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물찾기 - 알라딘 서점편: 서혜경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집


종로에 알라딘 책방이 생겨 종종 들르곤 한다. 헌 물건을 다루어 그런 것이지는 몰라도 교보, 영풍, 반디 이런 윤기 번지르르나는 새책방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책이나 음반을 팔러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그 판 물건을 사려고 기웃대는 사람들로 내내 북적인다. 나 역시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한다. 우글우글 시장통 같다. 사람에 치어 책 한권 제대로 보기 힘들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거의 새책이나 다름없는 찜책을 잡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기대반, 구경삼아 반 나는 어슬렁댄다. 


며칠 전, 듣지도 않는 씨디 팔아버릴 심산으로 알라딘에 들렀더니 꽤 값을 쳐 줬다. 네 장 팔아 만 오천원. 유행지난 대중가요 팔아 이 정도 이문 남겼으면 족한거다. 그리고는 한편으로, '요걸로 괜찮은 클래식 음반 있음 하나 사봐?' 하는 생각에 음반 코너로 갔다.


이것저것 뒤적대던 중, 아놔 이런 대박 발견!!! 피아니스트 서혜경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집 앨범 발견!!! 참고로 나는 다양한 수집벽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누구누구의 라흐마니노프 앨범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사 모아서, 똑같은 곡을 각자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비교해보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다. 중고서점에 서혜경씨의 라흐마니노프 작품의 출현이라니!!!


사실 국내에서 라흐마니노프 피협을 전곡 레코딩한 것은 백건우가 유일무이했다. 그러니까 서혜경은 두 번째의 깃발을 꽂은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다. 라흐마니노프 피협 완주는 피아니스트가 대가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숙명적인 음악의 대협곡이다. 보통 연주자들은 이 곡의 한 악장만 준비하는데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한다. 그만큼 4악장 모두가 기교적으로 매우 난해하고, 해석 자체도 선구자들을 뛰어 넘기에 너무나도 힘에 겹다. 그러나 서혜경은 전곡 레코딩을 단 일주일만에 완주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서혜경의 20대는 화려했다. 세계를 경악시킨 당돌한 피아니스트였다. '동양인은 테크닉으로 승부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건반이 부서질듯 내리꽂는 듯한 파워풀한 연주로 세계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세계적인 피아토 콩쿠르 부조니에서 동양인 최초, 최연소 우승, 뮌헨 콩쿠르 2위, 1988년에는 카네기홀 선정 세계 3대 피아니스트에 선정되었다. 그녀의 연주에 반한 세계적 거장 아이작 스턴은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점심을 같이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도 암이라는 절대절명의 시련이 찾아온다.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의사의 권고, 연주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집안사람들, 서른세번의 방사선 치료와 대수술, 여덟번의 항암치료, 점점 깊어가는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그녀는 건반을 놓치 않았다. 마침내 2008년 1월, 그녀는 병마를 떨쳐내고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과 3번을 완주해낸다. 투병 이후 1년만의 재기였다. 재기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매우 특별했다. 20대 시절 부조니 콩쿠르 우승 이후 3년 간의 슬럼프를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했을 때에도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서혜경과 피아노,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지독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제 열정이라는 숨결에 인생이라는 깊이가 더해졌다. 그리고 한 열성 팬에 의해 100만불의 보험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런 앨범을 이렇게 내놓다니...서혜경이 별로였나? 아니면...낭만주의가 싫어서 팔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거 제품에 하자 있는 거 아냐?'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씨디를 이쪽저쪽 비추어봤지만 딱히 흠집이나 문제되는 점이 보이질 않는다. 바코드를 보니 값은 만천원. 현재 만오천원을 쥐고 있으니 그래도 사천원 흑자다. 





당장에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를 켜고 아이폰으로 음원을 옮기는 중 더 거한 대박 발견!!! 마지막 세번째 씨디에 서혜경씨의 친필 싸인이 휘갈겨져 있다. 필시, 이 씨디를 손에 넣은 사람은 서혜경씨의 지인 또는 독주회에 참석한 사람이렷다? 


아무래도 이 판매자는 클래식엔 별 관심없지만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인간관계에 의해 이 친필 음반을 손에 넣은 듯하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이렇게 매물로 내놓인 것이다. 그 사람이 버린 '폐물'이 '보물'로 내게 온 셈이다. 


책방 이름 알라딘 맞다^^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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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둘 - 새 필통, 병사의 재편성]


필통을 잃어버렸다. 얼추 3주 전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했으니까 12월 초순에 분실한 게 틀림없다.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집안 곳곳 다 찾아봐도 없으니 이건 ‘실종사고’로 마무리 지어도 크게 문제 없으리라 본다. 


그 녀석은 나의 글쓰기에 거의 5년을 넘게 종사했다. 그러니까 내가 쓴 대부분의 글들은 그 필통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밝은 황토색을 지닌 비닐류의 원통형 필통이었다. 쟈크도 튼튼해서 쓰는 내내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다. 믿음직한 친구였다. 슬프다. 이젠 그가 없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나의 듬직했던 펜과 기타도구 등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 상당수를 잃었다.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애도만 표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글쟁이는 글을 써야 한다. 우연인지 필연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들과 나는 2012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인연을 마감했다. 언젠가 훗날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부디 쓰레기통에 폐기처분되지 않고 글을 쓰는 새 주인을 만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를 바랄 뿐이다. 


