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백건우. 그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 중의 하나가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


말 그대로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한편으로 갸우뚱했다. ‘한 손으로만 다채로운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상을 마친 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지손가락이 건반을 주도해 나아가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명쾌한 건반 하나하나가 가슴에 거대한 울림을 자아낸다. 라벨은 대단한 고집쟁이였다. 그 고집만큼 자신에 대한 실력과 자부심도 꼿꼿했다.  


청년 백건우는 프랑스와 라벨을 사랑했다. 그의 왼손에서 뿌려지는 타건의 신비로움이란 마치 땅거미가 지는 석양의 마지막 어스름을 불러일으킨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 이내 청량한 바람과 고슬고슬 풀벌레 소리가 그 빈 자리를 고독하게 채워준다. 찬찬히 밀려오는 피아노 음률에 검푸른 호수가 일렁이고, 오케스트라의 향연에 보라빛 하늘이 별꽃으로 물든다. 


백건우 연주의 백미는 역시 견실한 타건과 단단한 음향이다. 기교보다는 과감한 구도설정과 포치에 무게를 둔다. 커다랗고 새까만 거미 한 마리가 건반 위를 둥당둥당 기어가는 것 같다. 리듬미컬하지만 결코 인위적이지 않다. 


라벨의 화려하고 색채 띤 음의 구현을 수용하되, 결코 극단의 낭만에 치닫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음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은 과감하게 쳐내고 살릴 부분만 확실히 살린다. '라벨은 라벨이고 나는 나니까 듣고 싶으면 들어라'하고 배짱부리는 것 같다. 과연 배짱부릴만한 피아니스트다.


Written by 사샤




[추천] 백건우를 원한다면?
▶ 백건우 / Gary Bertini - 라벨: 피아노 협주곡 (Ravel: Piano Concertos), ORFEO, 1991. 

[추천] 라벨을 원한다면?
▶ This Is RAVEL, SONY, 2002. 
  (CD1: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어미 거위> 모음곡, <밤의 가스파르>, <우아하고 감상적인 활츠>)
  (CD2: <소나티네>,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스페인 광시곡>, <쿠프랭의 무덤>)
  (CD3: <볼레로>, <물의 희롱>,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라 발스>, <현악사중주 F장조>)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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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 15:38



한때 공사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소위 노가다라는 것을 한 것인데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해 오후 5시에 작업이 마무리 되고는 했다.

어느 날 오후 5시가 되어 집에 가기 위해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멀리서 같이 일하는 형님이 날 보며 갑자기 “아이템풀 좀 줘”이러는 거다. 순간 ‘이양반이 날도 안 더운데 더위를 먹었나? 한참 일하는 사람한테 왜 아이템풀을 달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공사현장에서 아이템풀이라니? 그런 이름의 공구가 따로 있었나 싶었다. 결국 내가 “뭐요?”라고 되묻자 그 형님은 다시 한 번 “아이템풀 달라고!!”하는 것이다.


아이템풀이 무엇이던가? 90년대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 시절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따먹기 하며 놀던 때 적당히 있는 집 자식들이 풀던 가정용 학습지 아니던가.

나는 해본 적 없지만 주변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찾아오는 아이템풀 선생님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였다. 잘 놀다가 갑자기 엄마의 “아이템풀 선생님 오셨다”라는 한마디에 함께 놀던 친구들을 뒤로한 체 집으로 향해야 했으니 말이다. 뭐 지금의 ‘빨간펜 선생님 오셨다’ 이런 거였다.


부족하진 않지만 넉넉지 않은 집 아들이었던 나는 나름 부러움의 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학습지를 대신 풀어 준적도 더러 있다. 여기서 조금 설명을 더하면 요즘 아이들 학습지야 그림도 있고 컬러풀하지만 당시 아이템풀은 정말 주구장창 수학문제가 있었다.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문제만 말이다. 지금 하라고 해도 난 못할 것을 내 친구들은 그나마 잘 참고 했던 거 같다.


문득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는 ‘응답하라 1997’을 보니 ‘이젠 내 어린 시절이 복고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템풀을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시기도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 80년대에도 사람이 태어났냐고 나를 약 올리던 형들처럼 말이다.

