 돌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게 나중엔 이게 아주 재미가 있더라구. 뭐가 재미있느냐하면 돌은 방치의 멋이거든. 그냥 내버려둬도 보기 좋고, 물을 뿌리면 또 뿌린 대로의 멋이 있고. 오래 두고 보기에는 질리지가 않고 아주 좋다구.”






돌 하나하나를 설명하시면서 곱게 쓰다듬는 그 손길에 선생님의 돌 사랑이 느껴진다. 곧이어 선생님이 당신의 작업실로 나를 인도한다. 문을 열자마자 물씬 풍기는 먹의 향. 어렸을 적 서예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 방에서 은은하게 퍼지던 정겨운 향이다. 언제든 작업에 임할 수 있도록 갖추어진 붓과 물감, 문진과 문진 사이에 말끔히 펼쳐진 화선지. 간박한 가구들과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선생님의 작품들. 오랜 세월을 간직한 물건들이 엉키고 섞여 한 화가의 예술세계를 깊고 맑게 보여주고 있었다. 선생님이 커튼을 여니 하얀 빛이 우르르 쏟아진다. 






“자네 커피 마시지?”

“아, 제가 타겠습니다.”

“아냐 아냐, 손님이 커피를 타는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또 보여줄게 있어서 그래. 이게 내 진짜보물이라구.”


선생님이 꺼내 보여주신 건 작은 일회용 플라스틱 커피 스푼. 이게 진짜보물이라구?





“이게 뭔가 특별한 게 있나요?”

“아, 특별하지 그럼. 내가 예전에 아마...30년 쯤 됐을 거야. 우리 안사람이랑 같이 구라파 여행을 갔었다구.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일회용 커피스푼이란 게 없었을 때란 말이지. 호텔방을 들어갔더니 이게 있더란 말야. 우리 안사람이 이걸 보고 어찌나 신기해하고 좋아하던지 그게 그렇게 마음에 남더라구. 내가 그 때 가져온거야. 하하하, 요즘 사람들이야 이런 거 지천에 널려서 신경도 안 쓰지? 그치?”

“.........그래서 이걸 지금 30년 동안 쓰신 거에요?”





“하하하, 내가 별 얘기를 다 하는구만. 나는 커피 타 마실 때마다 이걸로만 마셔. 돌이나 커피스푼이나 다 마찬가지라구. 내가 아끼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간직하면 맛의 차원이 달라지는거야. 우리 안사람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고 커피스푼도 좋아지는거구. 하하하, 별 얘기를 다 하는구만 내가.”


나는 한 동안 커피스푼만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을 잃었다. 

 

Written by 선장

Photo by 선장

 


임송희 선생님은 호는 이석(以石), 심정(心井)으로, 충북 증평 출생이다.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 심전 안중식, 심산 노수현, 심경 박세원에 이어 심정이라는 호를 박세원 선생에게 받았다. 제 1회 겸재미술상을 수상하였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회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고문 지냈다. 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명예교수로 활동중이다. 

 

이전글 보기:1. 거문도 고도민박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食)은 생물이 활동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로써 단순 생산 활동에 그치지 않고 만남, 대화시간 등 다양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다는 즐거움은 포기하기 힘든 욕구중 하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행복감을 전해주는 식사를 혼자 한다는 것에 대해 한국은 얼마나 관대할까?


누군가 식사를 한다고 한다면 무의식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누구와?”이다. 식사를 한다고 하면 누군가 함께 먹는 다는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식당을 봐도 혼자서 먹기 보다는 여럿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혼자보단 2인 이상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서일 것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던지자면 ‘혼자 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이다. 질문 자체도 유치하다. 이 질문에 내 대답은 ‘있다’다. 그러나 사실 혼자서 밥을 먹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았다.


대학 시절만 해도 혼자서 밥을 먹는 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다 보니 주변에 항상 사람이 있던 것도 사실이고, 시간을 내기 편하다보니 식사 약속을 잡기도 쉬웠다. 그래서였는지 함께 밥 먹을 이가 없으면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건 일본여행 후였다.


친구와 함께 일본여행 중 가장 어색했던 것이 식당에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친구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온 우리가 다 어색할 정도로 혼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처음엔 어색 그 자체였다. 한편으로는 ‘왜이리들 혼자서 먹을까?’하는 생각도 들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도 사회생활을 하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누군가와 만나 한 끼 식사를 할 시간을 만들기보단 조금씩이지만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정확힌 익숙해졌다.


혼자 먹는 적적함이 익숙해지면 다음으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주변의 관심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독 주변에 관심이 많다. 주변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왔는지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인근 나라인 일본과 비교했을 시 우리나라 주변 관심 수준은 거의 병적으로 높다. 그러니 식당에서 혼자식사를 한다는 건 많은 관심을 끄는 행위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본의 무관심적인 정서보단 지나칠 수도 있는 우리나라의 정 많은 관심이 좋다. 이러한 관심이 때로는 주변의 범죄도 막아주며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주니 말이다.


혼자 생활하며 식사하는 인구가 많은 일본의 경우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잘 되어있다. 식당엔 혼자 먹을 수 있도록 칸막이가 되어 있는 식당도 있으며, 작은 테이블도 잘 갖춰져 있다. 편의점엔 혼자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며 레토르트 제품이 가득하다. 거기에 혼자서 밥 먹는 사람을 위한 비디오까지 있을 정도니 혼자 식사하기에는 일본은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주변관심만 조금 익숙해진다면 혼자 밥 먹기에 좋은 나라다. 웬만한 식당에서 음식은 포장이 가능하고, 배달문화는 세계 최고 수준인지라 주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또 한솥 도시락을 시작으로 맛도 좋고 저렴한 도시락들도 많이 등장해 혼자 식사하기가 좋아 졌다.


혼자 밥 먹는 것은 핵가족과 골든 미스 등 혼자 사는 사람이 늘면서 생긴 사회적인 문화다. 또한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생활에서 누군가와 시간 맞춰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없는 안타까운 우리현실이기도 하다. 아직은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져야할 문화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집에 왜왔니] 1. 거문도 고도민박.