고로, 나는 본의 아니게 새해맞이 차원에서 새로운 필통을 구해야 했고, 나의 글 작업을 도와줄 필기구 병사들을 다시 소집해야만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교보문고 핫 트랙스에서 엄정한 나의 평가 하에 새로운 필통을 등용했다. 색깔은 기존의 황토색보다 더 어두운 고동색의 필통. 한 쪽 면에 초록색 바탕의 ‘STUDY HARD ■BASIC STYLE■'이 표기되어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딱 촌스럽다. 한국 출신이다. 


그래서 골랐다. 글이 예술의 큰 범주에 포함된다고 해도 글은 어디까지나 글이다. ‘나 대단한 글 쓰는 모모모 작가라는 사람이요’ 미친놈처럼 떠들고 다닐 것 아닌 바에야 그저 책 읽고 필요한 부분에 줄 하나 뚜렷하게 긋고, 잘못 썼으면 지우면 끝인 거다. 그런 그들을 잘 담아주면 된다. 그 외의 역할은 없다. 묵묵히 그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 


필기구들도 마찬가지다. 우선 다행히 필통 밖에 빼놓은 관계로 목숨을 건진 녀석들부터 소개하겠다. 화이트다. 꽤 비싼 값을 하는 친구다. 일반적으로 액체로 가득찬 ‘수정액 화이트’는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므로 기동성이 매우 떨어진다. 빨리 마르라고 ‘후~후~’ 불고 꽤 귀찮은 작업을 요한다. 틀렸다 하면 단번에 죽 그어버리고 그 위에 바로 새로운 내용을 기입할 수 있도록 하는 빼어난 능력의 수정도구다. 이름은 'WHIPER MR5'다. 일본 출신이다. 



검정색 펜을 소개한다. 밴드로 따지면 팀의 베이스다. 이름은 ‘DESK BALL 활’이라고 한다. 글씨 두께가 조금 두껍긴 하지만 부드럽게 써지고 가격도 저렴하다는 면에서 상당히 마음에 든다. 아직도 잉크가 많이 남아있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살아줘서 고맙다. 한국 출신이다. 



자, 그 다음엔 색깔 펜이다. 본래의 각 도구에 따른 역할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 없는 관계로 재편성이 불가피하다. 


1. 빨강펜: 반드시 숙독해야 하는 부분을 표기할 때 사용한다. 실종된 관계로 새로 구입했다. 이름은 ‘동아 애니볼 501’이다. 한국 출신이다. 


2. 파랑펜: 찬동하는 글에 표기할 때 사용한다. 원래 사용하던 펜이 있었지만 실종된 관계로 이 ‘STAEDTLER’로 대체했다. 상당히 비싼 친구다. 한 때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했던 친구인데, 나머지 친구들은 거의 다 잉크를 써서 버렸지만 이 친구만큼은 아직도 잉크가 꽤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고맙다. 굉장히 잘 써지고 촉감이 좋다. 독일 출신이다. 


3. 보라펜: 일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상식적인 부분을 표기할 때 사용한다. 이 녀석도 필통과 함께 사라졌다. 당분간 파란펜으로 표기하되, 다른 표식을 하여 구분하는 임시책을 택해야겠다. 


4. 녹색펜: 의문이 들거나 반대하는 글에 표기할 때 사용한다. 이 녀석도 실종되었다. 비판용으로 사용하던 친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 친구를 대신할 도구가 필요하다. 당장 마련하기 어려워 노란색 형광펜으로 대체하였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녹색이 훨씬 보기에 좋다. 이름은 ‘Colorful'이다. 


5. 회색펜: 새롭게 등용한 도구다. 신한에서 만든 것인데, 한 쪽은 굵은 글씨, 다른 한 쪽은 얇은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굵은 글씨는 어떤 특별한 메시지나 문구를 작성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된다. 거금 2500원을 들였으니 앞으로 돈 값을 톡톡히 해 주어야 한다. 이름은 'TOUCH'로 한국 출신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잇. 이 친구 빼놓고 글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색깔이 파, 녹, 빨, 주, 노로 이루어졌다. 각 학자들, 작가들의 견해를 구별하거나, 어떤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나누어 놓거나, 또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 구분할 때 사용한다. 포스트 잇 색깔 끝에 글씨만 간단하게 표기하고 책 갈피갈피마다 붙여 놓으면 나중에라도 발췌할 때 까먹지 않고 온전하게 작업할 수 있어 굉장히 좋다. 일본 3M 출신이다. 현재 빨간색을 다 썼다. 고로, 삼성에서 나오는 빨간 포스트 잇이 달린 펜과 병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필요한 필기도구들의 재편성을 알아보았다. 새해에는 좀 더 강력한 병사들을 소집하여 나의 글쓰기 전선에 절대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이상.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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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04 16:32

    이거어디서샤셨어요??제발가리켜주세요

  2. 2013.06.04 16:33

    필통



라벨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백건우. 그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 중의 하나가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


말 그대로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한편으로 갸우뚱했다. ‘한 손으로만 다채로운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상을 마친 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지손가락이 건반을 주도해 나아가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명쾌한 건반 하나하나가 가슴에 거대한 울림을 자아낸다. 라벨은 대단한 고집쟁이였다. 그 고집만큼 자신에 대한 실력과 자부심도 꼿꼿했다.  


