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하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인간 모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익숙해졌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인지라 알바를 하는 동안 너무도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 익숙해져 갔고, 그중 가장 ‘익숙해졌다.’ 혹은 ‘요령이 생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설거지였다.


누군가 “설거지가 힘들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설거지야 말로 지구상 남아있는 그 어떤 일보다 귀찮고 짜증남과 함께 엄청 힘든 일이라 자부할 수 있다. 아무튼 설거지는 내가 알바 하는 동안 나를 가장 괴롭힌 일중 하나였다.
내가 일하는 곳은 조리실이 작아 식기세척기가 없다. 그래서 음식과 함께 나갔던 그릇들은 고스라니 사람 손을 거쳐 설거지를 해야 한다. 그러니 바쁜 날이면 일하는 내내 싱크대 앞에 보낼 때도 있다.


 

설거지가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만 이야기 하자면 싱크대의 높이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방 기구를 설계할 때는 대부분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에 맞춰 제작한다. 내가 일했던 주방도 다르지 않은데 177cm인 내가 싱크대 앞에 설 경우 싱크대는 내 골반 정도의 높이밖엔 안 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구부정하게 되고 이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고 있을 경우 집에서는 기어 다니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으로 들고 설거지를 하면 옷이 다 젖기 태반이었고, 무거운 철판들을 몇 십 개를 들고 닦다보면 한쪽 팔이 꼭 떨어져나갈 것 만치 아팠다.


설거지 더미만 보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던 나였지만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자 나름의 요령이 생겼고, 한참을 구부정하게 있어도 견딜 만 했다. 내 허리는 구부정한 자세에 익숙해져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해도 집에서 기어 다니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나중엔 설거지 자체가 익숙해진 나머지 아무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가 편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이가 갈리도록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도 익숙해지자 한편으로는 마음편안 일이 되었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게 마련이고 익숙해진다. 단지 익숙해지고 적응하기 전에 ‘포기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게 될 뿐이고, 사회는 그것으로 한 사람의 근성이나 책임감을 말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익숙함 둘.
설거지의 고됨이 익숙해질 무렵 나의 알바생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친구가 사장인 곳에서 일한다는 것이 이래저래 불편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마음 한편이 편했다. 한마디로 모든 게 익숙해졌다.

 

익숙함은 지금 처한 상황이나 환경 그리고 내 앞의 일들에 대한 것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익숙함도 존재한다. 나와 같이 일을 했던 아이는 나보다 3살 어린 남자였는데 이곳에서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됐다. 처음에야 서로 잘 알지 못하기에 조심스러움이 많았다.

 

어리다고 함부로 부리지도 않았고, 시킬 일이 있다면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나는 그 아이에게 점점 익숙해 졌고, 그 아이도 내가 익숙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소홀해졌다.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그 아이를 시키게 됐고, 말투는 어느새 명령조로 바뀌었다. 그 아이도 가끔 내게 짜증을 내기도 했고, 정색을 하기도 했다. 서로 익숙해졌기에 소홀해진 것이다.

 

사장인 친구와 나도 서로가 익숙해졌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관계였고, 지금은 같이 일하는 동료였다. 동료로서 우리는 익숙해졌고, 역시나 소홀해졌다.
정중히 해오던 부탁은 어느새 반강제가 됐고, 친구가 못나오는 날에는 당연히 내가 대신 일하는 게 됐다. 어느새 내가 친구를 도와서 알바를 하는 것은 원래 그랬다는 듯이 당연해졌다.  나 역시 친구의 가게라 해서 조금씩 늦는 것이 태반이었고, 말투는 까칠함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익숙해 졌고, 서로는 서로에게 익숙해진 만큼 소홀해져 갔다.


어쩌면 ‘익숙해진다’ 것의 또 다른 말은 ‘소홀해진다’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은 소홀함을 부른다. 그리고 그 익숙함에서 온 소홀함은 가까운 이마저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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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17 13:07 신고

    도망가~~~~

크리스마스가 지났다고 방심하고 있는가? 커플들의 만행이 연말의 크리스마스에만 한정되어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직 수행이 부족한 결과다.

커플들은 평소 시시각각 우리들을 위협한다. 특히 주 5일제가 확립되어가는 가운데 커플들은 주말에 살판난다. 그 덕에 우리들은 주말에 간단한 영화라는 문화 활동에 지장을 받고 있다. 거기에 주말이면 몰려드는 커플 스키족들의 뒹구는 모습에 그 곳도 안전하지 못하다.


