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기 하나.


내가 일하는 곳은 주로 술을 파는 곳이긴 했지만 초저녁이면 종종 식사를 목적으로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있다. 워낙 분위기가 ‘술 먹자!’하는 분위기라 많지 않지만 찌개라는 메뉴 때문인지, 가게이름 때문인지 백반집으로 착각해 들어오는 손님들이 더러 있다. 물론 자리에 앉았다가도 식사거리가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는 다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몇 없는 식사 손님들 중에서도 혼자오시는 분들도 종종 있는데 주로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남자손님이었다. 그런 분들 역시 자리에 앉았다가도 다시 나가시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왠지 알 수 없는 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힘든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가벼운 술 한 잔으로 자신을 달래려하는 가장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직원은 그런 모습을 보며 “혼자 오는 손님은 분위기 망치니깐 받지 말자”라는 제안을 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 분위기가 나빠지는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에게 있어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은 가게의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에 대해서 많이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혼자 밥 먹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나도 어렸을 적엔 혼자서 밥을 먹거나 한 적은 없다.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사회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이웃마저도 사촌이라 칭할 정도로 오지랖 넓은 나라이다 보니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더불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불효요, 사회문제인 세상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한 인간의 성격문제이자 하자로까지 발전한 것 같다. 



혼자하기 둘.


친구로 보이는 여자 셋이서 온 손님이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영화이야기가 오가는 중 한 친구가 영화를 혼자 보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친구가 “왜 영화를 혼자 봐?”라며 그 친구를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절대로 혼자선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한 친구가 이유를 묻자 주변은 다 여럿이서 오는데 자신만 혼자 보는 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관은 왠지 혼자서 가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였다. 



같이 일하고 있는 한 친구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요즘 영화를 통 못 봐서 영화가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쉬는 날 가서 보라고 답해주자 혼자서는 영화를 안 본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원래 생활하던 집보다 조금 먼 곳에서 생활하다보니 주변에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는 영화관에 갈 수가 없어 영화를 볼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 친구가 집에서는 혼자 영화를 잘 본다는 것이다. 출근해서 어제는 뭐했냐고 물으면 곧잘 집에서 영화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집에선 혼자 보는데 왜 영화관에서는 혼자 못 봐?”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단순히 “그냥 혼자서는 영화관을 안 간다.”라고만 답했다. 


혼자 영화관을 갈 수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혼자 영화를 보진 않지만 집에서는 혼자 볼 수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땐 혼자 뭔가를 하는 것이 상관없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혼자 뭔가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그냥 혼자 영화를 못 보는 게 아니라 사람 많은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못 보는 것이다. 주변이 신경 쓰여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무엇인가 혼자 한다는 것을 조금은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정서인건 사실이다. 내 주변의 이야기나 상황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정작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주변의 정서’가 아닌 ‘사람들이 나를 어찌 생각할까하는 쓸 때 없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 정작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나라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다.



혼자하기 셋.


얼마 전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녀석과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는 우리 세 사람 말고도 처음 보는 3명의 사람도 함께였다.

초면인지라 인사가 서로 오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집에서도 종종 술을 마신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한 친구가 ‘널 이해할 수 없어’라는 표정과 함께 “집에서 왜 혼자 술을 마셔?”라는 반문을 해왔다. 그래서 대답했다. “집에 있을 때 술이 생각날 때가 있잖아. 그래서 술을 마셔. 소주 한 병 정도 마시는데 꼭 누군가를 붙잡고 술을 먹어야하는 것은 아니잖아?”라고. 하지만 이 말은 들은 친구는 더 경악을 하며 “소주를 마신다고?!”라고 소리를 질렀다.


뭐가 문제였는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에 소주를 마신다니 이건 알코올중독자나 할 짓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혼자 맥주를 먹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소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친구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마 집에서 가끔 소주랑 맥주랑 섞어서 먹을 때도 있다고 하면 기절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예전엔 ‘소주’라는 술과 ‘혼자’라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맥주를 집에서 혼자 먹는다고 하면 샤워를 마친 후 조금은 근사한 거실의 소파에 앉아 축구를 보며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반면 소주라고 하면 폐인 같은 모습으로 찌질하게 방바닥에 앉아 안주도 없이 먹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했다. 