청년 백건우는 프랑스와 라벨을 사랑했다. 그의 왼손에서 뿌려지는 타건의 신비로움이란 마치 땅거미가 지는 석양의 마지막 어스름을 불러일으킨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 이내 청량한 바람과 고슬고슬 풀벌레 소리가 그 빈 자리를 고독하게 채워준다. 찬찬히 밀려오는 피아노 음률에 검푸른 호수가 일렁이고, 오케스트라의 향연에 보라빛 하늘이 별꽃으로 물든다. 


백건우 연주의 백미는 역시 견실한 타건과 단단한 음향이다. 기교보다는 과감한 구도설정과 포치에 무게를 둔다. 커다랗고 새까만 거미 한 마리가 건반 위를 둥당둥당 기어가는 것 같다. 리듬미컬하지만 결코 인위적이지 않다. 


라벨의 화려하고 색채 띤 음의 구현을 수용하되, 결코 극단의 낭만에 치닫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음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은 과감하게 쳐내고 살릴 부분만 확실히 살린다. '라벨은 라벨이고 나는 나니까 듣고 싶으면 들어라'하고 배짱부리는 것 같다. 과연 배짱부릴만한 피아니스트다.


Written by 사샤




[추천] 백건우를 원한다면?
▶ 백건우 / Gary Bertini - 라벨: 피아노 협주곡 (Ravel: Piano Concertos), ORFEO, 1991. 

[추천] 라벨을 원한다면?
▶ This Is RAVEL, SONY, 2002. 
  (CD1: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어미 거위> 모음곡, <밤의 가스파르>, <우아하고 감상적인 활츠>)
  (CD2: <소나티네>,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스페인 광시곡>, <쿠프랭의 무덤>)
  (CD3: <볼레로>, <물의 희롱>,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라 발스>, <현악사중주 F장조>)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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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색연필 깎기, 그리고 꿈]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새해가 오고 있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생전 처음이다. 그 동안의 연말에는 "크리스마스에 뭘하지?"만 고민했지, "새해는 어떻게 준비하지?"가 늘 빠져 있었다. 그만큼 나에겐 '새해'라는 것이 무의미했고, '새해맞이'라는 것이 무색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명절되면 일가친척한테 새배하고 새뱃돈 두둑히 받으면 그게 새해인가보다 했다. 조금 더 커서는 1월 1일이 되면 일찌감치 일어나 반쯤 뜬 눈으로 안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전화기를 귀에 걸고 집안어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안부인사 1~2분 묻고 끊는 것이 예사였다. 새뱃돈 받기는 뭐한 나이고, 나이값 한답시고 의례적으로 하는 새해를 위한 일종의 '기계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 '새해맞이'가 아니었다고 믿는다. 내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때가 되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의 한 단락을 장식하는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만큼 나에게 있어 '새해'란 늘 계속되는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휴일 정도에 그치는 그저그런 날의 하나에 불과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일터에 뛰어들고, 그 일터에 병행하여 또 공부를 하겠다고 아둥바둥댔던 지난날의 시절, '새해'가 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새해를 비웃었다. 


"새해? 새해가 오면 뭐가 달라져? 그냥 사는거지."

"새해가 밥먹여 주냐? 호들갑들은 쯧쯧."

"해피뉴어는 무슨...해피하냐? 에라이 새드무비다."


내가 새해를 무시하니, 새해도 나를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늘 새해없는 새해를 맞이하니 그날이 그날이고, 이날이 이날같았다. 쳇바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다. 


2012년을 정리해보면, 꽤 격동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쳇바퀴 인생에서 탈출하고자 내 밥그릇 울타리의 밖을 넘어섰다. 넘어서 걸어가보니 꽤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접해보지 못했던 세계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만큼 기존에 쥐고 있던 많은 것을 잃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스스로 버린 것도 많았다.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법. 뭐든지 기회비용이라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2012년의 겨울이 내 앞에 닥쳤다. 나는 잠시 멈추어섰다. 그리고 그루터기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내가 행복한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서른 즈음에서, 나는 스스로가 일어서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혜민스님 말씀대로 멈추어 보니 비로소 새해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보지 못했던 것들, 겪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겪고 성장하는, 그리고 작지만 내실있는 열매를 맺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2013년'이 아닌 '나만의 새로운 2013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다른 새해 준비작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맞이 첫 작업으로 나는 색연필을 깎았다. 두 다스를 깎으니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노랑, 빨강, 파랑, 보라, 연두, 초록, 황갈, 주황, 검정 등등 여러가지 색깔이 많았다. 여기서 색연필을 예쁘게 다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색연필이 필요할 때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길고 뭉뚝하게 깎는 것이 중요하다. 다 깎고 나면 이면지에 각각의 색연필을 돌려가면서 뭉뚱그리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 그림을 그릴 때 날카로운 선이 나오지 않는다. 색연필 그림에서 삐져나오거나 두리뭉실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날카로운 선은 그림에 해가 되기 때문에 가급적 그런 선이 나오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을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새해맞이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기껏 색연필이냐라고 웃음치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단순히 평소에 하지 않은 비일상적 행동으로 막연히 내년의 희망을 걸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사람 모두에게 각각 주어진 어떤 특별한 재능, 그리고 사명감 정도는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생각할 때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쾅대고,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그런, 불길같이 솟아오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색연필을 깎는 것이다. 내 마음이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너는 전방위 아티스트가 될 운명이라고. 