거문도는 200여만평의 서도와 그 절반정도 크기의 동도, 가운데 약 33만평의 고도, 이렇게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개의 섬이 둥글게 모여 외부의 거친 파도와 풍랑을 막아주고 있어 예부터 천혜의 항만으로 불리워진 곳이다. 이 세 섬 가운데에 100만평의 바다가 펼쳐져 있고, 남북으로 뱃길이 트여있다. 


한반도 뿐만 아니라 오도열도, 대마도와 매우 가깝고, 홍콩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라 근대 열강국들이 호시탐탐 노렸던 섬이다. 실제로 영국이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약 3년간 이곳을 불법 점거한 사건은, 거문도가 지정학적, 군사학적으로 매우 긴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군이 떠난 직후에 고종황제가 거문도에 거문진을 설치하고 수군 주둔을 위한 관청을 세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 거문도의 전경 


일제가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부터다. 일제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기 무섭게 1904년 서도의 수월산에 일본인에 의해 등대가 설치되었고, 일본해군이 주둔하면서 해저통신시설을 갖추어졌다. 그리고 1905년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일제 민간인이 본격적으로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906년 일본인 우편전신소가, 1910년에는 순사주재소가, 1914년에는 일본인 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특히 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일본인의 거문도 이주가 얼마나 활발했는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918년 일본인 어업조합 설립, 1923년 거문항 세관출장소 건립에 이어 1920년대부터는 세 섬 중 고도에 아예 일본인 집단촌이 대거 형성되면서 그들의 신사까지 세워졌다. 거문도는 해방직전까지 일제의 주요 군사요충지로서, 그리고 어업전진기지로서 철저하게 기능했다. 고도 선착장에 내려 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일본식 근대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일본식 주택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고도의 모습

         

               ▲ 상단 왼쪽부터 1. 거문도 등대 2. 일제 신사터 3-4. 영국군 묘소 


고도민박은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층은 부부가 사는 살림집으로, 2층은 민박용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2층의 경우, 일제시기에 지어진 건축형태와 구조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은 1925년에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식 근대주택이다. 집주인의 아버지 생전 말씀에 의하면,  이 집은 어업 무역상으로 활약하던 일본 여성 나가기치에 의해 지어졌다. 집에 쓰인 모든 목재는 일본에서 공수해 온 것으로, 일체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결구방식을 통해 세워졌다. 그녀의 부친은 일제의 고위급 장성이었으며, 그녀의 어업무역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후문에 따르면, 그 여성의 집안은 거문도, 여수, 목포, 부산 등을 오가며 어업 중개무역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여 한 때 전라남도 10대 갑부에 손꼽히기도 했다. 현재 집주인의 조부가 당시 그 무역상의 서기로 활동하면서 어업중개 무역을 익혀 나아갔고, 해방이 되고 나서 자연스레 이 집을 인수받았다. 건물 면적은 총 88평으로, 일제강점기 상류층 일본인 가옥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거문도 고도민박 외관의 모습(현재)


              ▲ 거문도 고도민박 과거의 모습(1960년대 추정):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는 집이 오늘날의 고도민박이다. 



가파른 박달나무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면 마치 일본 본토의 전통가옥에 방문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운데 큰 방 2개를 중심으로 하여 총 11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간 곳곳에 일본문화의 건축양식과 소품들이 비치되어 있다. 모든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다. 




              ▲ 거문도 고도민박 내부 전경


거실 전면에 도코노마가 갖추어져 있다. 도코노마는 집안의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벽 쪽으로 공간이 움푹 들어가 있고, 바닥이 조금 높게 솟아있다. 도코노마 한 가운데에는 향나무 기둥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면 갖가지 동물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단과 불단을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진귀한 족자나 병풍, 도자, 다기와 같은 소품들을 비치해두는데, 이 집이 경우 집주인의 모친이 사용하던 반닫이와 일본식 망와와 화로를 장식용품으로 갖추어 두었다. 


일본식 특유의 천정 밑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문양장식이 보인다. 나무결 마디마디 사이가 매우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식기능을 하면서도 방과 방 사이의 통풍을 원활히 해 주는 기능을 한다. 이 문양 장식의 수와 종류, 정교함의 수준이 높을 수록 그 집의 위상을 높이 알아주는데, 이 집 안에 벽장과 천정 주변으로 수많은 목재 문양장식이 있는 것을 미루어볼 때 과거 중개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한 여성 무역상의 기운이 느껴진다. 


미닫이 형식의 문도 볼거리 중 하나다. 쇼지, 후스마와 같은 장지문, 그리고 일본식 유리 장식문이 방 곳곳에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각 공간의 기능이 나뉘고, 문을 열면 집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통하는 일본인 특유의 공간분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 오시이레 즉, 붙박이 벽장이 보인다. 지진이 잦은 일본 본토의 특성상 가구보다는 물건의 흔들림을 최소화할 수 있는 붙박이 벽장을 선호한 그들의 생활양식이 담겨있다. 



              ▲ 거문도 고도민박 내부 전경(천정, 천정장식, 붙박이 벽장, 화로, 망와, 후스마 등) 


이 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주 집단촌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수탈사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 곳으로, 일제강점사의 산 교과서와 다름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은 실제 사람들이 이 곳에 묵어가며 직접 일제역사의 산실을 체험하고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박제된 문화재'로서가 아닌 이 집이 갖고 있는 일본문화를 방문객이 직접 만져보고 느껴볼 수 있는 장인 것이다. 





집주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중 가장 가슴에 남았던 것은 이 집의 역사적 가치라든지 건축적 특징에 관한 것보다도, 그가 어렸을 적 이 집에서 겪었던 아주 소소하고도 소중한 추억거리였다. 이야기 끝물에 넌지시 물어봤다. "어렸을 적에 이 집에서 살던 생각은 안 나세요?".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청소기를 가만히 내려놓으시고는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신다. 그리고는 조용히 웃으시면서 말을 이어간다. 


