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열혈이다


패밀리가 비록 8비트 게임기이기는 하나 사실 전설적인 게임이 많았다.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도 그렇고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가 좋은 예다. 이 둘은 나중에 게임계의 큰 획을 긋는 대작인데 이후로 계속적으로 시리즈가 출시되어 전설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처럼 잘 찾아보면 대작의 시초이거나 괜찮은 작품이 패밀리에 많았는데 특히 ‘게임은 협동이다’를 보여준 작품이 있으니 바로 ‘열혈 시리즈’였다.


패밀리를 가졌던 유저라면 한번쯤은 해봤을 정도로 유명하고 패밀리의 대중적인 게임이었다. 일단 친구와 함께 2인 협동 플레이가 가능했다는 점은 우리들이 열광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기존에 2인 플레이가 되는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인 플레이기는 하나 먼저 게임을 하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 받는 식의 게임이 많았다. 2인용이기는 하나 협동적인 모습은 없던 것이다. 물론 전설의 슈팅게임인 ‘트윈비’나 ‘배틀시티’ 같이 게임이 있긴 했으나 협동이라 긴 보단 같이 한다(?) 정도의 느낌이었다. 같이하는 친구가 적의 총알을 피할 수 있게 도와 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열혈 시리즈는 찐한 우정을 체험할 수 있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열혈 격투전설’의 경우 열혈 시리즈의 여러 캐릭터들이 나와 무술을 겨루는 게임(사실 무술이라기 보단 그냥 패싸움 같았다)이었다. 2인 플레이시 나와 친구가 한 팀이 되어 함께 상대방을 물리쳐야했다. 친구가 맞고 있으면 달려가 롤링어택을 날려주고, 내가 맞고 있을 땐 친구가 달려와 니킥을 날려주고는 했다.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우정이었다.


캐릭터 고르는 방식도 특이 했다. 이름과 생일, 혈액형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졌고, 무술의 종류가 달라졌다. 그래서 주로 좋은 무술과 능력치가 나오는 생년월일과 혈액형은 외워두고는 했다. 나는 특히 마샬아츠를 사용하는 캐릭터를 좋아해 외워두고 사용했는데 검정 도복바지를 입고 발차기를 샤샤샥 날리면 이소룡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최고였다.


열혈 시리즈엔 ‘쿠니오’와 ‘리키’라는 주인공이 있었는데 모든 시리즈엔 꼭 나왔다. 흡사 김성모 만화에서 ‘강건마’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김성모의 만화에서는 강건마는 어떤 작품에 나오던 킹왕짱 쌔지만 열혈 시리즈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쿠니오와 리키가 제일 후졌다. 웬만하면 주인공이 제일 쌜 법도 한데 별로 특징도 없고 그렇다고 멋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게임을 하면서도 거의 골라본 적 없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스토리 모드를 하다보면 이 녀석들을 플레이하게 되는데 하는 동안 내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쿠니오와 리키의 우정만큼은 최고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열혈은 시리즈물인데 열혈격투전설 빼고도 ‘열혈’이라는 이름을 붙친 온갖 스포츠가 존재했다. 열혈하키, 열혈축구, 열혈농구, 그리고 올림픽을 연상케 하는 열혈신기록.(우리는 주로 열혈 운동회라 불렀다) 이밖에도 많지만 내가 주로 한 것은 이것들이었는데 모두다 깨알 같은 재미와 협동이 존재했다.


열혈시리즈가 협동이 존재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모든 시리즈엔 폭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열혈’이란 단어가 붙은 이상 일반적인 스포츠 게임을 상상하면 큰 오산이다. 열혈하키의 경우 하키채로 패는 것도 모자라 그냥 주먹도 휘두를 수 있었다. 


특히 마구를 쏘기 위해선 대략 3초가량 슈팅 버튼을 눌러 기를 모아서 쏴야 했는데 기를 모으는 3초가량은 거의 무방비 상태다. 초반 한두 판의 경우 컴퓨터가 좀 모자라 기를 모으는 동안에도 잘 건드리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인공지능도 좋아져 기를 모은 다 싶으면 하키채 찜질을 받기 일쑤였다. 

이때 다시 한 번 뜨거운 우정이 빛을 바라는데 기를 모으는 동안 내 친구는 슈팅을 방해하러 오는 상대방을 있는 족족 쳐 패고는 했다. 물론 내 친구가 마구를 위해서 기를 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가? 생각만 해도 뜨거운 우정이 아닌가? 친구의 마구를 위해서 내 한 몸 던져 친구를 지킨다! 그 정신은 정말 휘트니 휘스턴 지키던 캐빈 코스터너 저리가라였다. 하여튼 ‘열혈’이란 단어가 붙은 이상 정상적인 스포츠는 아니었다. 

열혈시리즈의 최고의 장점은 협동이라 말했지만 사실 최악의 단점(?)도 사실 협동이라는 점이었다. 협동이 되는 만큼 우정파괴의 위험도 도사렸다. 



