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는 보지 않는다. 날씨 정도만 확인한다. 그 시간에 무한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무한도전은 무념무상으로 웃게 해주고, 음악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1. 하루에 세 번 이상은 클라라 하스킬의 모차르트 피협 19번을 듣는다. 신은 인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2. 방해받지 않는 시간, 빌헬름 박하우스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 실황 연주를 듣는다. 인간의 마음비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경건하다는 말 밖에는.

 

3. 며칠 사이 퇴근길, 모차르트 피협 22번을 넘보고 있다. 게자 안다의 지휘 겸 연주 음반을 듣는다. 인간의 참되고 신성한 노력의 힘을 맛볼 수 있다. 꾸준하다는 말 밖에는.

 

 

자료를 찾던 중, 세 사람의 인연을 알게 되었다.

 

1. 게자 안다는 1953년부터 1958년까지 클라라 하스킬과 듀오 피아노 연주를 했고, 이때 그녀로부터 모차르트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고 평생을 모차르트 연구에 매진한다. 결국 그는 모차르트 피협 전곡 녹음이라는 대업을 최초로 달성한 자가 된다.

 

2. 안다가 11살 되던 해, 그는 빌헬름 박하우스를 만나 연주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연주를 들은 박하우스는 주저없이 그가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특별 장학금을 받고 연주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알선해준다.

 

3. 그곳에서 안다는 피아노를 넘어서 음악의 구도, 나아가 인생철학의 초석을 닦게 된다.

 

 

 

 

세 사람은 모두 음악 앞에서 초연했고, 삶 앞에서 겸연쩍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1. 게자 안다는 농부들을 존경했다. 농부들의 추수를 돕거나 나무 베는 일에 즐겁게 동참했다. 그들에게 밭을 가는 법을 배우고, 어떻게 들보를 만드는지 물었다.

 

2. 빌헬름 박하우스의 집에는 매우 슬퍼 보이는 광부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그림에 대한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일이 그보다는 힘들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이 그녀의 연주를 칭송하면, 클라라 하스킬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청소부가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피아노 연주 밖에 없어요"

 

 

 

 

세 사람은 죽음 마저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숭고했다.

 

1. 1960년 겨울,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하스킬은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와의 협연을 대성황리에 마쳤다. 같은 달 6일, 하스킬은 다음 협연을 위해 벨기에 브뤼셀 역에 도착했다. 지독한 불운이 찾아왔다. 기차에서 내리던 중 계단에서 크게 넘어졌고,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식불명에서 잠시 깨어난 그녀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 연주는 어렵겠다. 그뤼미오씨에게 미안하다고 꼭 전해줘." 그리고 숨을 거두기 직전 한 마디를 남겼다. "그래도 손가락은 멀쩡하잖니"

 

2. 1969년 6월 28일, 박하우스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베토벤 18번을 연주하는 도중, 관객들에게 “잠시 쉬고 싶습니다”라는 짧은 사과의 인사를 하고 잠시 연주를 멈춘다. 심장발작 증세가 온 것이다. 모든 악장을 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의사는 연주를 중단하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다시 관객 앞으로 나아가 베토벤 대신 슈베르트 즉흥곡 D.935-2로 연주회를 마쳤다. 곧장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1주일 후 그는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3. 1974년, 안다는 식도암 판정을 받았다. 런던에서 엄청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서는 연주를 계속했다. 놀랍게도 다음 해에 병이 크게 완화되었고, 그의 실력은 더욱 성장했다. 안다는 연주 여행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오중주 “송어”를 연주한지 일주일 후, 런던에서 병세에 대한 낙관적인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취리히의 집에서 출혈로 사망했다. 1976년 6월 13일의 일이다.

 

그들의 무한도전은 나를 무념무상으로 웃게 해주고, 그들의 음악은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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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 하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인간 모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익숙해졌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인지라 알바를 하는 동안 너무도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 익숙해져 갔고, 그중 가장 ‘익숙해졌다.’ 혹은 ‘요령이 생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설거지였다.


누군가 “설거지가 힘들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설거지야 말로 지구상 남아있는 그 어떤 일보다 귀찮고 짜증남과 함께 엄청 힘든 일이라 자부할 수 있다. 아무튼 설거지는 내가 알바 하는 동안 나를 가장 괴롭힌 일중 하나였다.
내가 일하는 곳은 조리실이 작아 식기세척기가 없다. 그래서 음식과 함께 나갔던 그릇들은 고스라니 사람 손을 거쳐 설거지를 해야 한다. 그러니 바쁜 날이면 일하는 내내 싱크대 앞에 보낼 때도 있다.


 

설거지가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만 이야기 하자면 싱크대의 높이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방 기구를 설계할 때는 대부분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에 맞춰 제작한다. 내가 일했던 주방도 다르지 않은데 177cm인 내가 싱크대 앞에 설 경우 싱크대는 내 골반 정도의 높이밖엔 안 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구부정하게 되고 이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고 있을 경우 집에서는 기어 다니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으로 들고 설거지를 하면 옷이 다 젖기 태반이었고, 무거운 철판들을 몇 십 개를 들고 닦다보면 한쪽 팔이 꼭 떨어져나갈 것 만치 아팠다.


설거지 더미만 보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던 나였지만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자 나름의 요령이 생겼고, 한참을 구부정하게 있어도 견딜 만 했다. 내 허리는 구부정한 자세에 익숙해져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해도 집에서 기어 다니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나중엔 설거지 자체가 익숙해진 나머지 아무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가 편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이가 갈리도록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도 익숙해지자 한편으로는 마음편안 일이 되었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게 마련이고 익숙해진다. 단지 익숙해지고 적응하기 전에 ‘포기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게 될 뿐이고, 사회는 그것으로 한 사람의 근성이나 책임감을 말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익숙함 둘.
설거지의 고됨이 익숙해질 무렵 나의 알바생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친구가 사장인 곳에서 일한다는 것이 이래저래 불편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마음 한편이 편했다. 한마디로 모든 게 익숙해졌다.