아, 참고로 그 형님이 찾던 건 ‘아이템풀’이 아닌 ‘라인 테이프’였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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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색연필 깎기, 그리고 꿈]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새해가 오고 있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생전 처음이다. 그 동안의 연말에는 "크리스마스에 뭘하지?"만 고민했지, "새해는 어떻게 준비하지?"가 늘 빠져 있었다. 그만큼 나에겐 '새해'라는 것이 무의미했고, '새해맞이'라는 것이 무색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명절되면 일가친척한테 새배하고 새뱃돈 두둑히 받으면 그게 새해인가보다 했다. 조금 더 커서는 1월 1일이 되면 일찌감치 일어나 반쯤 뜬 눈으로 안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전화기를 귀에 걸고 집안어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안부인사 1~2분 묻고 끊는 것이 예사였다. 새뱃돈 받기는 뭐한 나이고, 나이값 한답시고 의례적으로 하는 새해를 위한 일종의 '기계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 '새해맞이'가 아니었다고 믿는다. 내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때가 되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의 한 단락을 장식하는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만큼 나에게 있어 '새해'란 늘 계속되는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휴일 정도에 그치는 그저그런 날의 하나에 불과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일터에 뛰어들고, 그 일터에 병행하여 또 공부를 하겠다고 아둥바둥댔던 지난날의 시절, '새해'가 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새해를 비웃었다. 


"새해? 새해가 오면 뭐가 달라져? 그냥 사는거지."

"새해가 밥먹여 주냐? 호들갑들은 쯧쯧."

"해피뉴어는 무슨...해피하냐? 에라이 새드무비다."


내가 새해를 무시하니, 새해도 나를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늘 새해없는 새해를 맞이하니 그날이 그날이고, 이날이 이날같았다. 쳇바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다. 


2012년을 정리해보면, 꽤 격동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쳇바퀴 인생에서 탈출하고자 내 밥그릇 울타리의 밖을 넘어섰다. 넘어서 걸어가보니 꽤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접해보지 못했던 세계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만큼 기존에 쥐고 있던 많은 것을 잃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스스로 버린 것도 많았다.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법. 뭐든지 기회비용이라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2012년의 겨울이 내 앞에 닥쳤다. 나는 잠시 멈추어섰다. 그리고 그루터기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내가 행복한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서른 즈음에서, 나는 스스로가 일어서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혜민스님 말씀대로 멈추어 보니 비로소 새해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보지 못했던 것들, 겪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겪고 성장하는, 그리고 작지만 내실있는 열매를 맺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2013년'이 아닌 '나만의 새로운 2013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다른 새해 준비작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맞이 첫 작업으로 나는 색연필을 깎았다. 두 다스를 깎으니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노랑, 빨강, 파랑, 보라, 연두, 초록, 황갈, 주황, 검정 등등 여러가지 색깔이 많았다. 여기서 색연필을 예쁘게 다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색연필이 필요할 때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길고 뭉뚝하게 깎는 것이 중요하다. 다 깎고 나면 이면지에 각각의 색연필을 돌려가면서 뭉뚱그리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 그림을 그릴 때 날카로운 선이 나오지 않는다. 색연필 그림에서 삐져나오거나 두리뭉실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날카로운 선은 그림에 해가 되기 때문에 가급적 그런 선이 나오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을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새해맞이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기껏 색연필이냐라고 웃음치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단순히 평소에 하지 않은 비일상적 행동으로 막연히 내년의 희망을 걸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사람 모두에게 각각 주어진 어떤 특별한 재능, 그리고 사명감 정도는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생각할 때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쾅대고,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그런, 불길같이 솟아오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색연필을 깎는 것이다. 내 마음이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너는 전방위 아티스트가 될 운명이라고. 





전방위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조용한 아지트다. 시칠리아 섬에 나는 조그마한 정원이 딸린 2층 집을 지을 것이다. 시칠리아 섬은 가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곳에 지으라고 내 마음이 나에게 말한다. 40대의 나는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사랑하는 아내와 예술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하고 있다. 


새해맞이 기념으로 나에게 아담한 집을 선물한다. 

 

Written by 사샤

Painted by 사샤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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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해는 뜬다] 해는 기다리지 않는다

 

  ....어윽!

 

  변기에 앉아 힘을 준다. 쾌변이다. 잠시 행복감을 느낀다. 며칠 규칙적인 생활을 했더니 장운동이 좋아진 모양이다. 물을 내리고 옷매무새를 추스르다 문득 생각한다.

 

  '잠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아, 맞다. 해돋이 보러 하늘공원에 온거지.'

 

  그렇다. 나는 해가 뜨는 것을 보려고 하늘공원에 왔다. 시계를 본다. 오전 7시 53분이다.

 

  새벽에 휴대폰 알람소리에 잠이 깼다. 몇 번을 고민하다 '일.어.나.자.'라고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용케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섰다.