지금은 사실 우리가 잠시 물러 서야할 때다. 조금 있으면 봄이 온다. 그리고 발렌타인데이도 온다. 그때 우리는 많은 전력을 잃게 된다. 그 시기를 이기기 위해 지금 움츠러들어야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름하야 ‘솔로를 위한 주말 허비 지침서!!’

이를 반드시 숙지해 주말에 나돌아 다녀 커플들의 공격을 받아 체력을 잃는 일은 없도록 하자. 




제1장.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

주말은 커플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주기다. 젊은 남녀가 벌건 대낮에 손을 잡고 많은 곳을 헤집고 다닌다. 공원은 물론 동네 산책로 번화가,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운동할 곳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긴 이르다. 우린 산으로 간다. 


그렇다. 아직 산에는 커플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다. 주로 노부부, 부자, 부녀가 대부분이다. 또는 혼자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남자가 더 많다. 이곳은 아직 커플들의 영역외다. 업무 스트레스로 잃었던 체력을 보충하기 아주 좋은 기회다. 


생각해보라.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애인에게 시달릴 텐가? 아니면 공기 맑고 물도 맑은 산에 올라 심신을 단련할 텐가? 커플들이 사랑을 키우는 동안 우리는 산 정상에 올라 건강과 체력을 키울 수 있다! 

단지 가끔 출몰하는 커플들이 있는데 재수 없으면 정상에 오를 때까지 계속 같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과감하게 쉬었다 가거나 빠르게 다른 등산로로 이탈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내려올 때 약수라도 한통 떠 온다면 어머니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잊지마라. 심신이 튼튼한 자 오래 산다. 





제2장. 죠리퐁을 파헤쳐라

점심 먹고 나른한 오후 2시. 무엇을 하던 심심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밖을 나가자니 커플들의 공격이 무섭다. 그럼 지금 바로 슈퍼나 편의점으로 달려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과자를 사라. 그것도 자잘하고 양이 많은 것으로 말이다. 무엇을 사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죠리퐁을 골라라.


죠리퐁을 아는가? 밥알 모양으로 초코맛이 나는 과자다. 그러면 그 죠리퐁 한 봉지에 몇 알이 들어있는 줄 아는가? 요즘 같이 질소과자가 난무하는 과자시장에서 진정성을 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세라. 몇 개 들어 있는지 세어 질소과자의 현주소를 알리자. 절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아이들 먹거리가지고 장난치는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에 대한 일타를 날릴 절호의 기회다. 


이 방법은 역사가 깊다. ‘성냥 탑 쌓기’, ‘이쑤시개 쌓기’ 등 다양하게 이어져 왔다. 단지 요즘은 성냥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과자로 대체해 사용할 뿐이다.


2시부터 부지런히 세기 시작한다면 4시~5시 사이에 모두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즐거운 예능을 시청한다면 누구보다 알찬 주말을 보내게 될 것이다.

초반 많은 양의 죠리퐁이 쉽지 않다면 그럼 ‘뻥이요’도 괜찮다. 시작이 중요하지 내용물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차츰 차츰 늘려 가면 된다. 

명심해라. 이것은 제과업계에게 일침을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제3장. 롤하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롤(LOL)을 하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시작하고 원래 하던 사람은 더욱 몰두해라. 어찌 주말에 나갈 생각이 드는가? 챔피언은 다 모았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전략과 전술은 파악했는가? CS는 잘 먹는가? 아직 미숙한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주말은 이것을 연습할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이다.

생각해보라 커플 친구 녀석이 롤을 어떻게 하는지를. 불쌍하지 않는가? 애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집중도 못한다. 집중을 못하니 팀은 지고 팀원들에게는 민폐가 된다. 


반대로 게임에 집중했을 경우 애인의 카톡이나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해 애인은 삐진다. 삐져서  풀어주려고 전화 걸어야 하고 걸어서 “오빠가 미안해”했더니 “오빠가 뭐가 미안한데?”라고 말하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른 체 다시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래도 안 풀리면 온갖 애교를 다 떨어야한다. 이게 도대체 뭔가? 나의 아름다운 주말을! 도대체 왜 이렇게 보내야하는가? 