 

익숙함은 지금 처한 상황이나 환경 그리고 내 앞의 일들에 대한 것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익숙함도 존재한다. 나와 같이 일을 했던 아이는 나보다 3살 어린 남자였는데 이곳에서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됐다. 처음에야 서로 잘 알지 못하기에 조심스러움이 많았다.

 

어리다고 함부로 부리지도 않았고, 시킬 일이 있다면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나는 그 아이에게 점점 익숙해 졌고, 그 아이도 내가 익숙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소홀해졌다.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그 아이를 시키게 됐고, 말투는 어느새 명령조로 바뀌었다. 그 아이도 가끔 내게 짜증을 내기도 했고, 정색을 하기도 했다. 서로 익숙해졌기에 소홀해진 것이다.

 

사장인 친구와 나도 서로가 익숙해졌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관계였고, 지금은 같이 일하는 동료였다. 동료로서 우리는 익숙해졌고, 역시나 소홀해졌다.
정중히 해오던 부탁은 어느새 반강제가 됐고, 친구가 못나오는 날에는 당연히 내가 대신 일하는 게 됐다. 어느새 내가 친구를 도와서 알바를 하는 것은 원래 그랬다는 듯이 당연해졌다.  나 역시 친구의 가게라 해서 조금씩 늦는 것이 태반이었고, 말투는 까칠함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익숙해 졌고, 서로는 서로에게 익숙해진 만큼 소홀해져 갔다.


어쩌면 ‘익숙해진다’ 것의 또 다른 말은 ‘소홀해진다’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은 소홀함을 부른다. 그리고 그 익숙함에서 온 소홀함은 가까운 이마저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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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17 13:07

    도망가~~~~


내가 일하는 곳은 보쌈을 메인메뉴로 하는 퓨전 주점이다. 즉, 술을 파는 것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다. 그렇다보니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의 취한 모습을 보고는 한다. 사람마다 성격이 각각 다르듯이 사람마다 취한 모습도 정말 다양한데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가장 대중적 유형은 고성방가형이다. 취기가 오른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 유형으로 잔이 돌면 돌수록 목소리가 커진다. 술도 먹고 귀도 함께 먹은 건지 점차 대화의 데시벨은 높아져 아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한 테이블의 목소리가 커지니 조용히 대화하던 다른 테이블은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니 자연스레 다른 손님들도 목소리가 커진다. 이는 연쇄반응처럼 조금씩 퍼져 나중엔 술 마시는 사람 모두가 소리를 지르는 상황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까지 오면 혹여 옆에 있는 손님과 싸움이라도 날까 조마조마하다. 



다음으로 호랑나비형. 사람이라면 술을 마시게 되면 자연스레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심하게 비틀거리다 못해 제대로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잠시 졸았는지 뒤로 넘어가는 사람, 화장실 갔다 와 의자에 앉으려다 비틀거려 넘어지는 사람, 일어나다 넘어지는 사람 등 아주 다양하다. 그나마 넘어져도 본인의 테이블에 피해를 주면 상관없지만 넘어지는 사람 대부분이 주변 다른 테이블에 피해를 주곤 한다. 이 역시 손님 간 싸움이 날까 조마조마하다. 더불어 넘어진 손님을 보면 일으켜 줘야하는지 쪽팔릴지도 모르니 모른 척 해야 할지 참 애매하다. 이 두 가지 유형은 가장 보편적인 유형으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취한 모든 손님이 꼭 다른 손님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데 파괴지왕형의 경우 일하는 직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 파괴지왕형은 말 그대로 테이블에 놓여있는 기물을 다 파괴한다. 아주 파괴왕이 따로 없다. 술잔, 술병, 메뉴판, 수저통 그들에겐 자비란 없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파괴된 기물을 채우고 정리하는 직원만 죽어난다. 병이 깨지면 마녀처럼 빗자루를 들고 나타나 영혼 없이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를 읊어 주며 비질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종이나 노예다. 그나마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손님들의 경우 웃으며 치울 수 있지만 너무도 태연히 “잔하나 더 주세요!”, “여기 좀 치워주세요!”하는 사람을 보면 가져다주던 잔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건 보통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많은 힘이 든다.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대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술자리는 술잔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세상이 열리고는 하는데 자기들만의 정치철학, 사회비판을 논하고는 한다. 이러한 경우를 100분토론형, 또는 끝장토론형으로 분류하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청와대, 여야당 대변인이 따로 없다. 


주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자기가 추구하는 정치색깔을 들어내는데 간혹 서로의 의견의 맞지 않을 경우 과열된 토론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자리인지라 서로 뜻이 맞아 함께 현 정부를 욕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막을 내리고는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정치나 사회가 아닌 철학이나 문학을 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로 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한번은 온갖 진상을 다부리는 손님들이 김수영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데, 대화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하는 행동은 그냥 개차반이니 김수영이 웬 말인가 싶었다.


술은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는데 묘한 힘이 있다. 그리고 술은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 그래서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 평소 하지 못한 말들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취중진담형이 바로 그 경우다. 

취중진담형의 경우 남여 단둘이 온 손님들 사이에서 많이 보이는 유형인데 어떤 진솔한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꼭 한명이 운다. 대게 여자가 우는 경우가 많은데 분위기가 좋다가도 돌아보면 여자가 펑펑 울고 있다. 울음을 그치고 다시 분위기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명이 자리를 뜨고 다른 한명이 쫓아가는 상황으로 마무리되고는 한다. 그리고 가게 밖에서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저 우리는 ‘싸웠나?’하고 유추할 뿐이다. 그렇게 울고 짜고 한 손님들이 다시 가게에 찾는 일은 거의 없다. 아마도 쪽팔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누구나 술에 취한다. 술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술에 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지, 술을 절제 할 수 있는 사람과 절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절제에 실패한 사람은 잠시 자기 자신을 잃어 행동하고 주변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취했다고 말한다. 