이런 선입견 대부분은 미디어를 통해 각인된 이미지인데 매번 드라마에서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잘나가는 젊은 이사님은 집에서 맥주나 양주를 먹는 모습만 보여주니 이런 선입견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그 친구도 예전의 나와 비슷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소주는 혼자 마시면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 그 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혼자 술을 먹기 때문이었는지, 혼자서 소주를 마시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난 내 자신의 욕구에 충실히 행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대학시절 나보다 어린 친구는 집에 가다 가끔 혼자 술을 한잔하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한적 있다. 들었을 당시엔 ‘이상한 아인데?’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흘러 서른을 넘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던 나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성숙했던 아이였다. 


우리는 많은 것을 혼자하기 두려워한다. 혼자 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주변의 시선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혼자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무의미한 생각으로 정작 하고 싶은 것은 못하고 산다. 바보같이.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주변의 시선에 대해 신경 안 쓰기로 유명했다. 시장 한복판에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자위행위도 서슴없이 할 정도로 그는 주변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본인 욕구에 충실했던, 그리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산 디오게네스는 행복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알렉산더 대왕이 다시 태어난다면 디오게네스로 살고 싶다고 했겠는가. 

뭐든 혼자 한번 해보자.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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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17 02:49 신고

    알찬 정보 좋네요~


서투름 하나.


살아오면서 알바를 많이 했지만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음식을 했던 적은 없었다. 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삶고, 볶고,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만드는 음식은 사실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요리를 많이 해본 적 없는 난 요리를 하는 것이 서툴렀다.


찌개를 끓일 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만들었고, 볶음 요리를 할 땐 팬을 돌리는 게 서툴러 데이기 일쑤였다. 고기는 너무 오래 삶아 다 흐물흐물해질 때도, 너무 불을 일찍 꺼 덜 익히기도 했다. 상품으로 내놓는 요리가 처음인 나였기에 서툴러 벌어진 일들이었다. 특히 내가 가장 서툴렀던 것은 칼질이었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 꼬박꼬박 먹고 다녔던 난 칼질이라고는 피자나 스테이크 먹을 때 써봤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랬던 내가 요리를 하기 위해 양파를 썰고 파를 다지고 하니 내 손은 남아나질 않았다. 툭하면 베이고 긁혔고 손에 반창고가 떨어진 날이 없었다. 한번은 칼에 베인 상처를 그냥 두고 일을 했다가 세균이 침투, 감염되어 깁스를 하기도 했으니 이쯤하면 칼은 나에게 있어 흉기나 다름없었다. 서투른 칼질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해져가는 칼질을 보며 뿌듯함과 재미를 주기도 했다.


지금은 칼에 베이는 일도 없어졌고 칼질 속도도 엄청 빨라졌다. 찌개는 짜지 않게 끓이게 됐고, 고기는 적당히 잘 익어 맛이 좋았다. 처음엔 모든 것이 너무 서툴기만 해 힘들고 어려워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한 가득이었다. 베인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를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도 들고 괜한 재능 탓도 하곤 했다. 


하지만 처음엔 모두들 그렇게 서툴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서툴렀기 때문에 재미있었고, 웃을 수 있는 일도 많았다. 모든 것이 능숙해져 심심해진 지금, 오히려 서툴렀기에 즐거웠던 그때를 생각하며 웃고는 한다.



서투름 둘.


세상살이가 난 항상 서툴렀다. 일도 사랑도 모든 것이 서툴렀던 것 같다. 처음이었기에 ‘그럴 수 있어.’라고 달래보아도 실수했던 것들을 생각날 때면 그저 기억을 지우고 싶다. ‘그땐 왜 그랬지?’, ‘그러지 말걸.’이라며 스스로 반성도 해보지만 뒤늦게 드는 후회일 뿐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이성과 교제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그 사람에게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보면 정말 ‘쓰레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투른 연애를 했다. 