전방위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조용한 아지트다. 시칠리아 섬에 나는 조그마한 정원이 딸린 2층 집을 지을 것이다. 시칠리아 섬은 가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곳에 지으라고 내 마음이 나에게 말한다. 40대의 나는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사랑하는 아내와 예술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하고 있다. 


새해맞이 기념으로 나에게 아담한 집을 선물한다. 

 

Written by 사샤

Painted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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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30 01:29



  몇 시쯤 되었을까.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파도소리가 멀리서부터 밀려온다. 누구의 명령으로 육지에 내렸던 말인가. 당장 눈앞에는 먼지자국이 가득히 쌓인 허름한 벽과 바람 치는 소리에 덜컹대는 나무 창틀이 들어온다.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고 있다. 도무지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뒷골이 뻑적지근하다. 귀도 먹먹하다. 해머로 뒤통수를 실컷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아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실신하듯 잠든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머리를 드는 순간 포기한다. 아직 두통기가 뇌를 지배하고 있다. 


“그냥 누워 있어요.”


문을 열고 레나스가 들어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려진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곳에서 제법 큰 검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 놈이 의사인지 저승사자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이내 손과 발에 뜨거운 수건을 감아준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지?”

“이틀, 아니 오늘로 3일째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왜...이렇게...?”

“선장이 직접 느껴지지 않아요? 두통입니다. 선장의 가장 큰 적이죠.”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요. 요리사는 과일 씻고 있고, 사샤는 마을에 이것저것 사러 내려갔어요. 이번 전투에서 얻은 수확이 많지 않아요. 다들 사기가 떨어져 있어요. 더구나 선장까지...”

“여기는...?”

“세빌리아 인근 마을이에요. 기억 안 나죠?”

“글쎄...알제리항에서 나와서...이스탄불 함대 1척과 붙었고, 배의 전리품을 확인하는 중이었는데...거기까지야.”

“거기부터 선장의 두통이 심해졌죠. 늘 달고 다니는 두통이라고 해도 이렇게 심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나중엔 헛소리도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긴급 상륙을 명령했어요. 당분간 선장은 쉬어야 돼요. 가짜로 쉬는 거 말고.”

“가짜든 진짜든 쉴 틈이 어디 있나.”

“그 생각에서부터 두통을 차곡차곡 쌓아온 거에요. 뇌가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고서 한 방에 보낸 거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겁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다들 기분이 좋지 않겠군.”

“기분들이야 각자 알아서 챙길 거에요. 그런 건 의사인 나로서도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 지금은 신경 꺼요. 선장이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 약초를 달였어요. 이 물부터 마셔요.”


  물이 뜨겁고, 쓰다. 마신지 10분 정도 지나니 차가웠던 손과 발에 점점 열기가 돈다. 꽉 막혔던 뒷머리와 위장이 서서히 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파른 숨이 점점 고르게 흐른다. 두통에 못 이겨 채 뜨지 못했던 왼쪽 눈꺼풀이 서서히 문을 연다. 살 것 같다. 


“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어떤 때요?”

“고통에서 회복할 때, 몸에서 열이 풀리고, 손끝과 발끝에 촉감이 뱅글뱅글 돌 때가 가장 몸의 오감이 잘 느껴져.”

“두통의 맛을 제대로 보여줄까요?”

“너도 사샤 닮아가는 거냐? 아무튼...괜한 지병에 모두에게 피해만 줬군.”

“선장의 그 피해의식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겁니다.”

“피해의식?”

“두통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난 지병이니 유전이라고 할 밖에.”

“두통이 났다는 건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두통은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증상입니다.”

“성실한 나를 칭찬해줘야겠군.”

“그런 뜻이 아니구요. 두통을 겪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정리정돈과 편식입니다.”

“내가 평소에 음식을 가려서 먹었나?”

“내가 말한 편식은 음식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 편식, 기호 편식, 술 편식, 등등.”

“그래서?”