주변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술을 마셔야할까 싶지만 한편으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빡빡한 세상에서 술마저도 없다면 어찌 살까 싶으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 심정이다. 


어쩌면 우리가 술에 취하는 것도 지독히도 빡빡한 생활 속에서 잠시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한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아! 그래도 만취는 주변을 힘들게 하니 술은 적당히가 좋은 것 같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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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9 02:02

 

 

엄마에게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우리 집은 방 한 칸, 부엌 하나에 화장실도 딸리지 않은 작은 집이었다. 주인집을 중심으로 세 가구 정도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었는데 우리 것은 아니었지만 마당에 텃밭도 있는 그런 집이었다.
당시 엄마는 돈벌이가 썩 좋지 않았던 아빠를 대신에 근처의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아침이면 가족들의 아침을 다 준비하고 출근을 하셨고, 퇴근 후에는 쉬지도 못하고 저녁을 준비하셨다. 그렇게도 엄마를 부지런히 살게 했던 것은 작은 전셋집이라도 얻기 위해서였고, 그것은 엄마의 작은 바람이기도 했다.
나는 어려 전세와 월세의 차이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살면서 ‘누구누구네 집에 세 들어산다.’라는 말을 종종 듣고는 했는데 이 말이 어렸지만 우리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엄마의 바람은 10년이 지나고서야 이뤄졌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근처의 작은 빌라 3층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엄마의 바람대로 매달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전셋집이었다. 작지만 내방도 생겼고,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책상도 생겼다. 우리 가족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있었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부엌도 있었다. 주인집 아들놈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세 들어 산다.’라는 말을 듣지도 않았다. 왜 그리도 엄마가 “전셋집 전셋집”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엄마의 첫 전셋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집 주변으로 재개발이 결정되면서 다시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집을 얻는 건 쉽지 않았다. 재개발 소식이 동네에 퍼지자 집값은 물론 전셋값도 올랐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집과 비슷한 크기의 집을 구하기에는 보증금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어쩔 수 없이 엄마가 택한 곳은 조금 떨어진 한 빌라의 반지하였다.


반지하였지만 기존의 집과 크기는 비슷했고 건물도 그나마 깨끗한 편이었다. 그러나 반지하는 불편한 점이 참 많았다. 밖에서 집안이 보일까 쉽사리 창문을 열지 못했고, 창문을 연다 해도 창문이 땅에 가깝게 있다 보니 흙먼지가 그대로 창문을 넘어 들어오곤 했다. 그러니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한 뼘 이상 여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베란다도 없어 빨래는 항상 거실에서 말려야했는데 이것도 햇빛이 들어오는 때를 놓치면 잘 마르지 않아 한참을 널어놓아야했다. 비가 오는 날엔 방바닥이 눅눅해져 한여름에도 보일러를 틀어야 할 때도 있었는데 날도 더운데 보일러까지 트니 찜질방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도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엄마가 이집을 선택했던 이유는 예전처럼 전셋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지하였지만 그래도 전세는 전세였다. 그 점이 조금은 엄마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는지 이 집에서 엄마는 오랫동안 살았고 덕분에 나도 전학 없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쳐 대학까지 졸업하게 되었다.
엄마는 원했던 전셋집에 살게 되었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해 첫 번째 직장을 가질 때 까지도 단 한번 쉼 없이 계속 일을 하셨다. 조금은 쉬엄쉬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엄마는 부단히도 열심히 일을 하셨다. 엄마가 일을 멈출 수 없던 것은 전세도 결국은 ‘내 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집도 언제 가는 이사를 가야 한다.”며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내 집’을 갖기 위해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것은 엄마의 또 다른 바람이었다.


내가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둘 때쯤 엄마는 오랫동안 살았던 반지하에서 조금은 오래된 빌라의 1층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무엇이 부족했는지 엄마는 결국 ‘내 집’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는 반지하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셨다.
더 이상 비가와도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됐고, 창문을 활짝 열어도 밖에서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말릴 수도 있었고, 세탁기를 베란다에 놓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세 번째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고,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

 

엄마에게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전셋집을 얻는 것, 그리고 아직 이루지 못한 ‘내 집’을 갖는 것. 어쩌면 처음부터 엄마의 바람은 전셋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사는 솜씨 없었던 엄마에게 ‘내 집’이란 것은 너무도 큰 바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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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를 시작했다직장이 아닌 알바를 선택하게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생계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서였다아무래도 직장을 잡게 되면 본의 아니게 많은 시간을 직장에 쏟게 된다그 점이 싫었다그나마 알바는 시간조절도 자유로운 편이고 책임감면에서도 자유로울 테니 직장보단 나을 거 같았다또 한 가지는 친구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녀석이 작년에 주점을 오픈했다급하게 일손이 필요했고 잠시 가게 좀 도와 달라 부탁을 해왔다모르는 곳에 알바를 하는 것보단 그래도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그 제안을 수락했고그 때부터 생계를 위한 알바가 시작됐다.


알바를 시작한지 수일이 지나자 나는 특이한 질문을 받고는 했다사장이 친구인 관계로 가게를 찾은 사장 지인들은 대부분 나와 동갑내기 친구들이었다그 지인들은 나를 한번 보고는 사장 녀석에게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고친구는 내 친군데내가 급해서 도와달라고 했어라고 설명하곤 했다친구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설명을 들은 이들은 가끔 나에게 특이한 질문을 던지 곤 했다. “여기서만 일하세요?”라는.


친구 녀석이 옆에 있었다면 나를 대신해 직장잡고 일할 나이에 이곳에서 왜 알바를 하고 있는지 전후사정을 설명해주고는 했지만 혼자 이 질문을 받을 때면 내입으로 설명하기 민망할 때가 많았다.