다른 시리즈도 비슷하지만 열혈 격투전설의 경우 상대 팀만 때릴 수 있던 게 아니라 같은 편도 타격이 가능했다. 쉽게 말해 내가 내 친구의 캐릭터도 팰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를 위기에 구하기 위해 날렸던 롤링어택이 상대팀과 함께 내 친구도 함께 날렸을 땐 욕설이 튀어나오기 딱 좋았다. 


이게 심해지면 한명이 삐지고 “너랑 안 놀아”가 나올 수도 있는데 오락기 주인이 삐져 그만한다고 해버리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오고는 했다. 게임을 계속 같이 하기 위해선 주인장 녀석의 비위를 조금씩은 맞춰주고는 해야 했다. 어린 나이지만 사회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우정파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열혈 시리즈는 이후 여러 게임기에 이식되고 했다. 그러나 패밀리만큼의 큰 빛을 보지 못했다.(물론 우정파괴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열혈남아(熱血男兒)가 아닌가? 키 작던 나도, 내 친구도 쿠니오와 리키 못지않게 열혈남아였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남자라면 역시 열혈인 것이다.


 written by 선의


이전 글 - [그 시절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것들] - 플레이스테이션 그리고 새턴 vol.6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언제쯤이었을까? 친구한 녀석이 새로 나온 아이폰을 처음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평소 애플사의 아이팟을 애용하던 나는 아이폰이라 하여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단지 아이팟 터치에 전화기 기능을 더한 새로운 제품 정도로 인지하는 정도? 그러나 친구 녀석이 나에게 보여준 다양한 어플들은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도 이랬을까?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 신기함 그 자체였다. 그중 여자 목소리로 대신 욕을 하던 어플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재밌었다. 차후 내가 스마트폰을 구입하자마자 가장 먼저 설치한 어플도 그 욕 어플이 었을 정도다. 거기에 지금은 국민 어플이 된 ‘카카오 톡’은 더욱 신기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어플은 전화번호가 있고 상대방도 이 어플이 있으면 자동으로 친구등록이 되지”라고 설명했다. 정말 신기했다. 내가 친구를 찾아서 친구등록을 할 필요가 없고 전화번호만 있으면 친구추가가 된다니? 이건 영화에서나 될법한 일들이 현실에서 이용되는 듯했다. 거기에 문자를 보내는 것도 꽁짜라고 하니 스마트폰이 더욱 더 위대해 보였다. 그 외에도 버스의 도착시간이나 컴퓨터 못지않은 게임 퀄리티 등 스마트폰의 매력은 넘쳐흘렀다.


그 매력에 빠져 차후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구입했으나 익히는데 꾀나 고생했다. 나는 지금껏 얼리어답터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신식 전자기기를 다루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조금 달랐다. 

처음 아이폰을 접했을 땐 전화를 끊는 것도, 문자를 쓰는 것도 조차 힘들었다. 더군다나 어플을 받기위한 앱스토어의 가입절차가 뭐 이리 복잡한지 한동안 친구의 아이디를 도용하며 살아가기도 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새로운 것 하나 알아가는 것도 힘든 건가?’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읽고 이해하는 것이 귀찮았던 것일 뿐이지만 말이다.


스마트폰이 조금 익숙해진 후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일한 시간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본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별달리 할 것도 없는데 이것저것 보고 먹이를 찾는 승냥이 마냥 앱스토어를 뒤지고 다니고는 했다. 그렇다보니 배터리의 소모량이 엄청나서 항상 방전될까봐 걱정했었다. 그래서 보조 배터리까지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스마트폰도 그냥 핸드폰이었다.


할 일없으면 들어갔던 앱스토어 덕에 밀리지 않았던 업데이트는 이제는 업데이트 하라고 숫자 뜨는 것조차 귀찮고 무섭다. 심심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 걸었던 카카오 톡도, 혹시나 방전될까봐 샀던 보조 배터리도 가방 한 켠에서 먼지만 쌓여 가고 있다. 집에 오면 충전해달라고 빨갛게 들어오던 배터리도 80%이상 남아 있을 때도 있고, 가끔씩 바쁠 때면 90%이상 남아있어 다음날까지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로 남아있고는 한다. 한때는 책을 집어던지고 매달렸던 스마트폰도 시간이 지나자 결국 예전에 사용하던 핸드폰이 됐다. 예전보다 조금 영리한(?) 핸드폰 정도랄까?

이런 스마트폰 마냥 나도 언젠간 나이를 더 먹고 서서히 사람들 관심 밖으로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12.16 20:34



“겨울이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이렇게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Wham의 ‘Last christmas’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노래지만 내가 처음 들었을 땐 나의 첫 스무 살의 겨울이었다.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고 성인으로서 발돋움의 설렘과 겨울의 푸근함이 만나 한껏 들떠있던 때였다. 오는 눈만 봐도 두근거림에 밖을 뛰다닐 정도로 풋풋함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Last christmas를 처음 들었을 당시에도 그 풋풋함과 두근거림 그리고 설렘이 함께했다. 