“선장 같은 사람들은 순결주의자란 말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꾸리는 데서 잘 나타나죠.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선장은 더러운 것, 특히 본인이 생각하는 개 같은 인간들을 보았을 때 1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정리하거나 제거하지 못했을 때 2차 충격의 잔해가 남죠.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범위에 선장의 행동이 겹쳤다고 판단했을 때 가장 큰 3차의 충격으로 이어지죠. 3차 충격에 휩싸이고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응어리로 남으면 바로 이런 두통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구요. 제가 지켜 본 관찰결과입니다.”

“순결주의자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

“너무 그렇게 순결, 고결을 고집하지 말아요. 물론 그 생각이 저를 배에 타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늘 유지하고 살면 본인의 삶이 힘들어져요. 너무 무언가를 정리하려고도, 그렇다고 너무 사람을 가리고 챙길 필요도 없어요. 기본에만 충실하면 그 뿐입니다. 기본을 완전으로 가져가려고 하지 마시구요. 완전이라는 것은 단어 상에만 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구요.”

“이젠 심리테스트도 하는군.”

“선장이 생각한 완전의 범주에서 놓쳤다고 판단되는 것들, 놓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것들, 다 주우고 정돈하려 하지 마세요. 여기 선장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눠 갖고, 같이 가는 거에요.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거라구요. 면도도 당분간 하지 말아요. 사샤처럼 턱수염도 더부룩하게 내버려둬야 얼굴도 숨을 쉽니다.”


  잠시 떠든 사이, 창가에 해가 걸렸다. 따스한 햇볓이 내려앉으니 한결 낫다. 요리사가 오더니 레모네이드를 건네주고 간다. 레나스가 몸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컵을 입에 물려준다. 새콤한 물이 들어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샤가 왔나보다. 마을에서 무슨 요리를 봤는데 그걸 해달라고 요리사에게 계속 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알아서 조르고,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들 잘 하고 있다. 나는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 되겠다. 조만간 레나스에게 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시 이불을 깊게 감고, 눈을 덮는다. 


Written/Photo by 선장

Photo: 인천역 카페 팟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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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커피를 마신 기억은 군대를 기점으로 나뉜다.


A(31세): 글쎄, 군대 전에 뭘 마셨는지 기억이 전혀 안나요. 그냥 믹스커피 정도는 마신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별 생각이 없던 거겠죠.


B(30세): 대학동기 두 사람과 어딜 놀러가던 중 동료 한 사람이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겠다며 뭘 마실지를 물었어요. 그 때 두 사람은 캔커피를 택했고, 저는 베지밀을 선택했죠. 전 군대가기 전까지 한번도 안 마셔본 것 같아요.


두 남자의 커피와의 인연은 군대에서부터 시작된다.


A: 특수한 보직이었죠. 적기를 레이더로 감시하고 보고하는 뭐 그런 보직이라. 새벽12시부터 아침 7시반까지 근무하는 일이 잦았죠. 그 때 마침 에스프레소 정도를 마실만한 육군호랑이가 그려진 컵을 누군가가 줬죠. 아마도 간부였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땐 에스프레소가 뭔지도 몰랐고. 일단 그 컵에 믹스커피를 진하게 타서 마시면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마셔봤어요. 실제로 대단하더라구요. 적어도 12시부터 3시반까지는 말똥말똥하게 버틸 수 있게 해줘요. 단 한잔으로 말이죠. 전 사실 카페인의 효과 때문에 마셨어요. 커피라기보다는 각성제의 기능에 더 끌렸다고 해야 하나요?


B: 그 때 처음 커피를 마셨죠. 근데 정확히 말하면 커피를 마신 건 사실 아니에요. 우유에 달달한 무언가를 타서 마신다는 그 자체가 저한텐 더 중요했죠. 그렇게 커피우유는 마셨어도 믹스커피만 즐겨 마셨던 것 같진 않아요.


믹스커피에서 벗어나 프렌차이즈의 커피를 마시게된 배경도 들어보자.


A: 매일 같이 한잔한잔 새벽마다 마셔대니 부사수가 커피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요새 밖에서는 에스프레소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이런 커피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니까 휴가 나가시면 꼭 드시고 오십시요." 이렇게 말이죠. 하 그런데 왠걸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이 두 개만 기억하고 있던 저는 그만 일병 휴가를 나가서 에스프레소를 시켜버렸어요ㅠㅠ 사이즈도 작은 것이 왠지 모르게 군대에서 먹던 것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마셨는데 엄청나게 쓰더군요. 물릴수도 없고, 쪽팔리기도 하고 그냥 앉아서 먼 창밖을 보면서 최대한 우아하게 마셔보려고 노력했어요. 아메리카노 마셔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부대를 복귀해버렸어요. 그 때가 2004년 4월 정도가 되겠네요.