한번은 비슷한 상황에서 이 일만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그래서 왜 이 일만하면 안돼요?”라고 되물어봤다대답하기 귀찮아서라기 보단 나도 정말 궁금했다왜 이런 이상한 뉘앙스의 질문을 자꾸 받는지 말이다돌아온 대답은 그게 아니고 이 일만 할 것 같지 않아서요라는 시원찮은 답이었다지금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지만 사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왜 그 나이 먹고도 아직 알바를 하세요?’, ‘어디부족하세요?’ 뭐 이런 거 아니었을까?


알바를 한 기간이 지날수록 나를 알아보는 이가 늘면서 이 요상한 질문들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종종 비슷한 질문을 받곤 한다그때면 그냥 웃으며 제가 잉여라서 친구가 일 시켜 주는 거예요라고 해버리고 만다그 편이 다음질문도 없고 편했다.


어쩌면 나이를 먹고 알바를 한다는 건남들에겐 조금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되는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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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의 클래식은 도대체 왜 듣는거야?"


친구들이 종종 내게 묻는 질문이다. 묻는 투로 봐서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거의 질타에 가깝다. '그 졸음오는 재미없는 음악을 들으면 니가 잘난 것처럼 보여서 그런거야?'라는 비아냥도 꽤 담겨있는 것 같다. 아예 없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거다. 실제로 클래식을 들어서 주변으로부터 덕 아닌 덕을 본 적도 몇 번 있으니 그것도 아주 조금 첨가되었다고 하면 맞겠다. 재즈 클래식도 아닌 주로 18-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을 선호하는 까닭에 늙은이라는 소리도 적지 않게 들었다. 노친네라고 놀려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남들 홍대 클럽가서 최신 음악에 흔들대며 젊음을 만끽할 시기에, 지산 롹 페스티벌 가서 두 손 치켜 올려들고 반 정신나간 놈처럼 헤드빙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그 시덥지 않은 클래식이라니! 그럼에도 나는 클래식을 듣는다. 그것도 아주 깊고 진지하게. 


이유를 뭉뚱그려 말하자면 이렇다.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삼십대 사이에서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을 공부하는 극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면 우리 세대 전체를 통틀어 클래식을 듣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내 주변만 돌아봐도 클래식을 듣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여기서 '그냥 그게 그건가 보다'하고 듣는 사람은 감상자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능동적 감상자가 아니라 '그냥 틀어서 나오면 좋은 건가보다' 하고 한 귀로 흘려 보내는 수동적인 부류이기 때문이다. 마치 맛좋은 레스토랑에 와서 정말 최고급의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도 '이 피자나 저 피자나 그게 그거네' 생각하면서 막상 나갈 때는 동료에게 '야~여기 피자맛 기가 막히네' 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애호의 이유가 된다. 한번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온통 인스턴트식 정원으로 뒤덮인 인공 숲 사이를 매일같이 거닐다 어느날 우연히 나무와 나무 사이에 빼꼼 열려 있는 낡아빠진 문을 발견한 거다. 조심스레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이 곳은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신비의 숲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사람들을 단숨에 휘어잡을 만한 화려한 나무나 꽃은 없다. 대신 수백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고고한 고목나무들이 장대비처럼 내려앉아 마법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이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하다. 신선한 공기가 몸의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사색에 빠지기 좋은 나만의 아지트인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나는 남들과 즐기는 시간보다 나 혼자 보내는 시간에 더 애정을 두었다. 요즘 것에 관한 그 무언가에 대해 주변의 누군가와 공유하고 함께 즐기기보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된 먼 누군가와 단독으로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신났고 가치있게 느껴졌다. 저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책과 음악. 오래된 것일수록 더 끌렸다. 시류를 따라가는 것들은 최대한 배제했다. 최대한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서 그 속에서 스스로 사색에 잠겨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그 가운데 클래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의 분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찮은 평민이었기에 10대의 클래식 감상에서 그다지 특별한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저 들어서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것들을 택해서 집중적으로 든는 것, 그것 뿐이었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요한 슈트라우스, 드보르작과 같은 누구라도 들어서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법한 유명한 작곡가들 위주로 감상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듣는다는 의미는 학습이 전제된 의도적인 측면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저 좋은 것을 습관적으로 곁에 두는 게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내가 택한 클래식을 제외한 그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저 매일같이 똑같은 테이프를 돌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 그것으로 족했다. 이러한 나만의 습성은 오늘날 클래식에 더욱더 몰입하게 되는데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런 나만의 습성은 초등학교 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것. 연주는 감상만큼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바이올린은 재미있었지만, 피아노는 최악이었다.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도 너무 기계적인데다가 억지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가면서 연습한다는 건 정말 구속 중의 구속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런 경험과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나의 밑바탕, 머릿 속 심연의 바다에 굵직한 음악적 지층을 형성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바이올린 합주부 생활은 클래식이 안겨주는 엄청난 스케일을 잘 빨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바이올린 교사가 쉬는 시간이면 기가 막히게 연주했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내 인생에서 클래식만 들은 건 결코 아니었다. 클래식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수많은 음악의 산맥을 넘나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추장스럽고, 그냥 여기저기 장르에 기웃기웃대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클래식 다음으로 접한 것은 팝, 그 중에서도 비틀즈였다. 똘기충만한 비틀즈의 음악은 다른 장르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가교 역할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실험한 갖가지 형식들이 어떤 음악도 거부감 없이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미 은퇴한지 한참 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재주목했고 그들이 남기고 떠난 모든 앨범을 수집했다. 교실이데아에 젖어있던 나는 곧 롹의 세계에 급격히 빠져들었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무섭게 롹커가 되었다. 군입대 전까지 나는 오직 롹만 들었다. 가요를 듣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완전 사기라고 봐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풍류에 그쳤다. 놀고 마시고 즐길 때 불러대는 니나노의 느낌 정도로 가요감상의 레벨을 맞춰 두었다. 