눈 오던 스무 살 겨울. 내가 좋아하는 누나와 함께 탄 버스에서 난 누나의 이어폰을 통해 Last christmas를 들었다. 누나가 듣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뺏어 내 귀에 꽂자 처음이지만 참으로 따듯한 멜로디가 나오고 있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지만 그래도 똑똑히 잘 들리는 단어는 ‘Last christmas’라는 단어. 고개를 돌려고 나는 누나에게 물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왜 캐럴을 듣고 있어?” 누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이 노래는 캐럴이 아니고 팝송이란다.” 팝은커녕 국내 가요도 잘 안 듣던 나로선 크리스마스가 들어가니 당연히 캐럴인줄 알았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그 사람과 난 연인이 됐고 함께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Last christmas를 함께 듣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도 스무 살 밖에 안 된 나로서는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성인으로 맞는 겨울, 첫 여자 친구 그리고 첫눈. 하는 대부분이 처음이어서 인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설랬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 해 겨울이 끝날 때쯤 나는 그 사람과 이별을 했다. 수원 어딘가에 있는 커피숍에서 이별을 통보 받았다. “우리 그냥 누나 동생사이로 지냈으면 좋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이별통보를 받은 그 커피숍에서도 Last christmas가 따뜻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노래 나올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그 사람은 이별을 했다. 첫 이별인 만큼 많이도 아팠다. 죽을 만큼. 이별 후 나는 Last christmas를 듣지 않았다. 

다음 해 더운 여름날 나는 입대를 했다. 이별에 대한 홧김은 아니었지만 예정보다 빠른 입대였다. 입대 후 선임 절반 정도를 전역시켰을 때 쯤 Last christmas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겨울은 아니었지만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리움에 잠시 먹먹했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인지 통칭 싸제의 겨울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노래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상당히 선임이 된 후에도 나는 줄곧 Last christmas를 듣고는 했다. 잘 때도, 내무실에서 쉴 때도. 그러자 어느 날 한 후임이 내게 물었다. “겨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캐럴을 들으십니까?” 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이 노래는 캐럴이 아니고 팝송이란다.” 


예비역이 끝난 지금에도 내 이어폰에는 여지없이 Last christmas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사람 이어폰에서 따사로이 흘러나왔던 멜로디처럼 올 해 겨울도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다. 그 해 겨울처럼.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14로 걸려오는 전화의 양이 줄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114의 역할을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114로 전화하여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보다는 직접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여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 전 시절엔 집에 하나씩은 가지고 있던 전화번호부를 이용해 전화번호를 찾고는 했다. 물론 이 전화번호부도 시간이 지나면서 114 때문에 차츰 없어지기 시작한 것 중 하나다. 그런데 전화번호부를 없어지게 만든 114도 스마트폰이라는 최첨단 장비로 인해 서서히 없어져 가는 것이다. 디지털 첨단 장비의 출현으로 인해 점차 사라져가는 것들이 비단 114뿐일까?


집에 한 권씩 가지고 있던 전화번호부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찾아 줄긋던 시절 ‘삐삐’라고 불렸던 무선호출기의 등장은 사회적인 큰 이슈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조금이나마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다.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무선호출기에 연락받을 전화번호를 남겨 연락을 취하는 방식인 무선호출기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불편하고 상상도 못할 방식이지만 그 당시엔 정말 획기적이고 사회에 큰 이슈를 자아낼 만했다.


무선호출기를 이야기하자면 공중전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1인 1 휴대폰 시대라 공중전화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그 당시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공중전화의 위치까지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슨 통화를 그리 길게도 하는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던 사람도 있었다. 더불어 공중전화부스 안에는 꼭 쇠사슬에 묶여 있던 전화번호부도 함께 있었는데 사람들이 필요한 부분을 찢어가 항상 너덜너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중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동전을 바꾸러 다니는 사람들, 공중전화 위에 지갑을 올려놓고 갔던 사람들 그리고 전화카드. 공중전화에 관한 에피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전화번호부나 공중전화, 무선호출기 등 한때는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휴대폰이라는 첨단 장비의 보급으로 점차 잊혀가는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대중화는 진정한 디지털 시대의 시작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휴대전화의 등장은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함으로써 더 이상 개인적으로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됐고, 공중전화는 비바람을 피하는 용도 정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무선호출기는 ‘아! 내가 이걸 사용하던 시절도 있었지’하고 추억을 되짚어볼 만한 물건이 됐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고 나서 우리 생활에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약속장소의 결정’이 아닐까 한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약속장소를 미리 정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하루 전 혹은 미리 연락해 “어디서 몇 시에 만날까?”라고 했던 것들이 이제는 휴대폰을 통해 바로바로 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함께 실종된 것도 있으니 바로 ‘약속 시간’이다.