우린 정말 행복하다. 무엇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린 행복하고 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우린 정말 행운아다. 

명심해라. 남자에게 협동은 아름답다.


written by 저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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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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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가 엎드려 아룁니다. 당선이 되셨다는 소식을 저 멀리 바닷가에서 듣게 되었나이다. 그 은혜에 어찌할 줄 모르겠사오며, 황송스럽고 감격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여 미약하나마 그림과 꽃씨를 공물로 올리옵나이다. 

 

 

 

 

소인네 해적들 사이에서는 님을 마리앙뜨와그네로 칭송한답니다. 뵙기를 기약하기 어려우매 사모함이 그지없으니 다만 거센 바닷바람을 만나 멀리 님의 단아한 용모를 상상하고, 매양 달 아래서 새벽빛을 읊조리며 속절없이 꿈속에서 그리워할 뿐입니다.

 

소인은 바닷가에 있는지라 달려가 알현하지 못하옵나이다. 애오라지 편지로써 만나 뵙는 걸 대신하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제 본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위엄을 범한 듯싶사오나 은혜와 연모의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나이다. 황송스러울 뿐입니다. 삼가 감사드리며 편지 올립니다.

  

+사진 출처 : http://flara_flami.blog.me/


Written by 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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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게 드리는 글. 


선생님, 글은 중독인가 봅니다. 


쓰면 쓸수록 힘에 겨우면서도, 논리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몰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 신이 나고 재미가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직접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글을 통해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생각을 공유하고, 비판하고, 내 시각에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것들이 결국 사람과의 진정한 만남이 아닌가,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배가 고파야, 상황이 절실해야 글이 써진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배가 고픈만큼 글에 대한 열정도 고픕니다. 그리고 설사 나중에 배가 불러도 글에 대한 열정이 식히 않기를 기도해봅니다. 


슬램덩크에서 정대만이 감독님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지금의 제 심정입니다. 


Written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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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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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시쯤 되었으려나. 급 졸음이 쏟아져 이제 막 단잠에 든 참이었는데 갑자기 아이폰이 ‘붕붕붕’하고 울린다. 실눈 뜨고 보니 친구 놈이다. 아...이 놈 특성상 십중팔구 술 마시러 나오라 할 것은 뻔한 것. 그리고 지금 딱 요 시간대에 전화를 걸었다는 건 어디서 이미 한 잔 시원하게 걸치고 신이 난 상태임이 분명하다.


‘으으...하필 또 지금 깨우고 지랄이냐...ㅠㅠ...아...꺼두고 잘 걸ㅜ’. 급격한 후회감이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거절을 누른다. 허허, 이 새끼 봐라. 또 건다. 또 안 받았다. 다시 또 건다. 안 받았다. 이게 벌써 한 3, 4년 되었나보다...어느새 부터인가 이놈과 나는 이런 ‘전화걸기&거절하기’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놈도 꽤나 더러운 오기가 있다. 받을 때 까지 건다. 역시 또 ‘붕붕붕’이다. 에이 젠장, 어차피 잠 깼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터치.


“여보세요.”

“씨발 연애인이냐. 전화 전나게 처안받네.”

“잠 좀 자자 쌰발탱아. 넌 어디서 또 술 처먹었냐?”

“알 꺼 없잖아.”

“알 꺼 없으면 끊어 븅신아.”

“니네 집 앞이야. 나와.”

“아니 또 왜 우리 집 앞엔 와서 자는 사람을 나오래냐ㅜㅜ 난 내일 어떡하라고ㅜㅜ”

“그냥 죽어 내일. 나랑 마시고 오늘 죽던지.”

“뭔 일 있냐?”

“일단 나와 임마.”

“기다려. 세수만이라도 하고 나갈 테니까.”


날씨가 제법 쓸쓸하다. 츄리닝 바지에 후드 하나 걸치고 큰길가로 나오니 저 지하철 출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빠는 인간 하나 보인다. 뭐에 신이 났는지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막 쿵쿵 뛰고 혼자 지랄 염병을 한다. 날씨도 거지같고, 기분도 거지같다.


“소주 좀 빠셨구만. 누구랑 마셨냐?”

“누구랑 먹긴. 혼자 마셨지.”

“예예, 아주 잘 하셨습니다. 이젠 혼자서도 잘해요”

“응, 나 혼자서도 술 잘 마셔요~~”

“어디서 애교야 븅신이.”