B: 딱히 이유는 기억도 안나고 모르겠어요. 그냥 제대하고 복학하니 후배들이 우르르 커피 전문점 가길래 따라가서 마셨고. 아, 그 기억이 나요. 후배 한명과 커피숍을 가서 무얼 먹겠냐고 물어서 달달한 것 없냐 물었더니 캬라멜 마키아또를 시켜주더군요. 그게 아마 처음으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A: 전 달달한 맛보다는 카페인이 얼마나 쎈가를 더 따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진한 아메리카노 이런 것들을 제대 후부터 즐겨마셨던 것 같아요. 근데 자꾸자꾸 마셔보고 여기저기 가보니 똑같은 아메리카노라도 맛이 다른 것도 알겠더라구요. 그때부터 진짜 커피맛을 따지기 시작하고 호불호가 세졌어요. 요새 그 M사가 최근에 자기네들 커피랑 스/커/할과 같은 회사의 커피를 비교해서 맛의 차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그건 쌩뻥이에요. 적어도 제 입장에선 말이죠. 분명히 커피 자체를 즐겨마시지 않는 샘플을 데려다가 시음을 시킨거에요. 사람들이 왜 스 회사에서 할인행사한다하면 길게 줄을 서서 끝까지 기다려 마시고 가는 이유가 뭔지. 그건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만 알죠.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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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요리사가 즉석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동댕이치더니 곧바로 슥슥 회를 떠버린다. 멍때리던 선원들이 고기를 보니 저글링처럼 달려든다. 물고기 크기가 엄청크다. 허리만큼 오는 정도의 길이에 늘씬하게 빠진 몸매. 프리즘이 빛나는 비늘이 온 몸을 덮고 있는 녀석인데, 힘이 그야말로 장사다. 펄떡펄떡 뛰더니 꼬리로 요리사 엉덩이를 힘껏 후려친다. 요리사도 지지 않고 물고기의 몸뚱이를 힘껏 내동댕이친다. 저편으로 떨어져 나간다. 물고기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그냥 먹으랜다. 적어도 독은 없으니까 맘 편히 먹으라는 말에 삽시간에 몸뚱이 살점이 사람들의 입으로 흡수된다. 자연은 돌고 도는 법. 초고추장이 모자르다. 나가사키산 와사비가 물고기의 눈가에 점점이 번져 있다. 이 녀석의 눈은 아직도 껌뻑대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맛 있냐?" 최후의 한 마디를 던지고 끝내 눈을 감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마음씨 고운 사샤가 녀석의 눈을 가만히 감겨준다. 뭐라고 중얼중얼 기도를 한다. 종교도 없으면서. 그냥 곱게 먹지 않는다. 


"왜 살려줬어요?"

"뭐?"

"왜 살려줬냐구요?"

"누구?"

"그 때 있잖아요. 그 남자, 멀쩡하게 생긴 허연 사람."

"아."


괜한 질문으로 또 시비를 건다. 딱히 할 말도 없거니와 뭔가 대응하기도 꺼림직한 마음에 입을 잠근다. 질문을 한 건 맞는건지, 그새 손으로 회를 집어 입 안에 가득 넣는다. 또 지껄인다. 


"선장은 그런 사람 싫어하잖아요. 왜 살려줬어요?"

"그러게, 나보고 치료는 또 왜 해주라고 했지? 우리 약품도 별로 없어요. 다음 번 육지 때 사야돼요."


의사 레나스도 거든다. 파도가 잔잔해지니 입도 살아났다. 몸이 안좋은건지, 먹는게 불편해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도 쩝쩝 잘 먹는다. 몸져 누워있던 시체가 살아나 활동을 하니 보기에도 좋다. 좀비 같다. 웃긴 마음에 갑자기 대답을 해주고 싶다. 


"아, 그 사람. 재밌더라구."

"뭐가?"

"그냥, 말하는 게 꽤 흥미로웠어. 아니지, 말은 별로 안했지. 그 사람 직업이 교사더라구."

"교산데 왜 이런데 잡혀오고 그러지? 교사 구라아냐?"

"글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고향에 갈 모양이었던 것 같아. 배를 갈아타고 가는 길에 우리한테 걸린 것 같아."

"그래서 뭐가 잼있었어요?"


요리사도 묻는다. 손이고 몸이고 온통 시뻘건 피투성이다. 야생적인 인간. 


"먹으면서도 잘도 묻는구만. 뭐 딱히 집어 말하면...음..."

"뭔데요 빨리 말해요!!!"


셋이서 일제히 달려든다. 


"뭐야 이 분위기는;;; 그래, 그 놈. 대화를 그림으로 하더라고."

"그림??? 무슨 그림???"


사샤의 눈이 빛난다. 왜 나에게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다. 


"아, 보통 잡혀들어오는 놈들은 눈도 제대로 못마주치고 늘 땅만 보잖아? 근데 그 놈은 아니었어. 나를 편하게...지긋이...바라보더라구."

"형이랑 잘해보고 싶었던 거에요."

"닥쳐. 입에 총알 박아 줄까? 그런 게 아니고. 뭔가...뭔가 모르게 별종이었어. 열의 아홉은, 아니지. 열의 열은 다들 살고 싶어 안달을 내잖아? 돈을 주겠다는 둥, 육지에 누구를 안다는 둥, 별 개소리 다 하고, 가족이 아프다느니 누가 어쨌다느니 착 엎드려서 다들 말이 많다구. 나한테 얘기해야 뭐 통하겠어? 근데 그 놈은 달랐어. 눈이 뭔가가..."