 

  녀석의 기운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용트림을 하는 녀석을 달랬다. 괜찮아, 라며 녀석을 잠재웠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하늘공원에 왔다. 커피와 음악도 빠뜨리지 않았다. 공원 동쪽에 있는 하늘계단을 오르며 상쾌한 설렘을 느꼈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좋았다. 별이 보였다. 오늘은 기필코 해돋이를 보리라 다짐했다.

 

  하늘계단 꼭대기의 전망대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공원까지 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높이 차이도 크지 않아 보이고, 무엇보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어 마음에 들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20분, 해뜨기 24분 전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몸을 움직여 추위를 녹이기도 하고, 해가 뜨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조금 추운 것만 빼면 아주 완벽했다.

 

  사건은 항상 중요한 순간 직전에 터진다. 사건은 오전 7시 41분에 일어났다, 범인은 녀석이다. 추운 날씨 탓으로 녀석이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이런, 3분, 3분이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아까와는 달리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녀석을 무력진압했다. 순순히 말을 듣는 듯 하더니, 녀석은 방심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박을 풀고 달아났다.

 

  7시 43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선택을 해야 했다. 해돋이냐, 팬티냐. 결정은 빨라야 했다. 순간 화장실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냅다 달렸다. 선택은 팬티였다.

 

  장소는 하늘공원 입구이고, 방향은 북서쪽이다. 북동쪽만 되었어도 달리며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정북만 되었어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북서쪽이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다. 시계를 볼 틈도 없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잘못하면 해가 고개를 내미는 것을 눈으로 보는 대가로 녀석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터였다.

 

  이 순간에도 등뒤의 해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여유따윈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뒤는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다.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고, 기분 좋게 녀석을 떠나보냈다.(녀석은 과연 그럴만한 녀석이었다.)

 

  7시 56분에 해와 마주한다. 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해는, 맨 뒤에서 기회를 기다리다 절묘한 코너링으로 무섭게 치고 나가는 3000미터 쇼트트랙 선수처럼, 고개를 내밀자마자 순식간에 하늘로 치고 올라갔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다 잠시 화장실 간 틈에 중요한 순간을 놓친 시청자가 바로 나다. 1위과 2위의 차이는 벌써 2바퀴 반, 무난히 우승할 것이다.

 

  섭섭한 마음으로 해를 쳐다본다. 해는 부드러운 햇빛을 내비친다. '허허, 또 뜨잖아. 내일 보면 되지. 아니면 모레도 있고.'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그래 내일은 기필코 보리라. 꼭 화장실은 들릴 것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못 기대된다.

 

written by 요리사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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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東風)

 

너는 바다 밖에서 새로이 불어와
새벽 창가 시 읊는 나를 뒤숭숭하게 하지.
고마워라. 시절 되면 돌아와 서재 휘장 스치며
내 고향 꽃피는 소식을 전하려는 듯하니.

 

知爾新從海外來, 曉窓吟坐思難裁. 堪憐時復撼書幌, 似報故園花欲開.

 

이 시는 통일신라의 천재 문인 최치원의 ‘東風’ 이다. 그가 당나라 유학 중에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이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나를 위로해 주었던 시들 중 하나이다.

 

당시 나는 봄을 타고 영국으로 들어왔기에, 추운 겨울을 외롭게 나며 다시 찾아온 따스한 봄기운은 내게는 마치 선물과도 같았다. 이 봄바람은 부푼 꿈을 안고 부지런히 유학준비를 했던 한국에서의 소중한 기억을 일깨워 주었다. 굳게 결심했던 포부가 어려움과 외로움에 슬며시 바래졌을 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게 만들어준 시이다.

 

당대 천재로 유학을 떠나 목숨을 걸고 나라의 미래를 걸고 공부에 임했을 최치원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으나, 배운 지식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품은 큰 뜻은 천 년도 더 지난 천재와의 시를 통해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 시를 현재 집 떠나와 외로이 공부하고 있을 모든 유학생들에게 선물한다.

 

‘동(東)’은 사계절 중 봄을 의미한다. 또한 신라가 당나라의 동쪽에 위치하였기에, 동풍은 ‘고향에서 불어온 바람’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 사진은 유학생활 중 산책을 하면서 한국을 떠올렸던 Durham Wear강의 새벽 모습이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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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시대의 해적이다] 늑대소년, 그 시절을 향한 무한긍정, 그리고...

 

 

 

 

용산에서 늑대소년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다. 동창회 부부동반 모임인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이 정겨웠다.

 

신호가 얼른 바뀌지 않아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어르신 한 분이 또다른 어르신에게 핀잔를 준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안그래도 그 어르신이 뭘 그렇게 찾으실까 궁금해하던 중이었다. 자연히 귀를 쫑긋 세웠다.