"아...예전에 국민학교다닐 때 말야. 학교 끝나면 내가 2층에서 그렇게 숨바꼭질을 했단 말야. 친구들 데려 와서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노는 거야.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 여기저기 방문이 많잖아. 저기 숨었따가 문을 살짝 열고 또 다른 데로 얼른 도망가서 숨고 말야. 아...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만 몇 번을 반복하신다. 절로 흥이 나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설명을 해주신다. '이 불편한 거 왜 안 바꾸고 사냐' 이래저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민박 손님들도 제법 많다고 한다. 아예 집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손님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물론이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2층만은 고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말씀하신다. 1층은 살림집으로 바꿔놓고, 유독 2층의 모습만은 끝까지 지키고, 매일같이 쓸고 닦는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손님들의 '특별한 민박체험', 그것보다는 할아버지의 '특별한 숨바꼭질의 추억과 애정'이 담겨 있는 곳이니까.  



[숙박 및 교통정보는 거문도 고도민박 홈페이지 http://www.godoinn.com/ 참조] 


Written by 선장

Photo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하철을 타다] '사'가 '공'을 이기다. 

4호선 당고개행 열차에 중년 남자 넷에 여자 한 분이 지하철에 들어섰다. 족히 50대가 넘어보이는 분들로, 동창모임인지 굉장히 시끌법적하다. 노약자석칸을 모두 점령했다. 껄껄대며 뭐라뭐라 고래고래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10대 무개념 청소년 무리처럼 장난식으로 욕을 주고받더니 급기야는 남자 대 남자 시비로 이어진다. 지하철에 스피커를 달아놓은냥 쩌렁쩌렁 울린다. 여자까지 나서서 말리지만 어림도 없다. 불쾌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고 옆칸으로 옮겨간다.


멱살을 잡고 싸우기 직전, 한 사람이 제대로 약점 잡혔다. 공격자가 친구 체육교사라는 점을 이용, 대중에게 '이놈이 체육교산데 이렇고 있다'며 대외적으로 욕을 한다. 체육교사 친구가 그때서야 흠칫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이를 부득부득갈지만 몸짓은 좀전같지 않다. 교사는 상대 친구에 대해 사회적 지위로 공격할 건덕지가 없는지 딱히 그에 맞는 대응은 못하고 "으이구, 띠띠자식 너!!!"만 반복비트로 돌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혹여나 자신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담고 있는지 예의주시한다.

상대는 '너 이 놈 잘 걸렸다' 쾌재를 부르며 "여러분! 이 체육 교사라는 인간이 자기보고 양아치니까 덤벼보랍니다. 덤벼! 한판뜨자 여기서! 이 띠띠띠야!!! 예라이 이 띠띠띠야! 하하나원참!" 반복비트를 돌린다. 이제는 여유롭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치려면 쳐보라는 식의 느긋한 제스처를 취해보이며 싱긋 웃기까지 한다.

친구들이 뜯어 말리고 말려 결국 약 올리는 친구를 질질끌고 먼저 하차한다. 교사는 못내 찝찝한 듯 내리지는 못하고 결국 노약자석에 다시 주저앉아 씩씩댄다. 몇 분 가지 않아 서서히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실례가 많았습니다!" 큰 목소리로 90도로 허리숙여 사죄의 인사를 한다. 이쪽 저쪽에서 "그러게 죄송할 짓을 왜 해요!", "나이 먹고 왜 저래 쯧쯧...", "아 그냥 내려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어른들 세계의 최대 공격 포인트는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의 공적, 사회적 지위를 대중에 노출시켜 전의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소식이라면 나누어 갖는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유효한 전략이다. 단순한 싸움 하나가 일단 SNS에 번지면 입소문으로 이야기에 살이 붙고 붙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설화가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의 신변과 가족의 안위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공인인 그는 그게 가장 두려웠던 것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다] '공'이 '사'를 이기다. 

안국역 지하철에서 인사동 방향으로 나가는 출구길목에 무려 네 명의 거지가 앉아있다. 가장 안쪽의 거지는 할아버지다. 선비처럼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렸다. 낡은 베낭과 몇 개의 비닐봉지, 여정에 필요한 지팡이도 있다. 통조림 철통 하나를 덩그러니 던져두고 느긋하게 깍지를 끼고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구걸보다는 노숙에 비중을 뒀다. 


두 번째 거지는 50대가 좀 넘어보이는 중년 남자다. 옷으로 온 바닥을 휘젓고 다녔는지 지하철 바닥과 옷 색깔이 비슷해졌다. 사람이라기보다 조형물 같다. 모자를 벗어 사람들에게 "도와주세요~도와주세요~"를 계속 외친다. 그러나 구호소리가 절실해 보이진 않는다. 대충대충 한다. 쓸쓸하게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간다. 


세 번째 거지는 할머니다. 상대적으로 바깥에 앉아있어 추울 법도 하다. 두터운 외투에 모자를 꾹 눌러 쓴 채 잠이 들었다. 작고 하얀 그릇 하나만 갖고 나왔다. 동전 500원짜리 한 개, 백 원 짜리 한 개만 덩그러니 들어있다. 


마지막 거지는 비교적 젊어보이는 중년 남자다. 공장에서 입을 법한 엔지니어 작업복을 입고 있다. 원래 직업이 그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주워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엄동설한의 바깥쪽 계단에 착 엎드려서는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하늘로 치켜 올렸다. 그러나 그의 손에 올려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칼바람이 쌩쌩분다. 언제까지 저 자세로 견딜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들 모두 12월 대목을 알고 있고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삼청동을 오가는 사람들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한 길목에 네 명은 너무 많다. 이래서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어렵다. '고객'은 누굴 선택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각기 다른 포즈와 다른 옷을 입고 있어도 대중의 입장에서는 변별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랑자건 노숙자건 거지건 사기꾼이건 알길이 없다. 육해공 군인이 휴가 때 모두 군복에 칼 다리미질로 말끔히 다려입고 나와도 대중의 눈에는 그냥 '군인' 두 글자로 통하는 것과 같다.  


결국 사람들은 맨 끝자락에 서서 종을 흔들고 있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공인구호기관의 구세군 함에 지폐를 넣는다. 지금은 불경기다. 두 번 돈을 넣지 않는다. 경쟁이 아니라 공멸이다. 