“야, 치킨 먹자. 배고프다.”

“밥은 먹고 다니냐?”

“밥...? 뭐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래. 가자. 치킨을 먹든 뭘 먹든 먹자.”

 

지천에 널린 게 치킨호프라 어딜 갈까 두리번거리는데, 저 앞에 무슨 고인돌에 나올 것 같은 희한한 바위 모양 인테리어의 치킨호프집이 보인다.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도 별로 없고, 조명은 어두운데 시뻘건 느낌도 나고 해서 우중충한 맛이 아주 지금의 마음 상태와 딱 맞아 떨어진다. 나쁘지 않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마셨어?”

“아~~나 맨날 가는데 있잖아. 종로 공평빌딩 옆에 포장마차 거기. 이모, 여기 참이슬 클래쉭으로 시원한 거루요.”

“하여튼 마차는 우라지게도 가요.”

“거기 이모네 뚫었잖아 내가. 가면 서비스 완전 많이 주지. 그건 그렇고...오늘 자축 기념도 좀 할 겸 같이 술이나 한잔 할라고 불렀다.”

“뭘 기념 하실라고? 아 이 새끼 또 자작하네.”

 

주인이 소주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혼자 흔들어대더니 뚝 다서는 지 혼자 따라 마신다. 그런데 참 이 놈은 술을 맛있게 먹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술을 넘기는 소리가 좋다고 해야 맞겠다. “꾸울꺽”하는 큰 목젖소리와 함께 “크우~”하고 소리를 내지르면 생각 없던 상대방도 술이 울컥 밀려온다. 한잔 받아 마시고 있으니 밑반찬으로 과자랑 김치가 나온다. 환상의 조합. 헛웃음만 난다. 치킨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고...둘이 김치만 집어먹는다.

 

“야, 너 이력서 써 봤지?”

“맨날 하는 짓이 그 짓인데 뭘 물어보냐?”

“내가 오늘 몇 번째 이력서 낸 줄 아냐?”

“몇 번 짼데?”

 

대답을 미루고 또 한잔 스스로 따라 마신다.

 

“천천히 마셔 새끼야. 누가 너 안 쫓아와.”

“내가 내 컴 들어가서 다 세 봤거든? 오늘이 99번째더라구.”

“야. 그거 멋있다. 무슨 여우가 아흔 아홉 번째 인간 잡아먹고 하나만 더 잡아먹으면 승천하는거 뭐 그런거 같은데?”

“하여튼, 지 전공 아니랄까봐 지 같은 소리만 한다.”

“그래서 어디 면접 보러 오라는데 있어?”

“그랬으면 내가 거기 갔겠지 널 불렀겠냐?”

“........그래 마셔라. 먹구 승천해라.”

“우리 99번째 기념으로 빠져 죽을까?”

“어디 가서 죽을래? 참고로 난 안 죽는다.”

“가까운데 있잖아~청계천!”

“븅신 삽질아. 개울에 누우면 참 잘도 빠져 죽겠다. 아니다. 비둘기가 와서 죽은 놈인 줄 알고 떼로 몰려와서 뜯어먹을 수도 있겠다. 지금 가서 누워.”

“그럴까? 하하하.”

 

누구 노래 제목 마냥 이 놈 웃는 게 정말 웃는 게 아니다. 입술을 삐쭉삐쭉 대고, 천장을 쳐다보기도 하고 턱수염은 텁텁하게 자라 덥수룩한 꼴이 정말 말이 아니다. 그러더니 이내 땅이 꺼지도록 고개를 숙인다. 가만히 턱을 괴기도 하고, ‘스윽스윽’ 라이터 불을 테이블에 자꾸 그어대기도 한다. 담배는 피우지도 않으면서.

 

“너 테이블 값도 내고 갈래?”

“야.”

“왜?”

“이력서가 뭐냐?”

“뭔 뜬금없이 이력서가 뭐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되냐?”

“그니깐 이력서가 뭐냐고?”

“이력서는 ‘나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랑 질 좀 하는거 아냐? 그짓말도 좀 쳐 가면서.”

“아 이 새끼 뭘 좀 아네. 한잔 먹자.”