명확히는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시간’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약속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코리아 타임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은 약속시간에 늦게 되면 상대방이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책임감 덕뿐인지 약속시간이 잘 지켜졌다. 휴대폰의 보급된 후부턴 늦더라도 연락이 가능하니 조금은 늦어도 된다는 생각이 약간은 생겼나 보다. 물론 휴대폰으로 인해 엇갈리고 답답한 마음도 사라졌다고는 하나 핸드폰이라는 최신식 기기 덕에 사람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것조차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휴대폰의 진화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작고 휴대하기 편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기의 개념을 떠나 사진, 동영상 촬영 등 어느새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아갔다. 휴대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하기도하고 허전하기도 하며 휴대폰도 없는데 괜히 문자소리가 귀에 맴도는 경우를 한 번쯤은 느껴봤으리라…


오늘날 휴대폰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편해졌다. 그러나 지하철이나 친구들끼리 만나서도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자면 삭막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배고파 끓였던 라면의 받침이었던 그을린 전화번호부가 그립고 따뜻했음을 느낄 때가 있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2.12.14 15:04

    kbs에서 인간의 조건이라는 예능하는데 그거 보면서 핸드폰 없애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전화번호부까지는 몰라도 ㅋㅋ 요즘 '기억', '감성' 이런게 핫이슈인듯요.



어느덧 입시도 끝나 이른 시간에도 거리에 교복 입은 학생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됐다. 매일 같이 영하 10도를 오가는 추위라 해도 억압에서 풀려난 젊은 혈기를 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날도 추워 책이나 보자고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근데 책은 구경도 못했다.  책은커녕 자리에 한번 않아 보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밖에서 대기표를 받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 놀랐다. ‘아! 우리나라가 이리도 독서에 열을 올렸던가?’하는 생각에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책은 책이나 도서가 아닌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언뜻 보아하니 취업준비생들인 듯 했다. 책도 다양하다. 토익, 토플, 자격증, 공무원시험 교재 등. 아무튼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도서관을 찾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취업준비생이 도서관을 찾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꼭 책을 보기 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보려 하는 사람보다 ‘취업’을 위해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숫자로만 봐오던 청년실업이 몸소 느껴진다.

예전엔 책이나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을 찾으면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한가했다. 시험기간에는 오히려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서관은 만원이었다. 항상 시험기간인 것 마냥 요즘엔 시립도서관을 보면 항상 만원이다. 닭 울기 전에 일어나 도서관을 가지 않으면 한자리 붙이고 않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MB의 정권의 300만일자리 창출 공약이 무색할 정도다.


현재 우리나라의 청년 실업난은 예년 보다 낮아 졌다고 한다. 청년들이 취업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취업을 포기하고 있어 실업률이 낮아진 것이다.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취업보다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 진학, 공무원 시험, 졸업의 연기 등이 그 예다. 표면적 실업률이 낮아졌다고는 하나 사실적 실업은 예년 보다 높다는 것이 노동지원청의 의견이다. 이러한 취업난은 이공계기피 현상도 한몫을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공직자나 금융권, 대기업의 공채시험은 매년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그러나 이공계열 연구소나 현장직은 점차 경쟁력을 잃어 요즘의 취업난이 무색하게 사람을 구할 수 없어 힘들다고 한다. 더불어 요즘 아이들의 이공계기피현상까지 더 해져 연구현장 직은 점차 사람이 줄고 사무, 공직 즉, 화이트컬러는 수백, 수천 명씩 몰리는 양극화가 더해가고 있다.

이미 이공계 기피는 사회 전반적으로 큰 문제로 다가왔다. 국내대학의 공대는 사회인문계열에 비해 매년 적은수의 신입생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기피의 원인을 보자면 어려운 이공계열의 학업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요즘 어린사람들은 어려운 것은 피하고 이른바 ‘쉽게 쉽게’가 정신이 꽉차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쉽게 포기해버리고 어렵다고 생각되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주변에서 쉽사리 볼 수 있다. 물론 인문계열이 쉽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이공계열의 빠듯한 학업과 다소 어려운 학업과정은 요즘 아이들이 기피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졸업 후 진로를 따지자면 이공계는 더욱 기피된다.


