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독도서관 옆 소격동 길을 지나다가 이 그림을 마주쳤을 때, 생전 처음 '그림을 사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12월의 겨울. 추위도 까맣게 잊은 채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림이 그림같지 않았다. 새로운 차원의 신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듯 했다. 내가 무의식 중에 꿈꾸던 진짜 이상향의 안식처에 다다른 듯한 완벽한 환상을 맛보았다. 


온 빛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 온 빛이 산과 바다에 내려 앉았다. 이곳은 물결도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 곳. 모든 것이 멈추었다. 빛과 그림자로 빚어낸 이 담박하고도 신비한 능선을 따라 차근차근 걸어가본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산 중턱에 잠시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바닷 속 세상이 훤히 보인다. 팔깍지를 끼고 그 자리에 누워버린다. 나도 이 그림의 풍경이 된다. 


갤러리 안에 있는 그림이 궁금해졌다.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걸려있는 것은 온통 산 뿐이다. 이영길이라는 화가의 작품이다. 수묵화도 아닌, 그렇다고 채색화도 아닌 수묵채색화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한국화에서는 금기로 여기는 빛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한국화는 선과 여백에서 그림의 여유로움을 찾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사람, 빛에서 그림의 안정감과 한적함을 끌어내고 있다. 재미있는 양반이다. 


한지 위에 일필휘지로 휘두른 먹의 굵직한 선과 농담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빛과 색채를 가득 채웠다. 수채화를 끌어들였지만 결코 거추장스럽다거나 인위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화에서 강조하는 어떤 유교적인 이념이나 정신같은 것은 애시당초 버린 것 같다. 그는 기존의 한국화가 요구하는 계보의 목적성을 내려놓았다. 꺾어내지르는 협곡과 그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 조그맣게 자연 속을 거니는 선비와 동자는 이 사람의 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는 단지 그가 생각하는 내면의 마음을 내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보이는 풍경이 아니다. 마음의 풍경이다. 그는 수묵화와 수채화의 중간계에서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둘 중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 화가의 세계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 결국 두 세계의 혼합 가운데 여러 실험을 거쳐 그는 답을 찾은 듯 싶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한 남자를 감동시키에 충분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빛깔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한방에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 하나로 쾌히 증명했다. 


한참을 감상하고 있으니, 멀찌감치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영길 화가다. 열중해서 보고 있는 모습이 좋았는지 흔쾌히 도록 한권을 선물로 준다. 웃으며 한 마디 던진다. "자주 와요"


나는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매일 이 갤러리 앞에 찾아와 한참 동안 이 그림을 감상했다. 좋은 술에 좋은 안주가 빠질 수 없는 법. 백건우가 연주한 에릭 사티의 Ogive # 1, 2를 연달아 듣는다. 사람, 그림, 음악이 모두 멈췄다. 진짜 내가 보인다.

 


<작품: A world opened with the light...- mountain_130.3x162cmㆍ장지에 채색_이영길_2009>

    - 이영길 개인전 / 2009 12. 23 WED - 12. 30 WED / AKA Space 


Written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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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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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제목이 톰과 제리다. 70년대중반~80년대초반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고 듣고 자란 친숙한 만화 주인공들이다. 2011년, 그들을 다시 캔버스 위에 올려놨다. 이런 그림이 아주 잘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림을 보는 감상자에게 무한한 해석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현대미술의 묘미에 아주 충실한 작품이다. 

 

제리가 테이블 가운데 놓인 그릇 위에 맘편히 걸터 앉아 치즈의 맛에 흠뻑 취해있다. 그 옆에 톰이 보인다. 눈을 부라리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당장이라도 제리를 낚아챌 기세다. 매번 골려주는데 재미붙인 제리와 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톰의 심리상태가 그림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둘을 사이에 두고 검은 액자틀 하나가 놓여져 있다. 문제는 그 검은 액자틀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의 여부다. 어찌보면 뚫려 있는 액자틀 속에 톰이 고요히 잠복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톰을 그린 그림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감상자를 갸우뚱하게 하는 데는 뒤에 놓인 액자들도 한몫한다. 화가는 맨 앞에 놓여진 액자틀만 정면으로 제시한 채 나머지 액자는 측면으로 돌려 그것이 어떤 그림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탁월한 센스다. 

 

나는 아마 모든 액자에 톰이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이 화실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화가의 화실일 것이며 그 화가는 자신의 반려자와 다름없는 고양이 톰을 이번 전시 작품의 모델로 삼아 화실 전체를 꾸며 놓았을 것이다.  


'톰의 화실'에 잠입한 제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양반처럼 앉아 느긋하게 승리의 자세를 취했을 것 같진 않다. '이게 진짜 톰이야 아니야?' 하며 슬금슬금 곁눈질로 톰의 액자들을 신중하게 하나하나 짚어 나가면서 결국 '이건 그림이야!' 결론 내린 후에야 마음을 놓았겠지. 

 

제리의 털이 흰색이란 점도 퍽 흥미롭다. 원래 제리의 털 색깔은 붉갈색이다. 일반적인 쥐에 대비되는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한 듯 보이는데, 실험용 쥐처럼 정말 우둔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특출난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지, 그것을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제리가 모든 치즈를 의기양양하게 먹어치울지, 톰이 액자틀에서 튀어나와 제리를 먹어치울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과연 무엇이 맞는지는 이 그림을 그린 짓궂은 톰의 화가만이 알겠지. 

 

<작품: Tom and Jerry_유민석_2011>

    - 한국미술, 내일을 보다 / 2011 2. 9 WED - 2. 18 FRI / AKA Space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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