Written by 선장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11.30 01:29



  몇 시쯤 되었을까.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파도소리가 멀리서부터 밀려온다. 누구의 명령으로 육지에 내렸던 말인가. 당장 눈앞에는 먼지자국이 가득히 쌓인 허름한 벽과 바람 치는 소리에 덜컹대는 나무 창틀이 들어온다.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고 있다. 도무지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뒷골이 뻑적지근하다. 귀도 먹먹하다. 해머로 뒤통수를 실컷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아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실신하듯 잠든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머리를 드는 순간 포기한다. 아직 두통기가 뇌를 지배하고 있다. 


“그냥 누워 있어요.”


문을 열고 레나스가 들어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려진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곳에서 제법 큰 검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 놈이 의사인지 저승사자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이내 손과 발에 뜨거운 수건을 감아준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지?”

“이틀, 아니 오늘로 3일째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왜...이렇게...?”

“선장이 직접 느껴지지 않아요? 두통입니다. 선장의 가장 큰 적이죠.”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요. 요리사는 과일 씻고 있고, 사샤는 마을에 이것저것 사러 내려갔어요. 이번 전투에서 얻은 수확이 많지 않아요. 다들 사기가 떨어져 있어요. 더구나 선장까지...”

“여기는...?”

“세빌리아 인근 마을이에요. 기억 안 나죠?”

“글쎄...알제리항에서 나와서...이스탄불 함대 1척과 붙었고, 배의 전리품을 확인하는 중이었는데...거기까지야.”

“거기부터 선장의 두통이 심해졌죠. 늘 달고 다니는 두통이라고 해도 이렇게 심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나중엔 헛소리도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긴급 상륙을 명령했어요. 당분간 선장은 쉬어야 돼요. 가짜로 쉬는 거 말고.”

“가짜든 진짜든 쉴 틈이 어디 있나.”

“그 생각에서부터 두통을 차곡차곡 쌓아온 거에요. 뇌가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고서 한 방에 보낸 거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겁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다들 기분이 좋지 않겠군.”

“기분들이야 각자 알아서 챙길 거에요. 그런 건 의사인 나로서도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 지금은 신경 꺼요. 선장이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 약초를 달였어요. 이 물부터 마셔요.”


  물이 뜨겁고, 쓰다. 마신지 10분 정도 지나니 차가웠던 손과 발에 점점 열기가 돈다. 꽉 막혔던 뒷머리와 위장이 서서히 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파른 숨이 점점 고르게 흐른다. 두통에 못 이겨 채 뜨지 못했던 왼쪽 눈꺼풀이 서서히 문을 연다. 살 것 같다. 


“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어떤 때요?”

“고통에서 회복할 때, 몸에서 열이 풀리고, 손끝과 발끝에 촉감이 뱅글뱅글 돌 때가 가장 몸의 오감이 잘 느껴져.”

“두통의 맛을 제대로 보여줄까요?”

“너도 사샤 닮아가는 거냐? 아무튼...괜한 지병에 모두에게 피해만 줬군.”

“선장의 그 피해의식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겁니다.”

“피해의식?”

“두통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난 지병이니 유전이라고 할 밖에.”

“두통이 났다는 건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두통은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증상입니다.”

“성실한 나를 칭찬해줘야겠군.”

“그런 뜻이 아니구요. 두통을 겪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정리정돈과 편식입니다.”

“내가 평소에 음식을 가려서 먹었나?”

“내가 말한 편식은 음식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 편식, 기호 편식, 술 편식, 등등.”

“그래서?”

“선장 같은 사람들은 순결주의자란 말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꾸리는 데서 잘 나타나죠.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선장은 더러운 것, 특히 본인이 생각하는 개 같은 인간들을 보았을 때 1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정리하거나 제거하지 못했을 때 2차 충격의 잔해가 남죠.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범위에 선장의 행동이 겹쳤다고 판단했을 때 가장 큰 3차의 충격으로 이어지죠. 3차 충격에 휩싸이고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응어리로 남으면 바로 이런 두통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구요. 제가 지켜 본 관찰결과입니다.”

“순결주의자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

“너무 그렇게 순결, 고결을 고집하지 말아요. 물론 그 생각이 저를 배에 타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늘 유지하고 살면 본인의 삶이 힘들어져요. 너무 무언가를 정리하려고도, 그렇다고 너무 사람을 가리고 챙길 필요도 없어요. 기본에만 충실하면 그 뿐입니다. 기본을 완전으로 가져가려고 하지 마시구요. 완전이라는 것은 단어 상에만 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구요.”

“이젠 심리테스트도 하는군.”

“선장이 생각한 완전의 범주에서 놓쳤다고 판단되는 것들, 놓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것들, 다 주우고 정돈하려 하지 마세요. 여기 선장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눠 갖고, 같이 가는 거에요.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거라구요. 면도도 당분간 하지 말아요. 사샤처럼 턱수염도 더부룩하게 내버려둬야 얼굴도 숨을 쉽니다.”


  잠시 떠든 사이, 창가에 해가 걸렸다. 따스한 햇볓이 내려앉으니 한결 낫다. 요리사가 오더니 레모네이드를 건네주고 간다. 레나스가 몸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컵을 입에 물려준다. 새콤한 물이 들어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샤가 왔나보다. 마을에서 무슨 요리를 봤는데 그걸 해달라고 요리사에게 계속 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알아서 조르고,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들 잘 하고 있다. 나는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 되겠다. 조만간 레나스에게 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시 이불을 깊게 감고, 눈을 덮는다. 


Written/Photo by 선장

Photo: 인천역 카페 팟알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금방 입동이 지났다. 지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긴 날도 아니지만 겨울이라고 달력에서 먼저 알려준다. 동결. 겨울은 확실히 모든 것이 멈춘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학교도 얼어가는 물 마냥 조심스럽게 흐른다. 회사도 한해 마무리라며 의기투합보단 훈훈한 기운이 돈다.


가을 내 화려하게 수놓았던 나무들의 가지에는 앙상함만 가득해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하얀 눈꽃이 필 나무가 불쌍하기까지는 않다. 세탁소 들러 여름 내 맡겨 두었던  외투들 찾아오며 다시 느낀다. ‘겨울이 왔구나’하고.