많은 대학생들은 소위 말하는 삼성맨을 꿈꾸거나 멋진 금융계의 화이트 컬러를 원한다. 이공계에서 밤잠 못자고 공부해 지방 연구소보다는 수도권에 위치하고 초봉과 대우부터 다른 사무직을 선호한다. 급변하는 첨단과학시기에 뒤처지면 퇴출되는 이공계보단 철밥통으로 불리는 공무원을 택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실업난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공계열 회사에선 사람을 못 구해서 아우성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실업난의 현주소다. 그렇다고 이공계를 기피한다고 아이들만 붙들고 흔들 것이 아니라 기술직이라면 우습게 보는 현사회 풍토와 이렇게 만드는 어른의 뇌구조부터 바꿔야할 것이다.


written by 선의


'Socie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회의원 연금법 그리고 언론플레이  (2) 2013.01.04
인상  (0) 2013.01.03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  (0) 2012.12.12
개천의 용은 없다  (0) 2012.12.10
나쁜 것도 익숙해진다  (0) 2012.12.03
26년 5.18  (0) 2012.11.27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모두들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내가 초등교육을 받을 시기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국민학생이니?”라고 물어보면 “네?”하고 반문이 돌아온다. 아마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일 테니 되묻는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초등학교로 바뀐 건 1996년 이후다. 일제강점기 일본왕의 칙령으로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인 ‘국민학교’로 불렸는데 광복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민족정기회복차원에서 명칭을 국민에서 초등학교로 변경했다.

물론 나는 그 변경사항 없이 그대로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초등교육을 마쳤다. 내가 졸업한 이후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일지 몰라도 난 어쨌든 초등학교를 다닌 적은 없다.


처음엔 초등학교라는 게 입에 착착 붙질 않아 주구장창 국민학교라고 말하곤 했다. 근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고 익숙해지니 국민학교라는 말이 더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 프로그램만 해도 국민학교라는 단어만 써도 알아서 초등학교로 척척 바꿔주고 있어 일일이 고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컴퓨터도 국민학교라는 단어가 어색한 것이다.


아픈 의미를 지니고 시대 속에 잊혀 진 단어지만 나에겐 그냥 어린 시절이다. 국민학교를 나왔다고 내가 일본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도 아니고 일본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철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풋풋하고 때 묻지 않았던 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그립고 아쉬운 그런 시절. 넉넉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고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꿈으로 가득하던 시절, 그 꿈 많던 시절의 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함께 모여 부루마블 할 때면 부루마블의 주인이 꼭 가장 먼저 시작을 했다. 뭐 주인장 어드밴티지 같은 거였다. 주인 녀석은 알토란같은 나라에 멈춰 그 나라에 호텔을 지었다. 운이 좋을 땐 더블이 걸려 한 턴에 두 개의 나라를 사기도 했다. 물론 그 나라엔 모두 호텔이 올라갔다.


두 번째로 시작한 녀석은 운도 없이 방금 사논 나라에 걸리곤 했다. 호텔이 올라간 나라에 지불 할 돈은 녀석이 가지고 있던 돈의 절반이다.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아 주인 녀석이 사 놓은 나라엔 걸리지 않았지만 카드를 뽑는 곳에 걸렸다. 나라를 갖지 못한 거다.

초기부터 돈이 가장 많은 주인 녀석은 비싼 유럽 쪽 나라를 사기 시작했다. 스톡홀름, 런던, 뉴욕 등 땅 값만 해도 비싼 이 나라에 호텔을 지었다. 


나도 부지런히 나라를 사 나아갔다. 유럽 같은 좋은 땅은 아니어도 동남아 쪽의 싸고 잘 걸릴 만한 나라도 몇 개도 가졌다. 주인 녀석도, 두 번째로 시작한 녀석도 자주 내 나라에 걸리곤 했다. 유럽처럼 몇 백만 원의 통행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소히 돈을 모아가고 있었다.


주사위가 몇 바퀴 돌았을까 나의 말은 주인 녀석의 가장 큰 나라인 유럽 쪽의 한 나라에 서고 만다. 통행료는 무려 400만원. 동남아 쪽 나라와 시작점에서 받는 월급인 20만원을 열심히 모아 유럽 쪽의 한 나라를 산 나는 400만원이라는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녀석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200백만 원만 먼저 받고 나중에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 녀석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도 나는 한 번 더 간곡히 부탁했다. 이번 한번만. 딱 한번만 봐달라고 매달렸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지금껏 열심히 모아 산 유럽 쪽의 한 나라를 은행에 매각했다. 그리고 나온 돈은 고스라니 주인 녀석에게 넘겨줘야했다. 주사위가 던져진 시작부터 열심히 노력해 얻은 꿈같은 나라를 한순간의 잃은 순간이다. 


다음 턴. 주인 녀석은 내가 좀 전에 은행에 매각한 유럽의 나라를 내가 준 돈과 본인의 돈을 합하여 구매했다. 이로써 유럽 쪽 라인은 주인 녀석의 독점을 이뤄졌다. 이 라인을 지나기 위해선 더블이 걸리지 않는 한 반드시 어떤 곳이든 통행료를 지불해야했다. 운이 좋게는 100만 원, 운이 나쁘게는 400~500만 원 까지. 주인 녀석은 가끔 인심을 베푸는 듯 자투리 돈은 깎아 줬다. 물론 나머지 통행료를 내기위해선 내가 한푼 두푼 모아 얻은 나라를 팔아야 만 했다.


