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아나요?
당신과 함께 길을 걸으면 세상 모든 게 전부 내 것만 같았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부러울 게 없었죠.
당신과 함께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였답니다.

 

당신은 제게 왜 꼭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거리를 잘 가느냐고 툴툴거렸지만,
혹시 그거 아나요?
당신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내 옆에 지금 당신이 함께한다고 자랑하고 싶었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요.

 

오늘도 나와 함께 길을 걸어 주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진 : 독일의 퀼른 다리 그리고 사랑의 자물쇠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높은 곳에 있어
흔한 눈길조차 주지 않아도
산이 좋다.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말 들려주지 않아도
바다가 좋다.

 

산과 바다 같은 그대가
그냥 좋다.

 


산에 오르면 그 웅장함과 숲의 신비함에 마냥 좋습니다. 산에 가면 내가 좋은 것이지요. 바다에 가면 세상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는 그 위대한 포용력에 그냥 좋습니다. 덕분에 시야가 탁 트이고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며 위안을 받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파도소리만 철썩일 뿐 나에게 아무런 말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바다가 좋습니다.

 

그 사람은 산과 바다처럼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대에게 다가가면 내가 좋았습니다. 산과 바다는 내가 온 것이 반갑다는 말이 없고, 그녀 역시 내가 다가온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다가갈수록 내가 좋았던 것이니까요.

 

요즘 들어, 나에게 산과 바다 같은 그대가 힘들어 합니다.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한 사람에게는 드높은 사랑과 드넓은 위안을 주던 위대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산이고 바다입니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창 매서운 겨울 날씨의 연속이다. 기세등등한 동장군 덕분에 옷깃을 여미는데 힘이 들어가서 점퍼 지퍼가 고장이 나 버렸다. 지퍼에 달린 고리가 끊겨져 버린 것이다. 쇠고리였는데…
 
초강력 따뜻한 이 털 점퍼는 ex-girl friend의 선물이다. 보편적으로 오랫동안 연애를 하게 되면 연인들에게는 사시사철의 선물들이 쌓여져 간다. 특히나 한국의 연인들은 철마다 서로 챙겨줘야 할 기념일들이 넘치지 않은가. 하지만 헤어지게 되면 이것들은 처치곤란에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다. 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남겨두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의 해결법은 다르다.

 

어떻게 헤어졌느냐에 따라, 얼마냐에 따라, 팔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대체로 커플링), 애착에 따라, 추억에 따라 등등등.
 
얼마 전 지인에게 이 잠바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와의 고만고만한 추억이 깃든 잠바라고 그런데 지금은 가난해서 버릴 수는 없다고, 농담어린 이야기였다. 지인은 기왕 망가진 거 겸사겸사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추억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 옷은 더 이상 내가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염치로 이 옷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의 만남은 24개월이었다. 그렇다, 약정 기간이 끝났다. 24개월, 그리 짧지도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들. 누가 이러한 기한을 정했을까? 정말 합리적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간, 바로 24개월이란다. 그 정도 사귀다 헤어졌으면 나는 나쁜 놈이 아닌 게 된다. ‘자연스럽게 헤어졌죠 뭐.’ 이렇게 주위에 말 할 수 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럴 수 있다, 그런가보다.
 
여기에서 번호이동을 하거나 신규가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통신사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가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 익숙함이 부끄러워져 고개 돌리게 하는 그 말. 새로운 것은 신비롭다. 어쨌든 그녀는 내 탓에 그녀의 잠바주인을 만나는데 2년이나 늦어져 버렸다. 미안하오.
 

 

오래되면 익숙해져서 서로 잘 적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래되면 쉽게 망가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다, 오래되면 망가질 위험성도 높은 것이다. 망가졌을 때 우리는 대처하게 된다. "고치느냐, 버리고 새것을 택하느냐." 어쨌든 약정 기간이 끝났다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고, 우리의 선택은 버리는 쪽이었다.

 

또 하나의 선택, 오래되어 망가진 점퍼의 운명. 하지만 이번에 나는 고치는 카드를 선택했다. '뭐, 고치면 되지.' 잠시 점퍼를 버릴까 고민해봤지만 이내 수선집으로 향한다. 나도 추억을 고치는 중이다.