입에서 피어나는 하얀 입김 호호 불며 겨울을 입감한다. 하얀 눈 올 때면 알 수 없는 설렘에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다. 기대감도 가득하다. 새 학기 준비하며 새 공책, 새 연필, 새해. 설렘 가득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운 게 겨울이다.

한해 마무리한다는 나름 자기합리화적인 변명으로 수만은 술자리에 참여한다.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로 속은 속대로 아파 ‘아, 내년에는 술 좀 줄여야지’라는 부질없는 다짐도 해본다. 속은 아프지만 그래도 빠질 수 없다. 나름 중요한 연내 행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길가의 허름한 포장마차 오뎅 국물이면 따뜻하다. 옷깃 사이로 스멀스멀 넘어오는 겨울바람도 두툼한 목도리 하나면 따뜻하다. 누군가의 체온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따뜻하다는 건 겨울만이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겨울이 꼭 추운 것만은 아니다.


겨울은 살아온 날, 지나온 날의 추억이다. 지나온 날 들에 대해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고 다짐하고 기대하고. 웃기도 울기도, 힘들던 기억도 한 번에 쏟아 나온다. 무언가 아쉽고, 누군가 그립고… 새 것의 설레임과 지나간 날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공존했다. 매번 나의 겨울은 그래왔다.


올해 겨울도 그리 큰 변화 없이 왔다. 거리 포장마차의 오뎅도 다시 김을 모락모락 내기 시작했고 서랍 속 목도리 꺼내 나름 겨울준비도 했다. 단지, 달라진 거라면 나이가 나이인지라 술자리만큼 늘어난 결혼식에 다니는 것뿐이다. 그렇게 또 내 앞에 찾아왔다.


written by 선의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하철 현장 르포 1. '공'과 '사'의 구분  (0) 2012.12.03
두통의 원인  (0) 2012.11.30
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  (0) 2012.11.11
대한민국 진상보고서  (0) 2012.11.10
스마트폰, '매의 눈'을 앗아가다  (0) 2012.10.26
사람이 집이다  (0) 2012.10.19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 대표적 진상인 정여사. 개까지 끌고와 진짜 진상을 부린다.



진상(眞想) : 사물이나 현상의 거짓 없는 모습이나 내용.

진상(進上) :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고관 따위에게 바침.

 

진상하면 무엇이 가장 떠오르나?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의 진상? “이 음식은 임금에게 진상을 올릴 것이다의 진상? 난 개인적으로 오늘 완전 개 진상 손님 왔었어의 진상이 생각난다. 뭐 위의 두 진상도 맞지만 역시 술자리 씹을 만한 안주로는 후자의 진상이 딱 아니겠나?


우리나라의 진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보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유독 우리나라의 진상은 서비스업에 많이 발생한다.

나는 대학시절 졸업을 할 때까지 커피숍에서 알바를 했는데 유독 이곳은 아줌마 진상들이 많았다. 뭐 아줌마를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아줌마 진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줌마들의 진상짓의 가장 비슷한 점은 우기기다.

알바생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진상은 알바생에게 이건 이런데 왜이래요? 바꿔주세요.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그럼 알바생은 고작 시간당 몇 천원 벌자고 그 바닥에 바짝 엎드려 손님 죄송한데 이렇게는 안됩니다며 굽신굽신 한다.


생각해보면 자기네 아들딸과 비슷하거나 어릴지도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진상 없는 진상을 다 피운다. 그러면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알바생에게 사장 어딨어? 사장 오라고 해라며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그럼 알바생에게 드는 생각은 단 하나다. ‘좆같아서 못해먹겠네그래도 등록금은 못해도 용돈 벌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에 참고 또 참는다.

보면서 어른들은 말한다. “다 그러면서 사회도 배우며 어른도 되는 거야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작 자기 자식들 손끝에는 물 한 방울 안 묻게 키우며 남의 자식 노예 다루 듯 그건 아니지 않나? 정치인 마냥 지 자식 군대안간 건 생각도 않고 남의 자식 군대 안간 것만 따지고 드는 꼴처럼.


최근에 있던 일이다. 친구 녀석이 시내에 술집을 하나 냈다. 엄청 크지도 휘황찬란하지도 않지만 친구 녀석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술집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해 잠시 일손을 빌려 준적이 있는데 술집인 만큼 온갖 진상도 많았다.

한번은 안주로 나갔던 찌개냄비가 다시 조리실로 들어왔다. “손님이 국물 좀 리필해달라고 하셔서요다시 조리실에 들어온 냄비만 보면 다 먹고 설거지 통으로 갔어야 했다. 건더기 고작 두부 조각 몇 개, 뻘건 찌개 국물은 없어 바닥 드러낸 냄비는 고운 노란색을 띄었다. 쉽게, 다 먹은 상태다.


, 여기서 리필의 개념의 살펴봐야 하는 건가? “국물이 조금 짠 것 같아요. 육수를 좀 더 주실 수 있으세요?”아니면 다 졸아 말라붙은 건더기 살리려 국물이 다 졸아서 육수를 조금만 더 주세요.” 이게 리필이다. 지금 경우는 닭 집 가 뼈 내밀며 살 좀 더 주세요랑 뭐가 다른가? 대한민국 인심 다 죽었다며 정 타령할지 모르겠지만 다 먹은 냄비를 내밀며 리필이라는 단어 걸치면 매너인줄 알았나보다.