힙합, 트립합, 일렉트로닉 등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적지 않은 분야를 건드렸다. 그런데 그것들 역시 대중의 귀에 익숙한 범위를 훨씬 넘어선 그 이면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투팍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누가 손수 투팍의 앨범을 차곡차곡 모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와 비트를 즐길 생각을 하겠나. 어떤 면에서 보면 클래식을 듣는 이유나 롹을 듣는 이유나 힙합을 듣는 이유나 다 비슷비슷한 맥락이다. 남들이 최대한 기웃대지 않는 영역에서 나는 최대한 나 자신에게 신성성을 안겨줄 수 있는 대상을 찾고 그것을 신봉하고 경외를 표했다. 


클래식에서 나의 줄기는 피아노다. 피아노 소나타, 변주곡, 야상곡에서부터 이중주, 삼중주까지 가릴 것 없이 다 듣는다. 그 중에서도 단연 피아노협주곡을 가장 좋아한다. 오케스트라의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홀로 당당하게 버티고 앉아 호탕하게 건반을 쓸어내리는 비르투오소의 모습이 가장 나를 사로잡는 포인트다. 똑같은 악보를 놓고 쳐도 각자가 지닌 성향에 따라 곡을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똑같은 바둑판에서 흰돌, 검은돌이 격돌하는 데에서도 수십만개의 경우의 수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무궁무진한 세계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곳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나만의 안식처다. 


당돌한 꿈도 꿔본다. 이렇게 10년 정도 듣다보면 정말 클래식 애호가라는 명함도 부끄럽지 않게 내밀 수 있을 날이 오겠지. 이렇게 30년 정도 피아노를 치다보면 나 역시 언젠가 동네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깜냥은 되겠지. 요즘 작품에 자꾸 동기화가 되어 나도 모르게 자꾸 볼륨을 높이다 보니 청각에 무리가 온 것 같다. 당분간 이어폰을 자제하고 오디오로 감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도박보다 무서운 중독이다.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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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 떠오릅니다. 한 친구가 급하게 교실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아이들에게 소리치더군요. "야! 이○○ 죽었대!!!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었대!!!" 학급 전체가 술렁였습니다. 단순히 죽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부검결과 판정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이야기 한 이○○란 아이(줄여서 L)는 중학교 3년 동안 단 한번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초특급 울트라 에이스 영재'였습니다.  

 

L은 중학교 졸업 직후에 우리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인도로 유학을 갔습니다. 아버지가 인도에서 사업을 크게 확장하시면서 고등학교도 그 쪽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L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번뜩 떠오르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었습니다.

 

농구시험.

 

총 열 번의 슛 가운데 얼마나 많은 공을 넣는가에 따라 체력장의 점수가 갈리는 체육시험이었습니다. 뭐 사실 당시의 청소년들에게 그 농구시험이라는 것은 미래를 결정하는 어떤 중대한 사건이라든지 남자의 자존심을 건 마지막 승부 같은 그런 비장한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설프게 본 것들은 많아서 만화 주인공의 슛폼을 따라한다던지,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슛을 해서 반 아이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든지, 별 생각없이 던지다가 단 한 점도 성공을 못한다든지 하는 별의별 녀석들이 다 있었죠. 운동신경이 둔한 저로서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러나 L은 달랐습니다. 농구시험마저도 너무나 진지했죠.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몸집, 검은 뿔테 안경 사이에 잔뜩 구겨진 신경질적인 미간, 꽉 다문 이빨에서 '반드시 다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목숨을 건 사투의지가 활활활 느껴졌습니다. 처음 던진 공은 실패. 공이 링을 맞고 튕겨 나가자 L은 머릿칼을 움켜 쥐고 몸부림을 치더군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던졌습니다. 이번엔 다행히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다음 슛은 실패.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몇 번 반복하니 10개의 슛 중 6개의 공이 성공했습니다. 그 친구는 얼굴부터 목까지 새빨개져서는 물을 마신다는 핑계로 황급히 시험장을 빠져나가더군요. 성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거죠. 일등만을 줄곧 외쳐오던 L에게 있어서는.

 

늘 그 친구의 삶은 그랬던거죠. 남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매점으로 달려가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먹었지만, 이 녀석은 전 수업의 과목을 복습하거나 아니면 뒤에 이어질 수업의 과목을 예습하는데 열중했습니다. 늘 맨 앞자리를 떠날 줄 몰랐죠. 그의 책상 주변을 지나갈 때면 뭐라고 딱히 집어 말할 수는 없는 무언가 불편한 아우라가 느껴졌어요. 손가락이 부러질듯이 움켜쥐고 있는 그의 연필을 보고 있자면 그 연필마저도 '뭘 꼴아봐. 니 눈에 부정이 끼어있다. 꺼져버려!'하고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았어요. 양 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교과서와 문제집은 무슨 마법의 책이라도 되는냥 눈에서 쉬 떼질 않더군요. 혹여라도 실수로 어깨라도 치면 그 신경질적인 미간에서 레이져 빔이라도 발사될 것 같았어요. 아무리 힘깨나 쓴다는 친구들도 그 친구만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는 명실공히 학교를 빛낼, 그리고 장래의 대한민국 인재가 될 보물이기에 선생님들의 두터운 비호를 받고 있었거든요.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급 칠판 옆에 걸려있던 급훈이었습니다. 각진 얼굴에 딱 벌어진 어깨로 로보트 변신을 할 것 같았던 우리 담임 선생님이 손수 붓글씨를 쓰셔서 걸어두신 '위대한 교훈'이었습니다. 초일류 S대를 졸업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를 즐겨하셨죠. 수업 시간에 졸고 있는 학생이 보이면 뚜벅뚜벅 말굽소리를 내면서 다가가 귀를 꼬집어 잡아올립니다. 토끼처럼 귀가 늘어나도록 동서남북으로 흔들어대면서 심하게 꾸짖곤 하셨죠. "졸음이 오냐? 죽도록 공부해도 대학에 갈까 말까 하는데 지금 눈이 감겨? 너희들 잘 들어. 죽도록 공부해도 안죽는다. 엄살부리지 말고 제대로 정신차리고 공부해 알았어?"