 

"입대할 때 용산에 모였잖아. 육이오 때. 육십년만에 처음 오는 것 같네."

 

대답을 하면서도 어르신은 계속 무언가를 찾았다. 핀잔을 줬던 어르신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스물도 안된 소년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의 심정이란...그가 마지막으로 본 용산의 풍경은 참으로 남달랐겠지. 구름 한 점, 들꽃 하나, 돌맹이 한 개 조차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증기기관차에서 용산역을 바라보며 '돌아올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306보충대에 입소할 때의 느낌조차 세상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라는데...)

 

1953년 용산역 플랫폼의 증기기관차

 

용감했지만 미숙했던, 순수했지만 불안했던, 앳된 청년은 열차를 타고 떠났다가 6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다시 용산역 앞에 섰다. 몸을 실었던 증기기관차는 고물이 되어버린지 오래고, 지금은 KTX가 다니는 세상이다.

 

연륜있지만 쇠잔했고, 현명하지만 겁많은, 주름진 노인은 역전에서 무얼 찾고 있는 걸까?

 

60년 전 길가에 피어있던 이름 모를 들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먹었던 국밥집을 찾고 있다. 많이 먹고 힘내서 살아오라며 한그릇 더 말아주던 주인아주머니는 살아계실까. 혹시나 해서 찾아들어간 60년 전통 원조 할매 국밥집에서 눈물과 함께 했던 그 맛을 느낀다면...

 

순수했더라고, 좋았더라고, 두렵고 불안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고, 이제는 알았노라고 그 시절을 한없이 긍정하지 않을까?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삶에 힘들어서, 생활에 지쳐 잊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변하지 않은 무언인가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미묘한 장면의 교차, 가끔 이럴 때 주변을 의심하곤 한다...

 

송중기는 잘 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자가 아닌지라,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치들을 때에도 무언가 부족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치열한 소중함의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지막 10분에서 부족한 감정은 채웠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시절의 철수와 순이가 아니라 나이들어버린 순이일지도 모른다고...

 

때론 모르는게 용감한거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는것이 많아져서 겁쟁이가 되버려.

나이 들어 어른이 되면 눈에 안 보이던게 많이 보여. 그렇게 아는게 많아져서 못하는게 많아져.

인생에 딱 한 번 뿐이야. 그 때가 지나면 다신 안 와.

- 늙은 순이가 젊은 손녀에게 -

 

[이미지 출처]

http://wolfboy.interest.me/

http://donsdepot.donrossgroup.net/dr141.htm

 

written by 요리사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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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해는 뜬다]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07:15


  남산을 오르는 버스에 있다. 아마 첫차인 듯하다.. 함께 하는 이들은 네다섯명 정도.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창밖만 바라본다.

  아직 주위가 어둡다. 저멀리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가로등 불빛과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아침의 불빛이 교차하고 있다.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빛의 경쟁. 승리자는 없다. 반복만이 있을 뿐...

  그런 날이 있다. 랜덤으로 틀어놓은 노래가 지금 내 상황과 우연히 겹치는 날.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듯한,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슬픔은 날 가로질러 저 멀리 또 흘러가는데
  허무했던 숱한 밤을 지나서
  또 다시 돌아오는 공허한 공기들
  태양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기회는 언제고 반드시 찾아온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위로...그래 나는 남산 위로 간다.



07:35


  주위는 조금 밝아져있다. 해가 뜨는 시간 7시 43분 41초.

  남산에 도착해서 동쪽이 가장 잘보이는 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나는 시야가 트인 비탈길 중간에 서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따뜻한 캔커피를 만진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긴장을 풀어준다.

  일출을 보려 한다. 동지날을 기점으로 길어지기 해가 보고 싶었다. 지난 밤에 마신 술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생각때문일 수도 있다. 각오를 다지고 싶었나?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가장 긴 밤의 끝자락이라는 시간 속에 있다. 산자락이든 도시의 빌딩 사이든 붉은 빛이 내비치면 나는 어떤 시간 속에 있게 될까?


  나는 가장 긴 밤의 한가운데 있다. 

  나는 가장 어두운 밤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길어지는 태양 앞에 있다.  



08:01


  그저 이쪽이거니 추측할 뿐이다. 거기에는 흘러가는 구름이 있다.

  해는 뜨지 않았다. 아니,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전날 눈을 뿌린 구름이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10초의 고민, 그리고 무엇에 이끌린 듯 남산을 향했다. 구름이 걷힐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는지, 동쪽하늘에 구름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 것도 기대하거나 자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구름 뒤 해를 상상한다. 보이는 듯도 하다.