"눈깔이?"

"어, 눈깔이 굉장히 편안해 보였어. 넌 파랗잖아? 그 인간은 붉갈색이었는데, 눈이 말해주더라구."
"뭘?"

"억울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다."

"어떻게 알아요?"


속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그 교사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가 남긴 작은 노트. 소금기에 그새 눅눅해져 버렸다. 그가 그린 집이며, 사람, 동물, 나무, 편지지, 궁전 등등 단 3일만에 제법 여러 가지를 그리고 떠났다. 


"스페니쉬 계열의 사람이었던 것 같아. 요 쏘이 뭐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가까이 가서 얼굴을 쳐다봤더니 웃더라고."

"웃어요? 선장을 보고?"

"깔깔 웃는 거 말고, 그냥 희미하게 웃더라구. 근데 어쩐지 정겨운 느낌이 들더라구. 그래서 손을 풀어줬더니 주머니에서 노트랑 펜을 꺼내던데?"

"그냥 보기엔...뭐 별거 없는데?"


사샤가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그림의 실력도 형편 없거니와 뭔가 자신과 비교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인지 눈썹 가운데에 한자로 '내 천'자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림이 잘났다는 건 아니고 ㅋㅋ.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고는 그냥 그림을 그리더라고. 근데 신기한 건 그림 하나 가지고도 이 놈이 어디 사람이고 가족이 누구고, 누구를 가르쳤는지 다 알겠는거야."

"그래서, 어딜 가던 길이었대요?"

"리스본, 아테네에서 10년 정도 무슨 귀족 아들을 가르쳤던 모양이야."

"그걸 그림을 보고 알았어요?"

"그러니까 신기하단 거야."

"그래서???"


물고기는 이미 끝장이 나 있는 상태였다. 요리사가 일어나더니 포도주를 가져온다. 다들 목이 탔는지 벌컥벌컥 마셔댄다. 다들 얘기에 관심이 많다. 


"아...그래서. 리스본이 지 고향인데,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대."

"그래서 놔준거에요?"

"아니, 우낀 건 결혼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대. 단 한번도."

"........"

"우연한 기회에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거진 8년 동안 편지만 주고 받았다는거야."

"희한한 사람도 있네요."

"그 편지 하나를 보여줬어. 근데 편지지에 별 얘기도 없어. 글씨 몇 자 없는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 줄 알아?"

"이미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거잖아요."

"그래, 나중엔 둘이서 글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마음을 전했다 그러더라고. 정말 별 게 없어. 그냥 단순한 드로잉이야. 그 녀석이 산 새 책장. 여자가 가꾸는 화분, 화장대. 그냥 일상의 이런저런 것들을 간단하게 그려서 서로 그림으로 대화를 나누더라고. 그 그림을 보여주는데...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너희들이 봤어야 해."

"나 배에서 내릴까요?"

"어디 헤엄쳐서 가봐. 어쨌든,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을 편지로...더군다나 그림으로 소통하는 그 방법이 꽤 흥미롭더라고. 그게 나한테도 먹혔으니 그 놈은 목숨을 건진거고."

"역시, 남자는 한방이 필요하군요."

"여기 다 한방씩은 갖고 탔잖아?"

"죽빵 한 방 드릴까요?"

"먹었으면 치우고 가서 닥치고 잠이나 자."


날이 슬슬 어둑어둑 저물어 간다. 다 먹고 남은 물고기의 잔해를 햇볕에 널어놨더니 갈매기들이 훨훨 날아와 조근조근 쪼아 먹는다. 그래, 다같이 사는 세상. 너희도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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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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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 적이 있다는 것, 적이 된다는 것.] 


파도가 거세졌다. 배가 꽤 출렁인다. 이제서야 비교적 먼 바다로 나온 것 같다. 우리의 이동경로에 여러 적함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가급적 밤을 이용해서 항해하는 것이 좋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 밤하늘에는 호빵만한 하얀 달이 둥그러니 떠 있고, 주위에는 깨알같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다. 배를 둘러본다. 아침에 실은 함포가 묵직한 것이 든든해 보인다.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우리도 어느 정도 규모가 커 지면 좀 더 내구성이 강하고 노트가 좋은 갤리온급의 배로 바꿔야 한다. 지금의 배로서는 앞으로의 애로사항들을 헤쳐나아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하나둘 겹친다. 갑판대에 나와 앉아있는데, 저편에서 사샤가 걸어온다. 


"선장, 추워죽겠는데 밖에서 뭐해요?"

"넌 뭐 하고 있냐?"

"난 이것저것 그려보려는데 쉽지 않아서, 그리다 관뒀어요. 술 좀 남은 거 있어요?"


사샤 입에서 포도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놈이 배에 있는 술의 족히 반은 먹어치우는 것 같다. 옷 이곳저곳에 온통 물감 투성이에 술 자국 천지다. 배에 있으면서 단 한번도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리 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러워보이지 않는다. 냄새도 딱히 나지 않는 것 같고. 눈이 파래서 그런가? 잠시 훑어보고 있자니 더럽게 트림을 연거푸 해댄다. 