 

그리고는 또 하나 물으십니다. "너희들 아인슈타인이 몇 시간 잤어?" 그럼 우린 기계처럼 대답하죠. "3시간이요", 또 묻습니다. "에디슨은?". 이젠 기계가 대답합니다. "2시간이요." 단호한 명령이 떨어집니다. "너흰 4시간 이상 자지 말고 공부해 알았어? 알았냐고!" "네~~~" 큰 소리로 대답하고 정자세를 취합니다. 냉냉한 공기에 입김마저 나올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늘 위인들의 위대한 삶을 이야기해주셨어요.

 

아마 L도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길 원하고 또 원했나 봅니다. 어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인도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슬픈 이야기도 들려오더군요. L의 잣대에서 따지고 본다면 적응은 기본이고 그곳에서도 최고가 되어야 자기 직성에 풀렸겠죠. 하물며 농구시합에서까지도요. 사업가로 국제적 명성을 날리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바삐 '전교 1등'이라는 고지에 다다라야만 한다는 강박관념도 그의 죽음에 한 몫 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 나이도 이제 서른이 훌쩍 넘었습니다. 가끔 우연찮게 헌책방을 지날 때면 어렸을 적 읽었던 그 위인전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곤 하죠. 그런데 저는 그 수많은 위인전기 중에서 인상에 남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냥 이름과 내용 정도만 기억날 뿐이죠. '이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를 롤 모델로 삼아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목적 하나 없이 그냥 위대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그냥 무엇을 하든 남들이 위대하다고 평가해주기만을 원한 건 아닐까 하는 매우 1차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선생님이 위인전을 이야기해주실 때 한 가지 빠뜨린 점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위인은 평범하지 못하다'. 인류의 역사에는 길이 남을 수 있어도 내 가족과 주변 친구와 함께 '평범한 삶'을 공유하기에는 그가 맡은 세기의 임무가 너무나도 막중했다는 사실. 대다수의 위인들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죽도록 공부만 했거든요. 그리고 평범한 사람과 어울리지 못해 외로움과 병으로 단명하는 사례도 결코 적지 않았구요. 쓸쓸한 인생이었단 말입니다. 평범하지도 않았고 행복하지 않았고 게다가 단명까지 했다니. 차라리 바보로 사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나는 바보다' 하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진작에 저에게 그걸 알려주셨다면 이렇게 '죽도록' 공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미련아닌 미련도 남습니다.

 

우린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뛰어온 것일까요?

꼭 그렇게 몇 권 안에 손꼽히는 위인이 되었어야만 했나요?

 

Written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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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10 19:03 신고

    잘보고 갑니다.행복한 한주가 되세요.

  2. 2016.03.31 16:39

    아인슈타인은 잠꾸러기였답니다. 11시간 이상을 잤고, 또 나폴레옹도 잘 나갈 때는 4시간 이하로 자던 인물이였는 데, 6시간 이상 자는 사람을 바보라고 했다는 데, 월터루 전투 패배 이후에는 작전회의도 불참하며 잠을 잤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렸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맞지만, 12시 이전에는 자야하고 새벽 3시를 넘기면 몸이 결국 무너집니다. 몸이 한번 무너지면 되돌리기가 어렵습니다. 잠, 몸이 원하는 만큼 자세요. 깨어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나폴레옹 잠을 정복했냐 ? 결국 잠에 정복 당했지 !!! 어부보다 못한 최후
    http://softwant.com/cgi-bin/kimsq/softwant/itgi.php?mid=240&r=view&uid=2542



요즘 한집 건너 볼 수 있는 것이 커피숍이자 카페다. 작은 동네인 우리 동네도 벌써 들어선 카페만 해도 4개나 된다. 언제부턴가 확실히 우리 생활 한자리 잡고 있는 것이 커피가 됐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커피라는 음료가 갑자기 우리나라에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집 찬장 같은 곳을 보면 병에 담겨있는 인스턴트커피가 있었고, 그 옆에는 항상 ‘프리마’가 함께 있었다. 티스푼으로 커피를 몇 숟갈 담고 프림을 넣고, 설탕도 넣어 물을 부어 마셨다. 프림은 우유 대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끔 프림만 물에 타 먹어도 고소하니 맛이 좋았다.



인스턴트커피는 오래전부터 가정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 드라마를 보면 조금 있는 집에서 식사 후 커피를 마시는 영상을 보면 갈색의 인스턴트커피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커피잔’에 마셨지 원두커피처럼 ‘머그잔’에 먹는 모습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세상의 편리함도 인스턴트커피에 적용이 됐는데 그게 바로 ‘믹스커피’의 등장이었다. 믹스커피는 말 그대로 커피, 프림, 설탕이 믹스되어 있는 제품인데 윗부분을 살짝 뜯어 컵에 넣고 물을 넣으면 한번 저어주면 커피가 완성됐다. 인스턴트커피가 또 한 번의 가공을 통해 ‘믹스커피’라는 커피의 종류가 탄생한 것이다. 


믹스커피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다방의 쇠퇴다. 예전에 복덕방이라고 불리던 부동산을 보면 동네의 어르신들이 모여 장기나 바둑, 혹은 고스톱을 치시면 꼭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시켰다. 그럼 다방에서는 끓인 물과 커피, 프림, 설탕을 보자기에 잘 싸서 배달을 왔다. “오빠! 오빠는 프림 몇 개?”라는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커피취향에 맞춰 그 자리에서 커피를 탔다. 소위 말하는 ‘다방커피’였다. 사실 복덕방에서 직접 인스턴트를 타도 맛은 똑같겠지만 사실 남자들에게 그것도 귀찮은 짓일 뿐이라 대게 시켜 마셨다. 아님 다른 목적(?)이 있었을 지도.