 

‘짠’하고 부딪히니 뜨끈한 후라이드 치킨이 나왔다. 밤늦게 나와 별로 땡기진 않았지만 빈 속의 술도 싫어서 다리 하나 잡고 우걱우걱 뜯어먹었다. 그런데 맛이 썩 없다. 쉣이다. 맛도 없으니 닭도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 집 다신 오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다.

 

“아는 놈이 왜 묻고 그래?”

“그냥...아...요즘 내가 왜 전공을 철학을 했을까...뭐 그런 생각을 한다.”

“허허, 슈퍼 O대 엘리트 대철학자님께서 웬 신세타령?"

“그래서 더 괴로운 거 같아.”

“왜? 이력서도 철학적으로 보이냐?”

“오케이! 바로 그거지 하하하. 그럼 안 되는데. 이력서는 그냥 이력서고 나는 그냥 난데 말야. 근데 말야. 신기해. 이력서를 이것저것 쓰다 보면 그 회사에 내가 맞춰줘야 하잖아. 아는 척도 좀 해야 되고. 그렇잖아? 그런데 그 맞춤형 이력서를 쓰다보면 있잖아. 어느새 내가 수십 가지의 인간으로 변신을 하는거야. 아, 그래. 처음엔 변신이라고 생각했어. 근데...이게 한 육십 개 칠십 개가 넘어가니까 이건 변신이 아니고 분열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킵 고잉.”

“내가 만약에 고양이라고 하자. 그런데 A회사에서 범을 뽑는다치면 나는 억지로 범이라고 구라를 치는 거지.”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안 배웠냐?”

“개소리 말고 들어봐. 여기선 범을 뽑고, 저기선 독수리를 뽑고, 다른 곳에선 사자를 뽑아. 어! 저기선 악어를 뽑네. 근데 난 고양이란 말야. 태생이 고양이인거야. 그럼 나는 말 그대로 종이 짝에 범이고, 독수리고 크레파스로 쓱싹쓱싹 그려서 얼굴에 갖다 붙이고 그럴 듯하게 분장도 해서 이력서라는 틀 안에 싹 맞춰서 응시원서에 끼워 넣는다는 거지. 처음엔 썩 나쁘진 않았어. 내가 글발이 밀리는 것도 아니고...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가 색깔을 임시방편식으로다가 바꾼다라는 그런 생각보다는, 그나마 고양이였던 나마저도 서서히 없어지는 거야. 너도 인문학해서 알잖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왜 고양이도 없어지지?”

“이치는 간단하지. 두 가지야. 먹이사슬의 최정상에 있는 육식동물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해도 해도 안되니까 그 바로 아래애들 있잖아. 하이에나라든지 까마귀라든지 걔네들 말야. 왕급 클래스 애들이 먹은 거 기웃대고 있다가 걔내들 다 먹고 떠나면 2차로 투입해서 남은 고기 뜯어먹는 애들, 딱 고 스펙느낌으로 바꿔 보는 거지. 그래, 요 정도면 나도 먹히지 않을까? 그래, 고양이도 그런 애들이잖아. 아니, 살쾡이라고 해야 맞나? 암튼 우리가 다 먹고 버린 쓰레기봉투 뜯어서 뭐 먹을꺼 있나 킁킁대고 하잖아.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말야. 일단 한잔 먹고.”

“아주 이젠 자작이 생활이구나.”

“냅둬~먹다 뒤지게. 하여튼 중요한 건 나는 지금 그 고양이 취급마저도 못 받는 거야. 너 까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난 너보다 연구 실적이 더 많아. 넌 영어 안되지? 난 영어 점수도 높아. 그나마 시카고에서 좀 살았다고 대충 이빨로 까불어 댈 수도 있어. 근데도 안돼. 고양이 수준으로도 취급 못 받는 거야. 왜 인줄 알아? 나 같은 놈들이 지천에 널렸거든. 그리고 난 인문학 전공자야. 갈 데가 영업 밖에 없어. 그런데 그 영업도 뭐 인턴? 지랄들 하고 있네. 작년에 그거 6개월 하고 끝. 없어. 디 앤드. 오케이?

“그래서, 난 과연 고양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뭐 이런 회의감이 든다 이거지?”

“그렇지. 난 그냥 고양이도 아니고, 생쥐도 아니고, 뭐 방아깨비 정도라고 하면 맞나? ㅋㅋㅋㅋㅋ.”