술에 취해 늦게 전화하기도하고 했고 알바 때문에 힘든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된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준 적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그걸 그 자리에서 고치려 했다. 배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서투른 연애는 당연히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이었기에 서툴렀어.’라고 말하기에는 잘해준 것이 너무 없어 지금 생각해도 미안함과 후회뿐이다. 지금 어디에서 우연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꼭 사과를 하고 싶을 정도다.

후회만 남긴 첫 연애가 약이 됐는지 다음 연애는 조금이나마 배려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실수를 하고 같은 이별을 반복하며 다시 후회를 했다. 


나의 20대는 ‘잘했다!’라는 뿌듯함 보다는 ‘왜 그랬지?’하는 후회가 더 많다. 30대가 된 지금 생각해도 이불 뻥뻥 찰 정도의 부끄러운 실수도 많았다. 그래도 후회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서투른 실수 속에서 난 많은 것을 배웠고 성장했다.


서투름은 항상 실수를 부른다. 하지만 세상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해 간다. 어쩌면 서툴다는 것은 성장할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서툴러 실수투성이였던 그 시절이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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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8 10:59

    비밀댓글입니다

 


 

익숙함 하나.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인간 모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익숙해졌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인지라 알바를 하는 동안 너무도 힘들었던 것들에 대해 익숙해져 갔고, 그중 가장 ‘익숙해졌다.’ 혹은 ‘요령이 생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설거지였다.


누군가 “설거지가 힘들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설거지야 말로 지구상 남아있는 그 어떤 일보다 귀찮고 짜증남과 함께 엄청 힘든 일이라 자부할 수 있다. 아무튼 설거지는 내가 알바 하는 동안 나를 가장 괴롭힌 일중 하나였다.
내가 일하는 곳은 조리실이 작아 식기세척기가 없다. 그래서 음식과 함께 나갔던 그릇들은 고스라니 사람 손을 거쳐 설거지를 해야 한다. 그러니 바쁜 날이면 일하는 내내 싱크대 앞에 보낼 때도 있다.


 

설거지가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만 이야기 하자면 싱크대의 높이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방 기구를 설계할 때는 대부분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에 맞춰 제작한다. 내가 일했던 주방도 다르지 않은데 177cm인 내가 싱크대 앞에 설 경우 싱크대는 내 골반 정도의 높이밖엔 안 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구부정하게 되고 이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고 있을 경우 집에서는 기어 다니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으로 들고 설거지를 하면 옷이 다 젖기 태반이었고, 무거운 철판들을 몇 십 개를 들고 닦다보면 한쪽 팔이 꼭 떨어져나갈 것 만치 아팠다.


설거지 더미만 보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던 나였지만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자 나름의 요령이 생겼고, 한참을 구부정하게 있어도 견딜 만 했다. 내 허리는 구부정한 자세에 익숙해져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해도 집에서 기어 다니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나중엔 설거지 자체가 익숙해진 나머지 아무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가 편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이가 갈리도록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도 익숙해지자 한편으로는 마음편안 일이 되었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게 마련이고 익숙해진다. 단지 익숙해지고 적응하기 전에 ‘포기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게 될 뿐이고, 사회는 그것으로 한 사람의 근성이나 책임감을 말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익숙함 둘.
설거지의 고됨이 익숙해질 무렵 나의 알바생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친구가 사장인 곳에서 일한다는 것이 이래저래 불편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마음 한편이 편했다. 한마디로 모든 게 익숙해졌다.

 

익숙함은 지금 처한 상황이나 환경 그리고 내 앞의 일들에 대한 것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익숙함도 존재한다. 나와 같이 일을 했던 아이는 나보다 3살 어린 남자였는데 이곳에서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됐다. 처음에야 서로 잘 알지 못하기에 조심스러움이 많았다.

 

어리다고 함부로 부리지도 않았고, 시킬 일이 있다면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나는 그 아이에게 점점 익숙해 졌고, 그 아이도 내가 익숙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소홀해졌다.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그 아이를 시키게 됐고, 말투는 어느새 명령조로 바뀌었다. 그 아이도 가끔 내게 짜증을 내기도 했고, 정색을 하기도 했다. 서로 익숙해졌기에 소홀해진 것이다.