08:49


  버스로 오른 길을 걷는다. 도시의 풍경이 거기에 있다. 아침의 불빛들만이 그곳에 남아있다.

  나는 무얼 한걸까?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났고, 추운 날씨에 산을 올랐다. 10분 남짓 적당한 장소를 찾았고, 동쪽을 30분 남짓 바라봤다. 길어지는 해는 보지 못하고, 해를 상상했다. 그리고 걷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산을 다 내려오고 큰길로 나섰다. 그 순간 구름 위로 해가 뜨는 것을 본다. 아주 좁은 구름의 틈이다. 그 사이로 해가 보인다. 해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보고 있지 않아도 태양은 뜬다.'

  해는 다시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17:12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7분 40초다. 오후 내내 나와있던 해는 방금 빌딩숲 아래로 넘어갔다. 5분 뒤면 해의 자취는 아예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이 위세를 떨칠 것이다. 다시 밤이 된다. 어제보다 1분 정도 짧아진 밤이다.

  

  밤이 되면,

  글은 집어치우고 나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스위트피 -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youtu.be/ud71GYV1RhM


 

written by 요리사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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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연말. 주말 저녁거리는 이미 커플들로 가득 차 솔로들은 설 자리가 없다. 연말은 솔로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왜? 바로 성탄!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닷!! 내 생일도 아닌 날에 왜 이렇게 우리는 우울해야하나? 하지만 걱정마라. 크리스마스에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이 순간 세상의 모든 솔로를 위한 본격 솔로지침 제1장 ‘성탄허비 지침서’를 공개하겠다.



제1절 잠들라. 꿈이 너를 평안케 하리라


잘 생각해보라. 크리스마스는 별것인가? 내 생일도, 내 친구 생일도 아니다. 여자 친구처럼 있다고 믿으나 보이지는 않는 예수의 탄생일이다. 우리에겐 아무런 기념이 되지 않는 날이란 말이다. 그저 검정 숫자 가득한 12월 달 한줄기 희망 같은 빨간 날일뿐이다. 정말 꿀 같은 휴일이란 말이다!


연말이라고 친구 망년회, 회사 송년회, 동호회 송별회 등에 지친 내 간의 휴식을 마련해줄 절호의 찬스다. 고민하지 말라. 그냥 잠들면 모든 것이 평안타. 그래도 못 잠들겠다면 지금부터 준비하면 된다. 


오늘부터 잠자리에 들지 마라. 온라인게임이든 B급 좀비영화를 보든 잠들지 마라. 심신을 지치게 하라. 물론 잠을 참는 것은 무척 힘들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미친 듯이 지친 심신을 이끌고 따뜻한 이불속에 내 몸을 맡기고 한잠 푹 자고 났을 때의 개운함을. 단, 사전준비가 실패해 중간에 잠들 경우 잠 못 드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한다.

날도 추운 날 밖을 싸돌아다녀야 하는 커플들의 가혹한 운명에 비하면 집에 있을 수 있는 우리는 정말 행운 것이다. 잊지 말라. 꿈은 우리를 평안케 한다.





제2절 보고 감상하라. 문화생활이 네게 여유를 제공하리라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직장생활에 문화생활한지가 언제인가? 숨 막히는 지옥철에서 책 한 장 넘길 여유가 있었느냔 말이다! 

올해는 특히나 볼만한 영화가 많은 해였다. 다크나이트 라이즈, 도둑들, 광해, 범죄와의 전쟁, 건축학개론, 호빗 등 볼만한 영화들이 차고 넘쳤다. 지금 거론한 영화들만 봐도 이틀도 부족할 것이다. 밖을 나갈 시간이나 있겠는가? 최고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말의 따뜻한 감성과 함께 느끼면 이 얼마나 여유롭고 상류사회 같은 모습이란 말인가? 여기서 “전 이 영화들을 다 봤는데요? 어떻게 하죠?”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어찌 한 사람으로 태어나 오늘만 보고 산단 말인가? 내년에 어떤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액션의 전설! 최고의 히어로! 최고의 경찰, 존 맥클레인의 부활인 다이하드 5탄이 개봉한다!!


5탄이 개봉되는 이 시점에서 과거 윌리스 형님의 활약을 어찌 안볼 수 있겠는가? 1편부터 4편까지 복습하라. 어차피 다이하드는 한번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이걸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시걸 형님의 언더시즈도 함께 한다면 이번 크리스마스는 풍성할 것이다. 이젠 캐빈 같은 건 개나줘라.