“옛날에 방아깨비 진짜 많이 잡았었는데, 요즘은 방아깨비도 없다.”

“그래. 다 제쳐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고양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있기야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말야. 그나마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마저 이젠 갈기갈기 찢어진거야. 이 개 같은 99번째 이력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말이지. 이젠 변신이 아냐. 분열이야. 분열된 이 상태에서 온전한 고양이였던 나마저 의심스러워 지는거지. 너 그거 아냐? 미국 유명 영화배우들은 한 작품 끝나면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약 반년을 정신치료를 받는대. 그게 정석이라고 하더라. 나도 영화를 꽤 많이 찍었지. 면접도 연기잖아 안 그래? 그리고는 치료는 받지 않았지. 히스레저도 그래서 죽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 철학이 니 발목을 제대로 잡고 있구나. 내가 얘기 하나 해줄까? 우린 크게 두 가지 포인트를 간과하는 실수를 했어. 첫째, 대한민국은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2만불? 선진국? 멀었어. 당장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공자왈 소크라테스왈이고 지랄이야. 알게 뭐야? 뭐 헤겔? 따귀 맞아 ㅋㅋㅋㅋㅋ. 둘째, 공부를 열심히 하면 돈도 따라올 것이다. 너도 수도 없이 봐서 알지? 공부 열심히 안한 사람이 취직 더 잘해. 아니. 아예 공부 안하고 장사하는 애들이 더 잘 나가. 어깨 쫙쫙 피고 다녀 걔네들은. 왜? 돈이 있으니까. 우리는 왜 쫄고 있냐? 돈이 없으니까. 우린 그냥 학문적인 만족만 하고 산거야. 나쁘게 말하면...일종의 자위행위와도 같지.”

“어디 좋은 데 갈까 우리?”

“그럴 돈 있으면 보약이나 쳐 지어먹어라 새끼야. 얼굴은 그지 꼴을 해 가지구...근데 말야.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렇게 죽을상은 하지마. 니 말대로 넌 그냥 고양이야. 니가 도저히 변신이고 분열이고 못해먹겠다 싶으면 그냥 더 고양이다워지는 방법을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 아예 고양이 인간이 되버려. 그럼 나중에 널 진짜 고양이로서 인정해 줄 사람들의 군이 분명히 만들어질 테니까. 그 때를 기다려. 지금 변신하고 분열해서 근근이 버티는 그 애들도 분명히 죽어나고 있어. 주위에서 꺼내달라고 외치는 애들이 태반이야. 왜?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까. 돈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핑계를 만들어서 거대한 거짓말 성을 쌓고 있는 거야 걔네들도.”

 

이 놈 한참 떠들어대더니 한 동안 말없이 계속 술만 따라 마시고 있다. 이젠 안주도 안 먹고 그냥 연거푸 따라 마시고 있다. 벌써 시계는 열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내일 아침의 피곤도 슬슬 걱정된다. 이 놈 몸 걱정도 된다.

 

“야, 치킨 남았어. 같이 먹어 속 버린다.”

“그래서 나는 하나 결심한 게 있어.”

“뭔데?”

“자작을 해야겠다 이거지.”

“참 좋은 결심입니다. 지랄을 하세요.”

“그거 아냐? 내가 유일하게 나라고 인식할 수 있는 때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작할 때, 딱 그때더라구. 이젠 누가 따라주는 술도 싫어. 술은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술 아니냐? 내가 좋아서 먹는 술, 내가 스스로 먹는다. 완전 좋은 뜻이 담겨 있는 거라구! 다분히 자기주도적이라고나 할까?”

“말은 서커스다. 야, 그만 마시고 가자.”

“요거 몇 잔 안 남았다. 다 마시고 가자.”

 

호프집에서 나오니 이제 막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까보다 날씨가 더 추워진 것 같다. 어쩌면 날씨가 아니라 마음이 추워진 것일 수도 있겠지.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일상의 그 놈으로 돌아와 이 농담 저 농담 까불어대고 있다. 어제 소개팅을 했는데 여자애가 말투가 영 재수가 없었다는 둥, 아침에 엄마랑 대판 싸우고 나와서 들어가기 싫다는 둥 별 소리를 다 지껄여댄다. 택시가 오니 바로 뒷 자석에 쏙 들어가 앉아버린다. 가면서 한 소리 한다.