나라를 하나 둘씩 잃은 나에게 가장 큰 소득은 출발지점을 돌면 은행에서 나오는 월급 20만원이었다. 그 소득도 카드 뽑는 자리에서 ‘세금을 내시오’ 한마디면 몇 푼 남지 않았다. 그리곤 예전 유럽 라인 한편에 내 나라가 있었음을 기억하며 또 다시 주사위를 굴린다. 출발점의 월급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食)은 생물이 활동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로써 단순 생산 활동에 그치지 않고 만남, 대화시간 등 다양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다는 즐거움은 포기하기 힘든 욕구중 하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행복감을 전해주는 식사를 혼자 한다는 것에 대해 한국은 얼마나 관대할까?


누군가 식사를 한다고 한다면 무의식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누구와?”이다. 식사를 한다고 하면 누군가 함께 먹는 다는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식당을 봐도 혼자서 먹기 보다는 여럿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혼자보단 2인 이상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서일 것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던지자면 ‘혼자 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이다. 질문 자체도 유치하다. 이 질문에 내 대답은 ‘있다’다. 그러나 사실 혼자서 밥을 먹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았다.


대학 시절만 해도 혼자서 밥을 먹는 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다 보니 주변에 항상 사람이 있던 것도 사실이고, 시간을 내기 편하다보니 식사 약속을 잡기도 쉬웠다. 그래서였는지 함께 밥 먹을 이가 없으면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건 일본여행 후였다.


친구와 함께 일본여행 중 가장 어색했던 것이 식당에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친구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온 우리가 다 어색할 정도로 혼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처음엔 어색 그 자체였다. 한편으로는 ‘왜이리들 혼자서 먹을까?’하는 생각도 들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도 사회생활을 하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누군가와 만나 한 끼 식사를 할 시간을 만들기보단 조금씩이지만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정확힌 익숙해졌다.


혼자 먹는 적적함이 익숙해지면 다음으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주변의 관심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독 주변에 관심이 많다. 주변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왔는지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인근 나라인 일본과 비교했을 시 우리나라 주변 관심 수준은 거의 병적으로 높다. 그러니 식당에서 혼자식사를 한다는 건 많은 관심을 끄는 행위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본의 무관심적인 정서보단 지나칠 수도 있는 우리나라의 정 많은 관심이 좋다. 이러한 관심이 때로는 주변의 범죄도 막아주며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주니 말이다.


혼자 생활하며 식사하는 인구가 많은 일본의 경우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잘 되어있다. 식당엔 혼자 먹을 수 있도록 칸막이가 되어 있는 식당도 있으며, 작은 테이블도 잘 갖춰져 있다. 편의점엔 혼자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며 레토르트 제품이 가득하다. 거기에 혼자서 밥 먹는 사람을 위한 비디오까지 있을 정도니 혼자 식사하기에는 일본은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주변관심만 조금 익숙해진다면 혼자 밥 먹기에 좋은 나라다. 웬만한 식당에서 음식은 포장이 가능하고, 배달문화는 세계 최고 수준인지라 주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또 한솥 도시락을 시작으로 맛도 좋고 저렴한 도시락들도 많이 등장해 혼자 식사하기가 좋아 졌다.


혼자 밥 먹는 것은 핵가족과 골든 미스 등 혼자 사는 사람이 늘면서 생긴 사회적인 문화다. 또한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생활에서 누군가와 시간 맞춰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없는 안타까운 우리현실이기도 하다. 아직은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져야할 문화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12.10 06:34



얼마 전 참 구미가 당기는 드라마를 발견했다. 주말드라마인 ‘청담동 앨리스’가 그것인데 현재 3화분밖엔 방영되지 않았지만 시작부터 아주 흥미로웠다. 특히 여자의 허영심과 된장녀로 화두를 던져 신랄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아주 신선했다.

줄거리는 대략 신데렐라 스토리다. ‘노력이 나를 만든다’라는 신조를 굳게 믿고 사는 한세경(문근영 분)과 세계적인 명품유통회사 아르테미스의 최연소 한국회장인 차승조(박시후 분),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일반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기엔 이 드라마는 너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노력형 긍정녀인 세경은 온갖 노력으로 취업에 모든 것을 내건다. 하지만 사회에서 돌아오는 것은 처음부터 가지지 못한 부에 대한 차별이다. 이에 반해 세경보다 못한 고등학교 동창인 윤주(소이현 분)는 남자 잘 만나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사모님이 됐다. 