추운 날 구하기 힘든 영화표를 구하기 위해 발품 팔아야할 커플들에 비하면 따뜻한 이불과 귤이 함께하는 우리는 천국이다. 더불어 시걸 형님과 윌리스 형님이 함께 한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기억하라. 문화생활은 우리에게 여유를 가져다준다.





제3절 일하라. 오늘의 노력이 너를 발전케 하리라


남들이 놀 때 놀고, 남들일 할 때 일하면 발전이 있겠는가? 어찌 휴일이라고 놀 생각만 하는가! 오늘 그대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내일일 수 있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일하기 좋은 조건인가? 만나자고 징징거리는 여자 친구가 있나, 밥 먹자고 조르는 여자 친구가 있나, 아니면 영화보자고 연락하는 여자 친구가 있나. 없다. 우리는.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방할 여자 친구가 없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최고의 환경이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란 말이다. 근데 여기서 “휴일이라 거래처가 쉬어서 일을 할 수가 없어요”라고 질문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리석은 질문이다.


어찌 발전 없이 지금에 안주하려 하는가? 일을 할 수 없다면 공부를 해라. 자기개발 모르는가? 손은 여자 친구 손잡는데 쓸 것인가? 있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손을 놀고만 있게 할 텐가? 커플들은 여자 친구 손을 잡고 쓸 때 없는 시간을 보낼 동안 우리의 손엔 책이 들려있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능률적이고 유익한가? 

이것이 쌓이면 좋은 학업 성적으로 좋은 인사고가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이 기회다. 기억하라. 오늘의 노력은 우리에게 부를 가져다 줄 것이다.




제4절 즐겨라. 게임이 모든 걸 잊게 하리라


게임 좋아하는가? 게임을 좋아한다면 지금 이시기를 놓칠 수 없다. 온라인게임들은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해 선물을 잔뜩 뿌리는 시기다. 우리가 이시기를 놓친다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생각해보라. 크리스마스 한정 옷을 착용하고 있는 내 캐릭터를 말이다! 


커플들을 보라. 게임을 좋아해도 여자 친구의 눈치 때문에 게임도 맘 놓고 할 수가 없다. 클랜의 명예가 달린 경기에 여자 친구의 전화가 왔다면 자넨 이미 진 것이다. 왜? 적은 벨소리를 듣고 ‘이걸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하고 고민하고 있는 자네를 놓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 한번 깜빡인 걸로 승부가 갈리는 판에 그런 고민은 사치다. 이미 정신 상태부터 진 것이다. 

여기서 “저는 온라인게임 안하는데요. 어쩌죠?”라고 질문할 수 있다. 걱정 말라. 세상엔 온라인 게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대작은 따로 있다. 




우선 시드마이어의 문명을 접해보라. 한 국가를 만들고 원시시대부터 미래시대까지 발전하고 전쟁을 막고 과학과 문화를 높이고 시민의 평화를 지키다보면 이미 새벽이 밝아 오고 있다. 

삼국지의 엔딩을 본적이 있는가? 천하를 얻기 위해 재야에 숨은 인재 찾아 등용하고 촉나라를 치기 위해 위나라와 외교를 하고 유비관우장비의 형제애에 가슴 뭉클해 하라. 시대의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삼국지는 최고의 작품이다. 천하가 이미 자네 손에 있다면 26일이 밝아 오고 있을 것이다. 


모험이 필요한가? 오대양을 누비며 동료와 함께하는 모험이 가득한 대항해시대가 있다.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으로, 인도양을 건너 태평양으로, 새로운 마을을 발견해 주둔을 하고 무역을 통해 수익을 올리면 나의 함대는 점점 강해진다. 모험이 가득한 이것을 어찌 포기하겠는가? 전 세계의 숨겨진 보물을 다 찾았다면 크리스마스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대작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 모두는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계속 이 게임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조심해야한다.

커플들의 손엔 연인의 손이 있다고 부러워 말라.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자네의 캐릭터엔 +12검이 들려있을 테니깐. 기억하라. 게임은 모든 것을 잊게 할 것이다.


written by 선의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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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열혈이다


패밀리가 비록 8비트 게임기이기는 하나 사실 전설적인 게임이 많았다.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도 그렇고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가 좋은 예다. 이 둘은 나중에 게임계의 큰 획을 긋는 대작인데 이후로 계속적으로 시리즈가 출시되어 전설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처럼 잘 찾아보면 대작의 시초이거나 괜찮은 작품이 패밀리에 많았는데 특히 ‘게임은 협동이다’를 보여준 작품이 있으니 바로 ‘열혈 시리즈’였다.