 

사장인 친구와 나도 서로가 익숙해졌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관계였고, 지금은 같이 일하는 동료였다. 동료로서 우리는 익숙해졌고, 역시나 소홀해졌다.
정중히 해오던 부탁은 어느새 반강제가 됐고, 친구가 못나오는 날에는 당연히 내가 대신 일하는 게 됐다. 어느새 내가 친구를 도와서 알바를 하는 것은 원래 그랬다는 듯이 당연해졌다.  나 역시 친구의 가게라 해서 조금씩 늦는 것이 태반이었고, 말투는 까칠함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익숙해 졌고, 서로는 서로에게 익숙해진 만큼 소홀해져 갔다.


어쩌면 ‘익숙해진다’ 것의 또 다른 말은 ‘소홀해진다’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은 소홀함을 부른다. 그리고 그 익숙함에서 온 소홀함은 가까운 이마저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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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17 13:07 신고

    도망가~~~~


내가 일하는 곳은 보쌈을 메인메뉴로 하는 퓨전 주점이다. 즉, 술을 파는 것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다. 그렇다보니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의 취한 모습을 보고는 한다. 사람마다 성격이 각각 다르듯이 사람마다 취한 모습도 정말 다양한데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가장 대중적 유형은 고성방가형이다. 취기가 오른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 유형으로 잔이 돌면 돌수록 목소리가 커진다. 술도 먹고 귀도 함께 먹은 건지 점차 대화의 데시벨은 높아져 아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한 테이블의 목소리가 커지니 조용히 대화하던 다른 테이블은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니 자연스레 다른 손님들도 목소리가 커진다. 이는 연쇄반응처럼 조금씩 퍼져 나중엔 술 마시는 사람 모두가 소리를 지르는 상황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까지 오면 혹여 옆에 있는 손님과 싸움이라도 날까 조마조마하다. 



다음으로 호랑나비형. 사람이라면 술을 마시게 되면 자연스레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심하게 비틀거리다 못해 제대로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잠시 졸았는지 뒤로 넘어가는 사람, 화장실 갔다 와 의자에 앉으려다 비틀거려 넘어지는 사람, 일어나다 넘어지는 사람 등 아주 다양하다. 그나마 넘어져도 본인의 테이블에 피해를 주면 상관없지만 넘어지는 사람 대부분이 주변 다른 테이블에 피해를 주곤 한다. 이 역시 손님 간 싸움이 날까 조마조마하다. 더불어 넘어진 손님을 보면 일으켜 줘야하는지 쪽팔릴지도 모르니 모른 척 해야 할지 참 애매하다. 이 두 가지 유형은 가장 보편적인 유형으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취한 모든 손님이 꼭 다른 손님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데 파괴지왕형의 경우 일하는 직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 파괴지왕형은 말 그대로 테이블에 놓여있는 기물을 다 파괴한다. 아주 파괴왕이 따로 없다. 술잔, 술병, 메뉴판, 수저통 그들에겐 자비란 없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파괴된 기물을 채우고 정리하는 직원만 죽어난다. 병이 깨지면 마녀처럼 빗자루를 들고 나타나 영혼 없이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를 읊어 주며 비질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종이나 노예다. 그나마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손님들의 경우 웃으며 치울 수 있지만 너무도 태연히 “잔하나 더 주세요!”, “여기 좀 치워주세요!”하는 사람을 보면 가져다주던 잔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건 보통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많은 힘이 든다.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대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술자리는 술잔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세상이 열리고는 하는데 자기들만의 정치철학, 사회비판을 논하고는 한다. 이러한 경우를 100분토론형, 또는 끝장토론형으로 분류하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청와대, 여야당 대변인이 따로 없다. 