‘다방커피’라는 말은 나중에도 많이 쓰였다. “커피 어떻게 드릴까요?” “난 다방커피로 부탁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달라는 의미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뜻은 아니다. 다방커피의 의미는 커피와 프림, 설탕의 비율에 있는데 커피2, 프림3, 설탕3(숫자는 스푼의 개수)의 비율로 타는 것을 의미한다. 취향에 따라 조금씩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다방커피라는 메뉴(?)는 확실히 존재했다. 


믹스커피가 등장하고 더 이상 커피를 배달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편리해졌기 때문이다. 스푼으로 커피를 넣다 알갱이를 떨어트릴 이유도 없어지고 프림을 쏟을 염려도 없어졌다. 그저 물만 끓이면 커피를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귀찮은 것을 지지리도 싫어하는 남자들도 커피를 탈 수 있게 됐다. 거기에 물 조절만 잘하면 모든 커피의 맛이 동일했다. 다른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비싸게 다방커피를 시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믹스커피의 등장으로 집에서는 더 이상 커피가 들어있던 유리병은 발견하기 힘들어졌다. 커피를 자주 먹는 집도 편리한 믹스커피를 두고 먹었지 번거로운 인스턴트커피와 프리마를 두진 않았다. 

믹스커피는 집안에서도 커피를 쉽게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지만 믹스커피의 등장으로 큰 혜택 본 곳도 다름 아닌 현장직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아닐까 한다. 예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쉬는 시간이면 꼭 믹스커피를 마셨다. 




쉬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믹스커피 한잔 마실 시간은 충분했다. 만약 믹스커피가 없었다면 현장에서의 커피는 귀찮아서라도 먹지 않았을 거 같다. 물론 커피가 좋아 번거로운 걸 감수하고 먹는 사람도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믹스커피는 장소, 시간의 제안을 줄였다. 언제 어디든 컵과 물만 있으면 먹을 수 있게 됐고, 더불어 티스푼도 필요 없었다. 그냥 커피 넣고 남은 봉지로 휘휘 저으면 그만이다. 


비위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씻지 않고 내버려둔 티스푼보단 위생적이다. 나는 집에서도 설거지 귀찮아 봉지로 저을 때도 있는데 이것도 나름 믹스커피가 생기면서 생긴 재미있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믹스커피는 나이, 성별, 국적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믹스커피를 한번 맛본 외국인은 극찬을 날렸고, 머리가 백발이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즐겨 마신다. 한편으로 믹스커피는 우리나라의 커피 대중화를 이룩한 일등공신이 아니었을까? 믹스커피 없이 원두커피와 커피숍이 우리에게 왔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대중화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을 테니 말이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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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01 15:12 신고

    4월에도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기교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쇼팽 연습곡

 

쇼팽 이전에도 연습곡은 존재했다. 오늘날까지도 피아노 학원의 바이블로 우뚝 서 있는 체르니가 대표적인 선구자다. 쇼팽과 피아노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피아노의 귀신' 리스트도 어렸을 적 체르니에게 탄탄한 기본기를 사사했다. 피아니스트에게 연습곡은 다소 지루한 과정이지만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필수 코스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연습곡의 수준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단단히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연습곡의 끝판을 완성한 것이다. 그의 연습곡은 결국 공연장 연주곡의 반열에 올라섰다.

 

쇼팽이 활약하던 시기는 낭만주의 시대로, 피아노가 독립된 악기로 인정받아 이제 막 기악으로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쇼팽과 리스트의 초절정 기교의 곡들을 들어보면 딱 그 생각 밖엔 들지 않는다. '어디 쳐볼 수 있으면 쳐봐라'. 락으로 따지면 잉위 맘스틴과 임페리테리의 끝을 모르는 속주를 듣는 느낌이다. 가공할만한 속도감, 그 가운데에서도 씨알머리하나 엇나가지 않는 정교함. 이 정점에서 쇼팽은 생각한 것 같다. '어? 그러고 보니 피아노 기본기 교재는 있어도, 피아노 기교 교재는 없네?' 

 

총 24곡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 곡들이 작곡된 시기는 정확치 않지만 작품 10은 1829년~1936년 사이에, 작품 25는 1832년에서 1936년 사이에 작곡된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1810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다 20대에 쓰여진 곡이다. 이미 그는 청년 시기에 피아노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후학을 염두한 연습곡을 지은 것이다. 리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쇼팽 역시 파가니니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 연습곡을 완성했다. 화려한 연주기교에 더해 '피아노의 시인' 특유의 시적 표현을 톡톡히 담아냈다. 당대 보수파들에게 '예술의 파괴'라고 욕 꽤나 먹었지만, 슈만과 리스트에게는 오히려 극찬받았다. 낭만주의가 무엇인지 교육적으로 몸소 보여준 쇼팽의 결정체라 하겠다.

 

냉철한 해석, 연습곡은 연습곡으로 끝나야 한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클래식 초보자'도 들어보면 어디서 들어본 듯한 곡들이 여러 개 걸릴 것이다. 그만큼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고 보면 되겠다. 작품의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음반이 출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전문가들이 단연 탑클래스로 손꼽는 명반이 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다.  

 

1942년 출생, 올해 나이 일흔 하나, 백발이 성한 할아버지다. 이 분도 천재다.(세상엔 참 천재도 많다;;;) 불과 15살에 제네바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렇다면 그 때 1위는 누가 했을까? 혜성처럼 등장한 '피아노의 여신' 마르타 아르헤리치다. 이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우리는 라이벌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은 이미 그와 그녀를 세기의 라이벌로 정의내렸다.