 

“야, 너도 심심하면 집에서 혼자 자작해라.”

“지랄 말어. 나 당분간 술 끊는다. 술 먹자고 부르지마. 가 임마.”

“전화할게! 쉬어!”

 

택시타고 가는 폼이 아주 누워서 가는 꼴이다. 그래. 이력서가 이 고양이를 해치고 있었구나. 이 철학도의 꿈을 분열시켜버렸구나. 나쁜 이력서구나. 그래도 말이다. 큰 걱정은 없다.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실 때 유일하게 자신이 고양이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직 녀석에겐 치고 나갈 힘이 있다고 느껴진다. 자신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 술을 마실 수 있다.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력서가 아니라 자작이다.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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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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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진짜 오래간만이다”

 

영풍문고 음반 코너에서 기웃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로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노○○형이다. 안본 사이에 몰라보게 살이 빠진 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형과 나는 한 학년에 1반, 반 인원수 30명, 전교생을 합쳐도 180명이 채 되지 않는 사립학교 출신의 동문이다. 당시 방송매체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열린 교육 1세대’다. 형은 ○○국민학교 3회 졸업생, 나는 4회 졸업생이다. 조그마한 건물 한 채에 매일같이 오고가며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함께 생활해 온 까닭에 오늘처럼 서로 갈 길 가다 마추져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그런 정도라 보면 되겠다. 그리고 형과 나는 오랜 시간 같은 동네에 살면서 이곳저곳 골목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럭저럭 인사를 주고받은 전력이 있어 이런 우연찮은 만남도 결코 부담스럽지는 않다.

 

“오랜만에 봤는데 커피라도 한잔 할래?”

평소처럼 그럭저럭 인사를 주고받고 지나갈 줄 알았는데 오늘은 예외인가보다.

“좋죠. 마침 커피도 땡겼는데!”

곧장 서점 지하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다.

“뭐 마실래?, 메뉴 불러. 내가 너한테 얻어먹을 수는 없잖냐”

잘 빠진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돈다. 허허, 그러고 보니 이 정도 얼굴값이면 여자 여럿 따라붙을 상이다. 달걀형 얼굴에 오똑한 콧날, 안정적인 눈매와 시커먼 숯 눈썹에 쌍꺼풀까지 졌다. 머리도 이래저래 잘 만지고, 옷걸이에 옷발도 제법 받네 그려. 살이 쏙 빠지니 새삼스레 그의 외모를 다시 보게 된다.

 

가방 놓고, 짐 놓고 하는 사이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라떼 한잔이 나왔다. 머그잔으로 시킨 걸 보니 금방 헤어질 생각은 아닌 듯싶다.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넘기기 무섭게 동시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찌찌뽕. 내가 먼저 썰을 풀었다. 전공은 인문학을 했고(어차피 세부전공 이야기해봐야 대부분 알아듣지 못한다), 재미없는 직업에 염증을 느껴 이탈을 시도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미디엄 수준의 이야기로 그 동안의 라이프 스토리를 노릇노릇 구워줬다.

“그렇지, 우린 부속품이 될 수 없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던진 형의 단호한 한 마디다. (뭐 꼭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형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 역시도 그 동안의 애환, 방황, 고민의 웅덩이에서 한참을 허우적댔고, 나름대로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는 노력이 역력해 보였다. 그 역력함의 흔적이 눈가에 진 검은 그늘과 빼쪽 마른 형의 몰골에서 드러난다. 우리나라 3대 대학 안에 손꼽히는 그 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취직은 건축회사로 했단다. 그것도 모두가 회피하는 현장직으로 말이다. 이력서를 내다내다 안되다 보니 결국 그 진로를 선택한 모양이다. 뭔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느낌에 반년도 채우지 않고 사표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8개월 동안 로스쿨을 준비했는데, 점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로와는 맞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의 마지막 무기인 ‘일본어 능통자’로서의 능력을 살려 통번역 대학원 쪽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여자 친구는 있어?”

형의 두 번째 질문이었다.

“예, 있어요.”

물어보는 투가 왠지 모르게 ‘난 없는데 넌 있니?’로 들린다. 역시나 예상은 맞았다.