드라마 속 지금까지의 결론은 구질구질 노력보단 ‘인생은 한방이다’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말엔 남자인 나로서는 동감할 수 없다. 왜? 이젠 한방도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이 있다. 이젠 이 말도 틀렸다. 예전 소 팔아 대학 다니던 시절엔 가난한 집 장남 공부시켜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집안도 살아나고 모든 것이 해결됐다.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다. 법조인이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로스쿨에 가야한다. 로스쿨 중 등록금 가장 싼 곳이 975만원이다. 거기에 이천만원이 넘는 로스쿨도 25곳 중에서 12곳이나 된다. 이천만원. 강남의 30~40평되는 아파트 사는 사람이면 모를까 부엌하나, 방 한 칸에 온가족 모여 사는 집에선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학자금 대출에 손을 벌린다. 그리곤 학기동안 잠 아끼며 아르바이트를 한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학비를 위해서. 근데 최저임금 오천 원도 안 되는 나라에서 과연 한 학기 동안 다음 학기 학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자기 용돈이나 벌면 다행이다.


학비를 마련 못한 학생은 휴학을 한다. 휴학을 하니 졸업은 늦어지고, 졸업이 늦어지니 취업도 늦어진다.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은 점점 이자가 불어가고 한번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청춘은 이미 신용불량자가 되어있다. 이젠 개천에서 용 따위는 나지 않는다.


한방의 대명사인 로또도 다를 바 없다. 523회 로또 1등 당첨자는 총 7명. 이들에게 돌아간 1등 당첨금은 17억 8026만원. 17억 가지고는 강남에 아파트 하나 못산다. 한방이라고 말하기에는 집 한 채 못 사지만 그래도 평생 월급쟁이 생활로는 이 돈도 못 모을 거 같으니 그 운수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 평생 놀고먹을 만한 한방도, 방법도 이제는 없다. 드래곤 볼을 모아 소원을 빌지 않는 한 없다.


“한방을 노리지마라.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라. 그럼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다” 어느 책의 이야기처럼 성실히 노력하면 성공할 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근데 지금 현실에서 노력은 최선의 선택도 성공의 지름길도 아니다. 가진 것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발악이다. 공든 탑이 안 무너질 것 같은가? 성실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공든 탑 따윈 돈 쳐 바른 대기업 굴삭기 한방이면 끝이다. 지금 세상의 노력은 운보다 못한 존재고 노력만으론 아무것도 안 되는 시대다.


그러고 보면 ‘청담동 앨리스’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지 않다. 어떤 짓을 하던 노력만으로 주인공은 성공을 이룰 테니까. 오히려 지금 사는 세상이 더 드라마 같다.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같은 시나리오의 막장 드라마.


written by 선의


'Socie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상  (0) 2013.01.03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  (0) 2012.12.12
개천의 용은 없다  (0) 2012.12.10
나쁜 것도 익숙해진다  (0) 2012.12.03
26년 5.18  (0) 2012.11.27
남자는 집이다  (0) 2012.10.22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집에 왜왔니] 1. 거문도 고도민박.


거문도는 200여만평의 서도와 그 절반정도 크기의 동도, 가운데 약 33만평의 고도, 이렇게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개의 섬이 둥글게 모여 외부의 거친 파도와 풍랑을 막아주고 있어 예부터 천혜의 항만으로 불리워진 곳이다. 이 세 섬 가운데에 100만평의 바다가 펼쳐져 있고, 남북으로 뱃길이 트여있다. 


한반도 뿐만 아니라 오도열도, 대마도와 매우 가깝고, 홍콩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라 근대 열강국들이 호시탐탐 노렸던 섬이다. 실제로 영국이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약 3년간 이곳을 불법 점거한 사건은, 거문도가 지정학적, 군사학적으로 매우 긴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군이 떠난 직후에 고종황제가 거문도에 거문진을 설치하고 수군 주둔을 위한 관청을 세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 거문도의 전경 


일제가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부터다. 일제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기 무섭게 1904년 서도의 수월산에 일본인에 의해 등대가 설치되었고, 일본해군이 주둔하면서 해저통신시설을 갖추어졌다. 그리고 1905년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일제 민간인이 본격적으로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906년 일본인 우편전신소가, 1910년에는 순사주재소가, 1914년에는 일본인 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특히 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일본인의 거문도 이주가 얼마나 활발했는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918년 일본인 어업조합 설립, 1923년 거문항 세관출장소 건립에 이어 1920년대부터는 세 섬 중 고도에 아예 일본인 집단촌이 대거 형성되면서 그들의 신사까지 세워졌다. 거문도는 해방직전까지 일제의 주요 군사요충지로서, 그리고 어업전진기지로서 철저하게 기능했다. 고도 선착장에 내려 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일본식 근대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일본식 주택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고도의 모습

         