이건 수만은 진상짓 중 지극히 얌전한 예였다. 다 먹어 놓고 비싸다며 주정부리며 어르신. 쓸데없는 질문으로 알바 잡아 놓고 온갖 비아냥은 다 퍼 붙는 사람. 이래라 저래라 종 다루듯 반말 찍찍 내뱉는 사람. 말하자면 사흘 밤낮을 지새도 모자랄 거다. 대한민국에서 먹고 사는 거 힘든 줄 알았지만 더럽고 치사하기까지 하니 느는 건 담배요 한숨뿐이다.


written by 선의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통의 원인  (0) 2012.11.30
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  (0) 2012.11.11
대한민국 진상보고서  (0) 2012.11.10
스마트폰, '매의 눈'을 앗아가다  (0) 2012.10.26
사람이 집이다  (0) 2012.10.19
엄마, 딸, 손녀 그리고 헌 신  (0) 2012.10.15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친구 중에 진짜 특이한 놈이 있다. 각종 동물을 다 따라하는 이상한 재주를 가진 인간이다. 우, 마, 견의 소리는 물론이요, "꺄악꺄악" 까마귀 소리에 "꿔기어~~"하고 닭 울음소리까지 섭렵했다. 어느 수준이냐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흉내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정말 그 동물이 자기 주변에 있는지 이리저리 살필 정도다. 더 대단한 점은 동물의 소리 뿐만 아니라 몸짓, 동작 하나하나까지 정말 똑 닮게 한다는 사실이다. 어슬렁 어슬렁 먹이를 겨냥해가는 표범의 걸음걸이 흉내를 낼 때는 정말 '저 인간 모글리 아냐?' 할 정도로 등골이 오싹하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카피하는 동물이 있다. '동물의 왕국'을 틀면 빠지지 않고 꼭 나오는 단골손님, 바로 미어캣이다. 늘 몇몇의 보초병들이 땅굴 앞에 나와 두 발로 꼿꼿이 버티고 두 손은 꼭 모은채 사방의 동태를 살피는 그 족속들말이다. 이 놈들 몸짓의 포인트는 발, 손, 고개다. 늘 적이 오나 안오나 살피기 때문에 시력과 시야 모두 매우 뛰어난 녀석들이다. 내 친구놈은 그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가끔 내가 심심할 때 "그 미어캣 흉내 좀 내봐!" 하면 갑자기 까치발로 바짝 서서 두 손을 딱붙여 꺾고서는 잽싸르게 고개를 휙휙 돌려대는데,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와...미친놈이다 이놈은!!!'하는 생각밖에 안든다. 그냥 빵 터져 버린다. 적지 않은 시간을 지켜본 나로서 판단컨대, 이건 연습으로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이 면밀하고 정확한 관찰력에서 나오는 행동은 지극히 본능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놈이 갖고 있는, 아니 본래 인류 전체가 갖고 있었을지 몰랐을 그 매서운 '눈'의 원초적 본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한 때 나도 '매의 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와 무리지어 버스를 기다릴 때면 그들은 버스가 오고 있는지의 여부를 꼭 나에게 물었다. 내가 가장 시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양쪽 시력 모두 1.5. 컨디션이 좋을 때는 2.0을 찍을 때도 있었다. 좀 과장을 덧붙이자면, 10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오는 버스의 번호도 알아맞출 수 있을 정도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늘 부러워했다. 특히 안경만 벗으면 장님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아이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내가 스스로 대견스러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거리를 걸을 때나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볼 때 항상 멀리 떨어진 산의 능선이라든지 높은 빌딩 위에 달린 안테나라든지 그런 것들을 주로 보곤 했다. 보니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 번호가 흐릿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스마트폰에는 참 친절한 기능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교통수단의 현재 위치를 확인해주는 앱이다. 내가 굳이 햇볕을 손으로 가려 가며 멀리서 오는 버스의 번호를 확인하지 않아도, 바로 앞의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앱에서 알아서 그 위치를 알려준다. 그저 폰만 쳐다보고 있으면 정확히 몇 분 후에 내가 타고자 하는 버스가 도착할지를 알 수 있다. 몸이 고생할 이유가 하나 더 줄어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스마트폰을 씀으로써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죄 지은 것 마냥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닌다. 굳이 그 죄명을 대라면 스마트폰 중독죄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최근 애니팡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 나아가면서 대다수의 국민이 '고개숙인 남자', '고개숙인 여자'가 되었다.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자가용을 타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목을 90도로 꺾고 눈에 힘 빡 주고 연신 폰만 들여다보고 눌러대고 흔들어대고 있다. 그게 어떠한 이유에서건, 우리는 내 코 앞에 닥친 가상의 공간에 더욱 더 몰두함으로써 실체의 주변을 살펴보게 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시력의 쇠퇴 뿐만 아니라 시야까지 매우 근시안적으로 좁혀지게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획기적인 발상으로 인해 우리는 손바닥 안에서 세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그를 칭송한다. 인간이 일일이 손발을 쓰고 눈으로 찾아다니며 해야 할 대부분의 일을 전화통 하나가 아웃소싱으로 한데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웃소싱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수록 우리의 오감이 담당해야 할 몫은 점점 좁아지고 줄어든다. 인간 테크놀로지의 진화로 인해 인간 스스로의 퇴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생각해본 적 있는가? 


당신이 직접 넘기고 갈피를 끼워가며 감각적으로 특별한 대목을 기억해 내던 묵직한 책이 가상 공간으로 쏙 들어갔다. 당신의 몸에서 움직일 것은 이제 손가락 하나 뿐이다. 동네 주민들에게 묻고 물어 이쪽 저쪽 사방을 살피며 찾아가던 그 옛길도 이제 폰 하나만 들고 있으면 굳이 묻거나 두리번 거릴 필요조차 없다. 은행도 갈 필요없다. 폰에 은행이 있는데 발이 뭐하러 고생하겠는가. 우리는 그저 폰이라는 사이버 플레이스가 만들어주는 편의의 지침서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 뿐이다. 흘러간다. 그리고 인류의 오감은 점점 무뎌진다. 


사과의 한 광고를 본적이 있다. 화면에 쓱싹쓱싹 손가락으로 몇번 끄적대면 멋진 풍경그림이 나오는 그 광고 말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다 안다. 책을 솔솔 넘겨 보는 맛이 있듯 그림을 쓱싹쓱싹 그리는 맛이 있다. 4B연필, 색연필, 물감, 파스텔, 목탄을 집어들고 매서운 눈에 감을 잡아가는 나만의 몸집을 더하고, 거기에 더불어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귀까지 동원하여 이리저리 손을 놀려대면 그 뭉쳐진 촉이 손가락을 타고 종이와 캔버스에 서서히 번져 하나의 꿈틀대는 작품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 특유의 맛 말이다. 그 맛을 사과와 세개의 별이 어느 순간부터 앗아갔다. 멀리 보이는 저 가을의 단풍산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펜을 갈기고 그림을 그려대던 나의 '매의 눈'을 그들이 앗아가 버렸다. 