“야, 그래도 넌 여자 친구 있으니까 살만하겠다. 난 공부한답시고 친구들이랑 다 연락 끊고...그렇다고 집에 자꾸 있기도 미안하고, 그래서 이렇게 학원 끝나면 카페오고, 카페에서 공부하다 또 학원가고 그냥 그렇게 지낸다.”

“그건 맞아요. 저도 여자 친구 없었으면 병원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에이 그리고 형, 형 정도면 여자가 줄줄이 따라 붙을 것 같은데요. 얼른 여자 친구 만드세요. 제가 어떻게 소개팅 해드려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졌다.

“에이 내가 뭘 딱히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만들면 뭐하냐. 나중에 자리 잡으면 그 때 가서 만들던지 해야지.”

‘자리 잡으면’이란 if형의 그 말이 비수에 꽂힌다. ‘자리를 잡으면 무엇 무엇을 하겠다’. 어딜 가나 내 또래와 그 주변에서는 남녀누구 구분할 것 없이 사방팔방에서 남발하는 말이다. 무슨 얼마나 대단한 자리가 있길래 우리는 에브리데이 ‘자리를 잡겠다’고 외치는 것인지 이제 뭐가 뭔지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자리’라는 용어가 아예 우리 88만원 세대의 고정멘트에 녹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겹친다.

“자리를 잡는다...자리를 잡는 게 뭘까요 형?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자리 찾다가 좋은 거 다 놓치겠다 싶기도 해요. 그래서 전 요새 그냥 자리고 뭐고 다 제쳐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요.”

씁쓸하게 웃어대니 형도 따라 웃는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뭘 하고 사냐?”

“음...일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글도 쓰고 하죠.”

“글? 글은 무슨 글을 쓰는데?”

“그냥 전공 따라 논문도 쓰고요, 지금까지는 논문 위주였죠. 우리 쪽 분야로다가 좀 쓰다가 보니까...근데 공급을 해도 수요가 없으니 휴지조각이랑 다를 바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방향을 좀 틀어서 문화콘텐츠 쪽으로다가...아, 형 로스쿨 준비하셨다면서요? 문화산업이랑 관련해서 법도 좀 아세요? 제가 요번에 그 쪽으로 논문 하나 썼는데.”

논문 얘기에 문화산업이 어쩌구저쩌구 떠들어대니 형의 눈빛이 빛난다.

“논문이면 너 지금 대학원 다니니?”

“졸업은 했구요. 그냥 이젠 실험삼아 반 취미삼아 반 그렇게 논문은 계속 내고 있어요.”

“혹시 그 글 볼 수 있냐?”

마침 가방에 논문 하나 갖고 있었던 게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야, 니가 이런 글도 쓰고...이런 일 했구나 너. 고학력자네!”

“석사가 무슨 고학력자인가요. 그냥 어중간한 나부랭이 정도죠. 어디가서 이거 가지고 명함 내밀면 웃어요.”

“야, 그래도 나보다 너가 훨씬 전문적이고 가능성 있어 보인다.”

“전, 형이 더 그래 보이는데요.”

“너 이 책 딱 한 권 갖고 있는 거야?”

“아뇨. 필요하시면 갖고 가세요.”

“야 고맙다. 내가 학원 끝나고 진지하게 한번 읽어볼게. 너 재밌는 일 하는구나.”

“하하, 글쎄요.”

형이 학원 수업이 있다 길래 우리는 곧 잔을 마저 비우고 일어섰다. 영풍문고를 빠져나와 연락처를 주고받는데 형이 무거운 말 한 마디 남긴다.

“야, 이 커피숍 생활도 얼른 때려 치고 싶다.”

“아 그럼요.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형 정도면 분명히 좋은 자리 잡으실 거에요.”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오는데도 눈치 보이고, 학원에 가면 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고, 카페 오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정말 못해먹겠다. 하하, 내가 나중에 자리 잘 잡고 한번 제대로 밥 살게. 아니, 야 술이나 한잔 하자”

“술도 좋죠 형. 조심해서 가세요. 연락드릴께요.”

 

얼마나 외로웠으면 지나가다 마주친 동네 동생을 데려다가 커피 시켜 놓고 이런 얘기를 했을까 싶다. 형이 하루 빨리 커피숍을 벗어나 우뚝 그 ‘자리’에 서기를 바랄 뿐이다. 나 역시 커피숍에 오는 횟수를 줄여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커피숍은 마음과 현실의 도피처가 된 것일까. 


Written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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