"요리사한테 가면 술을 왕창 줄 거야. 저번 전쟁에서 어디 불타고 있는 배에 들어가더니 포도주 스무통 정도 건져서 들고 오는 걸 내 눈으로 봤어."

"그거 다행이군."

"의사는 뭘하고 있지?"

"파도가 심하다고 멀미 중이라 못 움직인데요."

"으휴, 의사가 멀미를 하다니, 병이 나면 간호를 해줘야할 지경이군."

"의사에게 술을 주고 올까요?" 

"사샤."

"왜요?"

"저번 육지 때 머리좀 자르지 그랬어. 영 거지꼴인데?"

"누가 볼 것도 아닌데 뭘 신경써요?"

"그럼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그림은 왜 그리지?"

"같은 질문이잖아요. 그럼 선장은 누구 보라고 약탈질 해요?"

"하하, 따는 그렇기도 하군. 넌 그런 도발적인 면이 아주 해적스러워."

"해적보고 해적스럽다고 하는 건 어이가 없군요."

"사샤."

"아, 그렇게 진지하게 부르지 좀 마요. 그냥 어이! 이렇게 부르던가."

"내 맘이다 이 자식아."

"알게 뭐야. 젠장."


투덜투덜대면서도 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옆에 붙어 있는 놈이다. 그건 또 특이한 이 놈만의 성격 중 하나다.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데, 말투는 틱틱 내뱉는게 영 재수가 없는 게, 그게 이 놈의 문제다. 뭐 그렇다고 그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난 왜 해적이 됐을까를 생각해봤어."

"또 어이없는 철학적인 세계로 빠져들었군요. 그래서...답을 냈어요?"

"아니, 돌이켜 봤는데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어."

"그게 답이에요."

"응?"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면, 태어났으니까 태어난거지 다른 이유는 없잖아요? 선장은 해적이 됐고, 그 과정에서 뭐 여러가지 일들은 있었겠죠. 자 봐요, 내가 걸치고 있는 앞치마가 참 깨끗하죠?"

"너 만큼 깨끗하다."

"이렇게 이 색 저 색 묻히다 보면,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그리고 있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 때부턴 달려들어서  마구 이것저것 더 넣어보기도 하고, 파도가 심하면 잠시 붓을 놨다가도 또 그려대고...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는거라구요. 선장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하나의 그림이죠."

"사샤 니가 더 철학적인 것 같다."
"웃기는 소리. 난 그런거 몰라요. 그냥 물어보니까 술 취한 김에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거지."


이 놈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왜 육지에 분노하고, 바다를 택해 이렇게 망망대해로 나와 선원들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떠도는지, 그 원인을 따지자고 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사샤가 떠들어대는 말은 그냥 아무거나 다 갖다 붙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느 한 구석엔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럼 하나 또 물어보지."

"아, 이 양반 술을 안먹어서 그런가 참 질문도 많네."

"그럼 적이란 건 왜 있지? 어느 새부터인가 보이지 않던 적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 같아서."

"어느 새부턴가? 늘 있던 게 아니구?"

"아, 적은 늘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눈에 띄게 식별되는 것 같아서."

"여봐요, 선장. 선장!"

"왜?"

"적포도주는 무슨 색깔이죠?"

"옷에 묻은 색깔보니 대충 보라색 아닌가?"

"보라색은 뭔데요?"

"보라색이 뭐냐니?"

"보라색은 파랑과 빨강이 만나서 이루어진 색이라구요. 파랑과 빨강을 섞어쓰면 그림에서 불이 나요."

"불이 난다구?"

"그냥, 내가 즐겨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해둬요. 상극과 상극이 만나니 그림이 상대적으로 자극적이고 강한 인상을 주게 되죠. 중간에 어떤 색깔들이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희석시켜주지 않으면 안되요. 만약 둘이 만나 부딪히면 보라색이 되는 거구요. 그거 알아요? 보라색은 죽음의 색이라는거?"

"누가 그래?"

"내가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

"파랑이 있고, 빨강이 있어요. 파랑이 있으니까 빨강이 있고, 빨강이 있으니까 파랑이 있죠. 둘 보고 왜 있냐 물어보면 할 말은 없는 거에요. 원래부터 있는 거에요 아군 적군은. 수면 위에 적이 올라와서 무서워요?"

"조금 무섭기도 해. 그런데 뭐 별 건 없지."

"좋은 자세군요. 조금 무서워 할 줄도 알아야죠. 그래야 우리도 죽지 않고 살아남지. 근데 너무 심각하게 적에게 곤두세우지 마요. 원래부터 빨강과 파랑은 있었던 거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아요."

"시원한 답이군."

"추운데 들어가요. 술이나 먹어요 같이."


초겨울의 밤이 깊고 검게 흘러간다. 출렁출렁대는 배의 움직임이 좋다. 주말에 또 한번의 풍랑이 예고된다. 그 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충분히 휴식을 취해둬야 한다. 좋은 밤이라고 해두자.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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