               ▲ 상단 왼쪽부터 1. 거문도 등대 2. 일제 신사터 3-4. 영국군 묘소 


고도민박은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층은 부부가 사는 살림집으로, 2층은 민박용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2층의 경우, 일제시기에 지어진 건축형태와 구조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은 1925년에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식 근대주택이다. 집주인의 아버지 생전 말씀에 의하면,  이 집은 어업 무역상으로 활약하던 일본 여성 나가기치에 의해 지어졌다. 집에 쓰인 모든 목재는 일본에서 공수해 온 것으로, 일체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결구방식을 통해 세워졌다. 그녀의 부친은 일제의 고위급 장성이었으며, 그녀의 어업무역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후문에 따르면, 그 여성의 집안은 거문도, 여수, 목포, 부산 등을 오가며 어업 중개무역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여 한 때 전라남도 10대 갑부에 손꼽히기도 했다. 현재 집주인의 조부가 당시 그 무역상의 서기로 활동하면서 어업중개 무역을 익혀 나아갔고, 해방이 되고 나서 자연스레 이 집을 인수받았다. 건물 면적은 총 88평으로, 일제강점기 상류층 일본인 가옥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거문도 고도민박 외관의 모습(현재)


              ▲ 거문도 고도민박 과거의 모습(1960년대 추정):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는 집이 오늘날의 고도민박이다. 



가파른 박달나무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면 마치 일본 본토의 전통가옥에 방문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운데 큰 방 2개를 중심으로 하여 총 11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간 곳곳에 일본문화의 건축양식과 소품들이 비치되어 있다. 모든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다. 




              ▲ 거문도 고도민박 내부 전경


거실 전면에 도코노마가 갖추어져 있다. 도코노마는 집안의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벽 쪽으로 공간이 움푹 들어가 있고, 바닥이 조금 높게 솟아있다. 도코노마 한 가운데에는 향나무 기둥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면 갖가지 동물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단과 불단을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진귀한 족자나 병풍, 도자, 다기와 같은 소품들을 비치해두는데, 이 집이 경우 집주인의 모친이 사용하던 반닫이와 일본식 망와와 화로를 장식용품으로 갖추어 두었다. 


일본식 특유의 천정 밑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문양장식이 보인다. 나무결 마디마디 사이가 매우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식기능을 하면서도 방과 방 사이의 통풍을 원활히 해 주는 기능을 한다. 이 문양 장식의 수와 종류, 정교함의 수준이 높을 수록 그 집의 위상을 높이 알아주는데, 이 집 안에 벽장과 천정 주변으로 수많은 목재 문양장식이 있는 것을 미루어볼 때 과거 중개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한 여성 무역상의 기운이 느껴진다. 


미닫이 형식의 문도 볼거리 중 하나다. 쇼지, 후스마와 같은 장지문, 그리고 일본식 유리 장식문이 방 곳곳에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각 공간의 기능이 나뉘고, 문을 열면 집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통하는 일본인 특유의 공간분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 오시이레 즉, 붙박이 벽장이 보인다. 지진이 잦은 일본 본토의 특성상 가구보다는 물건의 흔들림을 최소화할 수 있는 붙박이 벽장을 선호한 그들의 생활양식이 담겨있다. 



              ▲ 거문도 고도민박 내부 전경(천정, 천정장식, 붙박이 벽장, 화로, 망와, 후스마 등) 


이 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주 집단촌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수탈사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 곳으로, 일제강점사의 산 교과서와 다름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은 실제 사람들이 이 곳에 묵어가며 직접 일제역사의 산실을 체험하고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박제된 문화재'로서가 아닌 이 집이 갖고 있는 일본문화를 방문객이 직접 만져보고 느껴볼 수 있는 장인 것이다. 





집주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중 가장 가슴에 남았던 것은 이 집의 역사적 가치라든지 건축적 특징에 관한 것보다도, 그가 어렸을 적 이 집에서 겪었던 아주 소소하고도 소중한 추억거리였다. 이야기 끝물에 넌지시 물어봤다. "어렸을 적에 이 집에서 살던 생각은 안 나세요?".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청소기를 가만히 내려놓으시고는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신다. 그리고는 조용히 웃으시면서 말을 이어간다. 


"아...예전에 국민학교다닐 때 말야. 학교 끝나면 내가 2층에서 그렇게 숨바꼭질을 했단 말야. 친구들 데려 와서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노는 거야.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 여기저기 방문이 많잖아. 저기 숨었따가 문을 살짝 열고 또 다른 데로 얼른 도망가서 숨고 말야. 아...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만 몇 번을 반복하신다. 절로 흥이 나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설명을 해주신다. '이 불편한 거 왜 안 바꾸고 사냐' 이래저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민박 손님들도 제법 많다고 한다. 아예 집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손님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물론이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2층만은 고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말씀하신다. 1층은 살림집으로 바꿔놓고, 유독 2층의 모습만은 끝까지 지키고, 매일같이 쓸고 닦는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손님들의 '특별한 민박체험', 그것보다는 할아버지의 '특별한 숨바꼭질의 추억과 애정'이 담겨 있는 곳이니까.  



[숙박 및 교통정보는 거문도 고도민박 홈페이지 http://www.godoinn.com/ 참조] 


Written by 선장

Photo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전버튼 1 2 3 4 5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