패밀리를 가졌던 유저라면 한번쯤은 해봤을 정도로 유명하고 패밀리의 대중적인 게임이었다. 일단 친구와 함께 2인 협동 플레이가 가능했다는 점은 우리들이 열광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기존에 2인 플레이가 되는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인 플레이기는 하나 먼저 게임을 하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 받는 식의 게임이 많았다. 2인용이기는 하나 협동적인 모습은 없던 것이다. 물론 전설의 슈팅게임인 ‘트윈비’나 ‘배틀시티’ 같이 게임이 있긴 했으나 협동이라 긴 보단 같이 한다(?) 정도의 느낌이었다. 같이하는 친구가 적의 총알을 피할 수 있게 도와 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열혈 시리즈는 찐한 우정을 체험할 수 있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열혈 격투전설’의 경우 열혈 시리즈의 여러 캐릭터들이 나와 무술을 겨루는 게임(사실 무술이라기 보단 그냥 패싸움 같았다)이었다. 2인 플레이시 나와 친구가 한 팀이 되어 함께 상대방을 물리쳐야했다. 친구가 맞고 있으면 달려가 롤링어택을 날려주고, 내가 맞고 있을 땐 친구가 달려와 니킥을 날려주고는 했다.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우정이었다.


캐릭터 고르는 방식도 특이 했다. 이름과 생일, 혈액형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졌고, 무술의 종류가 달라졌다. 그래서 주로 좋은 무술과 능력치가 나오는 생년월일과 혈액형은 외워두고는 했다. 나는 특히 마샬아츠를 사용하는 캐릭터를 좋아해 외워두고 사용했는데 검정 도복바지를 입고 발차기를 샤샤샥 날리면 이소룡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최고였다.


열혈 시리즈엔 ‘쿠니오’와 ‘리키’라는 주인공이 있었는데 모든 시리즈엔 꼭 나왔다. 흡사 김성모 만화에서 ‘강건마’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김성모의 만화에서는 강건마는 어떤 작품에 나오던 킹왕짱 쌔지만 열혈 시리즈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쿠니오와 리키가 제일 후졌다. 웬만하면 주인공이 제일 쌜 법도 한데 별로 특징도 없고 그렇다고 멋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게임을 하면서도 거의 골라본 적 없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스토리 모드를 하다보면 이 녀석들을 플레이하게 되는데 하는 동안 내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쿠니오와 리키의 우정만큼은 최고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열혈은 시리즈물인데 열혈격투전설 빼고도 ‘열혈’이라는 이름을 붙친 온갖 스포츠가 존재했다. 열혈하키, 열혈축구, 열혈농구, 그리고 올림픽을 연상케 하는 열혈신기록.(우리는 주로 열혈 운동회라 불렀다) 이밖에도 많지만 내가 주로 한 것은 이것들이었는데 모두다 깨알 같은 재미와 협동이 존재했다.


열혈시리즈가 협동이 존재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모든 시리즈엔 폭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열혈’이란 단어가 붙은 이상 일반적인 스포츠 게임을 상상하면 큰 오산이다. 열혈하키의 경우 하키채로 패는 것도 모자라 그냥 주먹도 휘두를 수 있었다. 


특히 마구를 쏘기 위해선 대략 3초가량 슈팅 버튼을 눌러 기를 모아서 쏴야 했는데 기를 모으는 3초가량은 거의 무방비 상태다. 초반 한두 판의 경우 컴퓨터가 좀 모자라 기를 모으는 동안에도 잘 건드리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인공지능도 좋아져 기를 모은 다 싶으면 하키채 찜질을 받기 일쑤였다. 

이때 다시 한 번 뜨거운 우정이 빛을 바라는데 기를 모으는 동안 내 친구는 슈팅을 방해하러 오는 상대방을 있는 족족 쳐 패고는 했다. 물론 내 친구가 마구를 위해서 기를 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가? 생각만 해도 뜨거운 우정이 아닌가? 친구의 마구를 위해서 내 한 몸 던져 친구를 지킨다! 그 정신은 정말 휘트니 휘스턴 지키던 캐빈 코스터너 저리가라였다. 하여튼 ‘열혈’이란 단어가 붙은 이상 정상적인 스포츠는 아니었다. 

열혈시리즈의 최고의 장점은 협동이라 말했지만 사실 최악의 단점(?)도 사실 협동이라는 점이었다. 협동이 되는 만큼 우정파괴의 위험도 도사렸다. 



다른 시리즈도 비슷하지만 열혈 격투전설의 경우 상대 팀만 때릴 수 있던 게 아니라 같은 편도 타격이 가능했다. 쉽게 말해 내가 내 친구의 캐릭터도 팰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를 위기에 구하기 위해 날렸던 롤링어택이 상대팀과 함께 내 친구도 함께 날렸을 땐 욕설이 튀어나오기 딱 좋았다. 