 

아르헤리치가 열정의 심볼이라면, 폴리니는 냉철의 아이콘이다. 똑같은 쇼팽을 연주해도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온다.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 3장을 들어보라. 듣는 사람이 제압당한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시작부터 좌석에 앉아있는 청중을 꽁꽁 묶어버린다. 폴리니는 다르다. 열정으로 대중을 휘어잡기보다는 표준적인 감성으로 작품의 실체를 밝고 명확하게 이끌어낸다. 그가 서른살에 녹음한 쇼팽의 연습곡도 다르지 않다.

 

한 치의 오차 없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굴러간다. 손이 기계같이 느껴질 정도다. 음량 배분에서도 절대적인 안정감을 추구하고 있고, 핑거링 역시 냉정함을 고수하고 있다. 앨범 쟈켓의 표정을 봐도 알 수 있다. 주어진 곡을 주어진 대로 칠 뿐이라는 담담한 얼굴을 짓고 있다. 혹자는 의구심을 품어 볼 수도 있다. '감성과 서정을 중시했던 쇼팽도 과연 이렇게 연주했을까요?' 폴리니의 연주를 듣고 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연습곡은 연습곡일 뿐이다'. 

 

폴리니는 '쇼팽'의 연습곡보다는 쇼팽의 '연습곡'에 초점을 둔 것이다. 아무리 쇼팽이라고 해도 기교와 시적 감정의 표현을 담아내는 교재에서는 표현의 중립을 지켰을 것이라는 확신이 폴리니의 곡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렇게 얘기해도 이건 너무 차갑고 이성적이지 않냐고 불평하는 혹자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할수없다. 아무리 따져봐도 이 이상 쇼팽 연습곡을 바이블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마음이 갈피를 못잡고 싱숭생숭할 때 중립과 냉정을 찾고 싶다면 이 곡 한번 들어봐라.

 

[쇼팽 에튀드 Op. 10/25/DG 413794-2]

 

Written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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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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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카페에 가서 책 보고 있는데 옆에서 문득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악관절 때문에 밥도 못먹는다구요. 아,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티비에서도 룰라 김지현이 악관절 때문에 귀가 안들리는 증상까지 생겨서 양악수술 받았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저는 악관절이라는 증상을 겪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해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이러다 말겠지, 저러다 말겠지 하다가 이빨 끝 다 나갔구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턱에서부터 머리까지 깨질것 같은 고통 때문에 하루 종일 두통약 달고 지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몸살이 나니까 악관절부터 나빠지더라구요. 너무 아파서 이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스스로 증상을 지켜봤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지를요.

 

1. 상체에 힘빼라

가만히 지켜보니 쓸데없이 상체에 힘을 주고 있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가령, 조금만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빨을 악 다물고 있습니다.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가 있구요. 당연히 어깨가 올라갑니다. 상체 전체에 힘이 들어가게 되죠. 하루에도 몇 십번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때마다 힘을 빼는 연습을 했어요. 계속 반복될 때마다 온 몸에 기운이 빠졌다는 생각으로 어깨를 내리고 큰 숨을 들이쉬었죠. 이 동작만 2주 정도를 했는데도 악관절이 몰라보게 줄어들었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상체에 힘 빼는 연습부터 하세요.

 

2. 다리 꼬지 마라.

회사에 앉아 있다보면 다리를 꼬거나 비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결과적으로 이 행동이 상체에 힘을 가중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더라구요. 의자에서 허리 꼿꼿히 피고 똑바로 앉아 있는 연습하세요. 다리는 90도 각도로 편하게 내려놓는다는 생각으로 힘빼고 앉으시구요. 책상과 의자 높이 조절도 필수에요.

 

3. 운동 부족도 원인이다.

악관절의 근본적인 원인은 스트레스입니다. 누구나 스트레스는 있어요. 그런데 이걸 풀지 못하니까 결국 몸 안에서 돌도 돌다가 턱으로 갑니다. 운동 안하지, 자세 나쁘지, 스트레스가 체내에 그대로 쌓여 뇌를 자극합니다. 뇌는 잠재된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서 자는 도중에 무의식적으로 평소의 이겨내는 행동을 일으키죠. 이 악물고 버티는 그 습관 말이죠. 격한 운동을 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격한 운동은 악관절을 더 악화시킵니다. 가볍게 땀 흘릴 수 있는 정도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세요. 스트레스를 뽑아낸다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운동하면 효과가 배가 됩니다.

 

4. '빼쨰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라.

악관절은 보통 예민한 사람 또는 예민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잘 나타납니다. 꼼꼼한 작업을 요하거나 항상 데드라인에 쫓기는 그런 류의 직업군 말이죠. '오늘 안되면 내일 해도 세상 안망한다'는 생각을 오늘부터 품어 보세요. 그리고 메모장이나 다이어리에 반복해서 씁니다. 성질 뻗치거나 누군가와 마찰이 생겼을 때 반복해서 생각해보세요. '에라이 배째라' 그냥 이런 마음으로 그냥 편하게 말이죠. 예민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야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5. 잘 때 조심해라.

잘 때 머리맡에 내일 할 일이나 그런 거 다 치우고 자세요. 그리고 자기 직전에 격하게 두뇌 쓰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시구요. 잠재의식이라는 건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 전을 항상 조심하세요. 가급적 재미있는 예능이나 짤막한 코미디극, 아니면 조용한 자기만의 취미를 즐기다가 편한 자세로 잠드세요. 그리고 반드시 자기 전에 '나는 잘 때 악관절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잠들 거다'라고 생각하세요.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돈 드는 거 아니니까 한번 해보세요. 이것도 2주에서 길게 한 달 정도 연습하면 분명히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 다섯가지를 한 달 정도 지킨 결과, 현재 2주 동안 한번도 턱을 깨물고 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에 악관절 환자들, 수술 생각하기 전에 스스로 고쳐보겠다는 마음가짐 한번 가져봅시다 화이팅!!!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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