주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자기가 추구하는 정치색깔을 들어내는데 간혹 서로의 의견의 맞지 않을 경우 과열된 토론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자리인지라 서로 뜻이 맞아 함께 현 정부를 욕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막을 내리고는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정치나 사회가 아닌 철학이나 문학을 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로 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한번은 온갖 진상을 다부리는 손님들이 김수영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데, 대화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하는 행동은 그냥 개차반이니 김수영이 웬 말인가 싶었다.


술은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는데 묘한 힘이 있다. 그리고 술은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 그래서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 평소 하지 못한 말들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취중진담형이 바로 그 경우다. 

취중진담형의 경우 남여 단둘이 온 손님들 사이에서 많이 보이는 유형인데 어떤 진솔한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꼭 한명이 운다. 대게 여자가 우는 경우가 많은데 분위기가 좋다가도 돌아보면 여자가 펑펑 울고 있다. 울음을 그치고 다시 분위기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명이 자리를 뜨고 다른 한명이 쫓아가는 상황으로 마무리되고는 한다. 그리고 가게 밖에서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저 우리는 ‘싸웠나?’하고 유추할 뿐이다. 그렇게 울고 짜고 한 손님들이 다시 가게에 찾는 일은 거의 없다. 아마도 쪽팔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누구나 술에 취한다. 술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술에 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지, 술을 절제 할 수 있는 사람과 절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절제에 실패한 사람은 잠시 자기 자신을 잃어 행동하고 주변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취했다고 말한다. 


주변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술을 마셔야할까 싶지만 한편으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빡빡한 세상에서 술마저도 없다면 어찌 살까 싶으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 심정이다. 


어쩌면 우리가 술에 취하는 것도 지독히도 빡빡한 생활 속에서 잠시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한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아! 그래도 만취는 주변을 힘들게 하니 술은 적당히가 좋은 것 같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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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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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를 시작했다직장이 아닌 알바를 선택하게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생계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서였다아무래도 직장을 잡게 되면 본의 아니게 많은 시간을 직장에 쏟게 된다그 점이 싫었다그나마 알바는 시간조절도 자유로운 편이고 책임감면에서도 자유로울 테니 직장보단 나을 거 같았다또 한 가지는 친구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녀석이 작년에 주점을 오픈했다급하게 일손이 필요했고 잠시 가게 좀 도와 달라 부탁을 해왔다모르는 곳에 알바를 하는 것보단 그래도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그 제안을 수락했고그 때부터 생계를 위한 알바가 시작됐다.


알바를 시작한지 수일이 지나자 나는 특이한 질문을 받고는 했다사장이 친구인 관계로 가게를 찾은 사장 지인들은 대부분 나와 동갑내기 친구들이었다그 지인들은 나를 한번 보고는 사장 녀석에게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고친구는 내 친군데내가 급해서 도와달라고 했어라고 설명하곤 했다친구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설명을 들은 이들은 가끔 나에게 특이한 질문을 던지 곤 했다. “여기서만 일하세요?”라는.


친구 녀석이 옆에 있었다면 나를 대신해 직장잡고 일할 나이에 이곳에서 왜 알바를 하고 있는지 전후사정을 설명해주고는 했지만 혼자 이 질문을 받을 때면 내입으로 설명하기 민망할 때가 많았다.


한번은 비슷한 상황에서 이 일만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그래서 왜 이 일만하면 안돼요?”라고 되물어봤다대답하기 귀찮아서라기 보단 나도 정말 궁금했다왜 이런 이상한 뉘앙스의 질문을 자꾸 받는지 말이다돌아온 대답은 그게 아니고 이 일만 할 것 같지 않아서요라는 시원찮은 답이었다지금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지만 사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왜 그 나이 먹고도 아직 알바를 하세요?’, ‘어디부족하세요?’ 뭐 이런 거 아니었을까?


알바를 한 기간이 지날수록 나를 알아보는 이가 늘면서 이 요상한 질문들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종종 비슷한 질문을 받곤 한다그때면 그냥 웃으며 제가 잉여라서 친구가 일 시켜 주는 거예요라고 해버리고 만다그 편이 다음질문도 없고 편했다.


어쩌면 나이를 먹고 알바를 한다는 건남들에겐 조금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되는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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