오직 육체의 철저한 사용에 의해서만 비롯되던 정신적 특혜들이 기계 하나로 인해 하나둘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다람쥐가 이빨을 날카롭게 갈 듯, 인간도 몸을 쓰지 않으면 닳게 되어 있다. 조그마한 기계 하나가 육체를 장악하기 시작한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아니 당장 5년 후가 궁금하다. 매우 두렵기도 하다.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통의 원인  (0) 2012.11.30
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  (0) 2012.11.11
대한민국 진상보고서  (0) 2012.11.10
스마트폰, '매의 눈'을 앗아가다  (0) 2012.10.26
사람이 집이다  (0) 2012.10.19
엄마, 딸, 손녀 그리고 헌 신  (0) 2012.10.15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10.19 03:41


나의 큰집, 큰아빠 큰엄마가 계신 큰집은 대전 석교동에 있다. 마당이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으며 드라마에서나 올 법한 멋진 이층집이었다. 나무 바닥으로 되어있던 넓은 거실은 한 발, 한 발 내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는 했다. 내 방하나 없던 작은 집에 살았던 나에겐 큰집은 나에게 정말 큰집답게 커다란 집이었다. 이런 큰집은 갈 때마다 놀이터였다. 특히 온갖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던 큰집은 나에게 보물창고였다.


자상하셨던 큰엄마는 항상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셨는데 흡사 일본식 가옥처럼 너무 과하진 않았지만 절제가 있었던 그런 품위 있는 정원이었다. 이런 정원의 식물들을 신기해하며 바라보기도, 마당의 강아지와도 함께 뛰놀았다.


거실에서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날 설레게 했다. 물론 이층엔 세를 주어 다른 세대가 살아 끝까지 올라가보진 못했다. 그래서 더 궁금해 했던 거 같다.


넓은 거실에 장식되어 있던 수석들은 항상 빛이 났다. 그중 동물모양을 닮았었던 수석들은 나의 장난감이 되었고, 거실은 세렝게티가 됐다. 출판사에 근무하시던 큰아빠 덕에 집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이런 책을 몇 개 들고 나와 윤이 반질반질 나는 나무거실에 앉아 읽으면 거실은 오래된 도서관이 됐다. 조금은 낡았을 지도 모를 집이었지만 워낙 꼼꼼하셨던 큰엄마는 이 집을 품위 있는 보물창고로 만들어 놓으셨다. 멋진 고성 같이.

 

콩알만 한 키에서 대한민국 남자 평균키를 넘겼을 때 큰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남겨진 집은 사촌형과 큰아버지께서 계속 사셨다. 그 집에서 바뀐 건 큰어머니가 안 계신 것뿐이었다.


내가 호기어린 20대를 넘어 능글맞은 30대가 되었을 때 나의 고성 같고 보물창고였던 큰집은 고성은커녕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되어갔다.


품위 있던 정원의 풀과 나무들은 모두 말라 죽어 얼마 전에 모두 잘라냈다. 하얀 흙만을 드러낸 채 정원은 사막이 되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온갖 집안의 안 쓰는 물건으로 채워져 한 계단 오르기도 힘들었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던 나무 거실은 윤기를 잃어 낡은 나무 판때기를 깔아 놓은 거 같았다.


거실의 수석들은 빛을 잃어 수석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울 정도로 돌덩이가 되어버렸고 처치 곤란으로 남았다. 집은 흡사 폐허 같았다.


큰집에서 바뀐 것이라곤 큰어머니가 안 계신 것뿐이었다. 그렇게 집을 아끼고 가꾸셨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도 죽었다. 집의 주인은 있지만 집의 실질적 주인은 큰어머니였던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께 전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어차피 돌려줄 돈인데 전세는 왜 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집을 혼자 그냥두면 죽기 때문에 사람을 들이는 것이란다.”라고 하셨다. 물론 어린 나는 이해 못할 말이었다. 집이 죽는 다는 것이.


사람이 곧 집이고 집이 곧 사람이었다. 사람도 혼자 못살 듯이 집도 혼자 살 수 없었다. 큰어머니 애정과 사랑을 잃은 큰집은 지금도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Written by 선의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통의 원인  (0) 2012.11.30
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  (0) 2012.11.11
대한민국 진상보고서  (0) 2012.11.10
스마트폰, '매의 눈'을 앗아가다  (0) 2012.10.26
사람이 집이다  (0) 2012.10.19
엄마, 딸, 손녀 그리고 헌 신  (0) 2012.10.15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학로 혜화로터리를 건너 한성대 입구 사거리에 접어들어 좌회전을 받으면 곧장 성북동 길로 이어진다. 사거리 주변에는 과일장수, 과자장수, 떡장수, 김밥장수 누구 할 거 없이 이런저런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님들과 흥정을 벌인다. 성북동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오면 오래된 철물점, 문방구, 사진관, 쌀집, 추어탕집이 보이고 그 뒤로 빽빽하게 살림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쪽저쪽에 고등학교, 중학교도 보인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정도로 7080년대의 냄새가 폴폴나는 그런 동네라고나 할까. 암튼 와보면 '아 여기가 성북동이구나'라는 필이 딱 느껴진다. 