이게 심해지면 한명이 삐지고 “너랑 안 놀아”가 나올 수도 있는데 오락기 주인이 삐져 그만한다고 해버리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오고는 했다. 게임을 계속 같이 하기 위해선 주인장 녀석의 비위를 조금씩은 맞춰주고는 해야 했다. 어린 나이지만 사회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우정파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열혈 시리즈는 이후 여러 게임기에 이식되고 했다. 그러나 패밀리만큼의 큰 빛을 보지 못했다.(물론 우정파괴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열혈남아(熱血男兒)가 아닌가? 키 작던 나도, 내 친구도 쿠니오와 리키 못지않게 열혈남아였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남자라면 역시 열혈인 것이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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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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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0 02:54

 

 

오늘따라 바람이 잘 분다. 15노트. 그야말로 쾌속선이다. 하늘은 별무리로 가득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다와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뒤엉켜 분간하기 힘들다. 하늘에 배가 두둥실 떠가는 것 같다. 심심한 마음에 갑판에 나오니 오늘은 사샤가 없고 요리사가 앉아 있다. 무얼 쥐고 있는지 가만히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뭐해 안자고?"

"그냥요."

"그냥 뭐하는데?"

"그냥 있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손에 온통 허연 가루다. 아아, 그제 아침에 마데이라 섬에 들러 샀던 그 설탕이구나. 설탕은 달콤해서 얼른 팔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샤가 차를 마신다, 빵에 발라먹는다 별 핑계로 야금야금 다 갉아먹을 것이다. 그것에 대비해서 요리사에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더니 아직까진 큰 문제가 없나보다.

 

"왜 그렇게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하얀 게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한데?"

"별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요. 반짝반짝한게 그렇지 않아요?"

"음...썩 그래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육지에 있을 때였어요. 어떤 할아버지한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미난 이야기? 뭔데?"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할아버지였어요. 옷차림은 남루했는데, 눈이 굉장히 맑은 분이었죠. 범상치 않다는 건 당장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매일 그 시장에 놀러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 할아버지와 친구가 됐죠. 그 할아버지가 얘기해주기를 별은 사람의 영혼이랬어요.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씨앗이 되서 하늘로 올라간대요."

 

"오호, 별이 씨앗이라...그럼 꽃도 피나?"

"그럼요.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얼만큼 훌륭한 일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느냐에 따라서 별의 밝기도 달라진대요. 마음에 드는 별을 몇 개 골라서 매일 같이 살펴보면 별빛이 달라지는 걸 금방 알 수 있어요. 점점 빛의 기운이 세지는 건 별이 꽃을 활짝 피우는 거라고 했어요"

"별꽃이 핀다...꽃이 피면 지기도 하나?"

"물론이죠. 그게 바로 혜성이죠. 저기 봐요. 하나가 떨어지잖아요."

"떨어지면 영혼도 사라지나?"

"아뇨. 거꾸로죠. 별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대요. 별꽃을 활짝 피웠던 사람은 그만큼 좋은 가정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고 하네요. 타고난 복이라고 해야하나. 결국엔 모두가 돌고 도는 거죠."

"죽어서 별이 되고, 꽃을 피운다...그리고 꽃잎이 지면 혜성으로 떨어져 다시 살아난다...저기 활짝 핀 꽃들 중엔 내 조상님들도 있겠군. 그치?"

 

"있을 거에요. 언젠가 선장도 저기 어딘가의 별이 되겠죠. 얼마나 빛이 날진 모르겠지만 ㅎㅎㅎ"

"그렇겠군. 그럼 저기 어딘가엔 내 할아버지 할머니 별도 있겠구만."

"그럼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저 별들이 자신의 조상들의 영혼이라고 믿었대요. 왜 밤 12시에 제사를 지내는지 아시겠죠?"

"별이, 아니지. 조상님들이 가장 잘 보이는 때라서?"

"그렇죠. 죽은 영혼들의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라고 하네요. 영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

"나름 일리가 있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웬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나의 조상들을 별꽃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밤이라...요리사 옆에 우두커니 앉아 몇 시간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리사 손에는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별>

 

                                        박영신

 

지상에서 심은 씨앗 중에

가장 멀리에 심은 것이 별이다.

 

떡잎 자라는 가슴이 푸릇푸릇해지는 밤.

 

오늘도 어느 별에서는 꽃이 피고 있다.

 

 

Written by 선장

 

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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