  중간 쯤 올라오면 큰 길가에 조그마한 구멍가게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매우 올드한 국수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 횡단보도을 건너 세탁소와 의류점 사이로 난 골목길로 올라오면 아담한 한옥집 한 채가 보인다. 주민들은 이곳을 최 선생님 댁이라고 부른다. 집 대문에는 '최순우 옛집'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있다. 제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한국미의 실천자 혜곡 최순우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시민들의 따듯한 성원과 모금으로 '시민문화유산 1호'로 되살아난 집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우리 90-00세대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니 하나 더 붙이겠다. 간혹 교과서와 문제집의 지문으로 나오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라고 하면 '아 그 사람!'하고 무릎 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문을 열고 뜰에 들어서면 선생이 생전에 심어 둔 감나무, 밤나무, 모과나무, 소나무, 산수유 나무가 알맞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곳곳에는 청죽, 벌개미취, 옥잠화, 바위취와 같은 한국의 야생화가 소담스레 피어있다. 선생이 머물던 사랑방에는 도톰한 보랏빛 보료와 조그마한 서안이 있고, 간결하게 짜여진 사방탁자가 놓여 있다. 서안 위에 놓여진 낡은 원고지가 바람에 펄럭인다, 김환기 선생과 박수근 선생의 그림도 보인다. 선생의 친필이 담긴 사랑방 현판에는 '두문즉시심산'이라 적혀있다. '문을 닫으니 이곳이 곧 산속과 같다'라는 뜻이다. 뒤뜰에 펼쳐진 고동빛깔 툇마루에 앉아 수국차를 마시며 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면 도심 속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어느덧 잊게 되는 묘한 감정이 싹튼다. 


  언제였던가. 최순우 옛집에 엄마, 딸, 손녀 셋이 놀러왔다. 하얗게 머리가 센 엄마를 부축하고 딸이 모셔온 모양이다. 대여섯살 되어보이는 손녀아이는 벌써 깡총깡총 온 집을 뛰어다니고 있다. 엄마와 딸이 쑥차를 시켜놓고 툇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손녀아이가 무얼 발견했나보다. 막 뛰어가서는 "엄마 이게 뭐야?"를 연신 외쳐댄다. 손녀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건 검정 고무신이었다. 딸이 이야기해준다. 


"요건 옛날 사람들이 신었던 고무신이라는 거야, 고무로 만든 신발!"

"엄마 나 이거 사줘!!!"

"이걸 사서 뭐하게~ 다시 제자리에 갖다두세요~~"

"엄마 나 이거 사줘!!!"

"이거 이제 안 팔아. 못사요. 갖다두세요~~"

딸과 손녀아이가 몇 차례 실갱이를 벌이고 있으니, 엄마도 한 술 거든다. 

"야, 이거 아직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부다. 남대문 시장 이런데 가면 아직두 이런거 팔기는 팔텐데..."

"엄마 근데 나도 보기만 했지 그러고 보니까 신어본 적이 없네?"

"야, 내가 너 어렸을 적에 니 딸 마냥 새신발새신발 노래를 불러서 맨날 시장만 가면 신발만 사고 아주 된통 혼났다"

"나두 그랬나? ㅋㅋㅋㅋㅋ"

"난 아주 고무신만 보면 울화가 치민다 야"

"왜 엄마?"

"느의 할아버지 있지? 그 양반이 어디 여자 사람취급이나 해줬냐? 오빠들은 서울가서 공부해야 된다고 구두니 운동화니 장만 가시면 사오는 걸 나는 한번도 신어보지도 못했다 야. 맨날 오빠들이 신던거 떨어지고 그러면 그거 주워다 신고 그랬지뭐. 오빠가 하두 그래보이니까 그래도 나중에 나 부득부득 우겨서 고등학교 갈 때 아빠 몰래 구두 한 켤레 사줘서 내가 그냥 신이 나가지구 온 동네방네 다 신고 다니고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그랬어. 어이구, 난 고무신하면 치가 떨린다."


  가만히 보니 할머니가 지금 신고계신 구두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다. 럭셔리한 게 딱 누가봐도 '와우! 명품이네!' 써 있다. 그러고보니 그 딸도, 그 딸의 딸도 죄다 신발이 고급스러워 보인다.  


"넌 아주 행운인 줄 알어. 내가 아주 이 신발에 한이 맺혀가지구 내 딸은 그렇게 안키운다 해서 사달라는 대로 사준거지. 그 때 값으로 구두니 운동화니 다 비쌌다구. 누가 이런 걸 함부로 사줘."

"하하, 알았어알았어 엄마. 내일 백화점이나 갑시다."

"그러지 뭐. 아니 근데 얘는 뭐가 좋다구 이걸 가지고 이런다냐?"


  손녀아이는 고무신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지 들었다놨다 신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면서 장난감 갖고 놀듯 삼매경에 빠져있다. 손에서 놓지를 못하니 아이엄마가 마지 못해 사무실로 찾아와 묻는다.


"이거 여기서 팔아요?"

"아뇨, 저희들만 신는 겁니다. 한옥 분위기에 맞게 신발도 고무신으로 맞춘 거에요."

"아, 네 근데 참 한옥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저랑 딸이랑 신고 사진 찍어도 되죠?"

"아 그럼요. 그리고 이거 남대문 시장에서 팔아요. 가시면 아마 따님 사이즈도 있을 거에요"

"아네,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무신 두 켤레를 딸과 손녀아이가 신더니 나에게 사진 좀 찍어달라 부탁을 한다. 고무신이랑 한옥이랑 잘 좀 나오게 찍어달란다. 나름대로 그림이 잘 나오는 자리에 앉혀놓고 찍으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두 사람도 모두 만족한 얼굴이다. 딸이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도 한 번 신고 찍어. 언제 또 신어보겠어?"

"아이구 난 됐다. 니들이나 많이 찍어라. 쟤 좀 이쪽저쪽 가서 많이 찍어줘 예쁘게 꽃이랑 나무랑 같이."


  그렇게 세 모녀는 고무신을 두고 한참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해 질 무렵이 되서야 돌아갔다. 정말 할머니는 끝까지 고무신을 신지 않았다. 딸은 사진만 찍어댔다. 손녀아이는 신고 놀기에 바빴다. 엄마에게 고무신이란 '다시는 보기 싫은 헌 신', 딸에게는 '기념으로 남길 추억거리'. 손녀아이에게는 '꼭 갖고 싶은 신발 장난감'이었다. 그 날 헌 고무신이 세 모녀에게 제대로 헌신했다.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통의 원인  (0) 2012.11.30
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  (0) 2012.11.11
대한민국 진상보고서  (0) 2012.11.10
스마트폰, '매의 눈'을 앗아가다  (0) 2012.10.26
사람이 집이다  (0) 2012.10.19
엄마, 딸, 손녀 그리고 헌 신  (0) 2012.10.15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전버튼 1 2 3 4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