 

그렇게 본다면 추억은 자기목소리로 만들어질 뿐이다. 한 사람은 상처로 남아있을 수도 있는데 한 사람은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여기는 것, 아니 여기고 싶은 것. 그것이 추억이다. 그래, 추억은 어떻게 보면 이기적일수도 있는 것 같다.

 

어느덧 시간이라는 약에 취해 그녀와의 지난 사랑은 오후의 낮잠처럼 달콤한 꿈으로만 남아 있다. 그 당시의 오해와 아픔, 그리고 슬픈 감정은 지금 명백히 기억에서 되살릴 수가 없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 슬픔을 지웠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싶어서 추억을 수선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파할 내 가슴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 사진 : 위 사진은 흑석동의 뉴타운 재개발 전 동네골목의 모습이다. 이제는 동네골목 가로등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의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동네 골목도, 우리도 더 이상 없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호남오매(湖南五梅)라 일컫는 고불매(古佛梅)。

 

그녀를 보러갔건만

이미 그녀는 가고 없단다.

 

시들은 꽃잎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했건만

지조 있는 그녀는 애써 감추며 허락하지 않는단다.


언젠가 뭇 사내와 조우하자 

한송이 매화꽃으로 피었다고 했던가.

 

하여 홍조(紅潮)를 띤 그녀가 나를 맞이하는 꿈을 꿨건만,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단다.


범인(凡人)에게 매화는 욕심일 뿐이란다.

그렇게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사람。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 동네에는 빵집이 하나 있는데 그 가게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한 명 있다. 매일 저녁 퇴근길, 동네 어귀에 이르면 빵집 쇼윈도 너머로 항상 그녀를 볼 수 있다. 이 순간만큼은 단순히 내가 퇴근하는 길에 그녀를 본 것인지, 그녀를 보기 위해 일하러 갔다 온 것인지 헛갈릴 때도 있다. 달코롬한 빵 냄새에도 홀려 자연스럽게 눈길이 향할 만도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언젠가는 턱을 궤고 TV를 보고 있고, 언젠가는 폐장 준비로 막대걸레질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그냥 서 있기도 한다.
 
그녀는 몇 살일까? 얼핏 보면 나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주인일까, 주인네 딸일까? 내가 스쳐가는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날 감지하기는 할까?
 
궁금함도 잠시 내가 그녀를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은 단지 1~2초 정도에 불과하다.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빵을 사면서 대화도 걸어볼 수 있고 가까이서 얼굴도 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단지 지금이 좋아서이다. 쇼윈도 너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그냥 좋다. 쇼윈도 얼룩 때문에 선명하진 않지만 어떤 목소리인지 들리진 않지만 그래서 더 좋다. 가게에 들어가서 얼굴을 마주 보거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왠지 나의 환상은 깨질 것 같기 때문이다. 마치 가게 문을 열 때의 알림종 소리에 환상이 깨어지듯이.

 

짝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 아닐까. 쇼윈도 사이에서 그 사람의 실재가 아닌 단지 ‘상상적 이미지’에서 만들어진 이상(理想)과의 사랑.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더 위력을 가하는지도 모르겠다.

 

유리창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의 판단은 내 손에서 벗어나 있다. 아직 나에게 빵집 아가씨는 빵집 아가씨일 때가 좋다. 빵집 아가씨를 완벽한 여인으로(정작 본인은 엄청 부담스러워 할) 만든 것은 내가 만든 것이지 그녀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12.13 16:50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군 입대했을 때, 휴가 나와서, 제대하고, 졸업했을 때, 취업할 때, 친구 결혼식 때, 그리고 상갓집에서…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꼭 만나고 싶어서 불러냈던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십년을 넘게 알아왔으면서도 만난 횟수가 반년 사귀다 헤어진 지난 여친과의 만남보다도 적은 사람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저의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네요. 


그런 날이 있습니다. 꼭 그 사람을 보고 싶은 날.

그날은 돌이켜 보면 제게는 인생의 통과의례라는 주요관문이었더군요. 저를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보다, 그런 중요한 날이면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들키지 않고 불러낼 수 있었으니까요.

    

“잘 지내?”

“…(잘 지내냐고? 너는 지금 내 얼굴을 보면서 그런 말이 나오지? 네가 그 사람과 웃고 행복하게 지내니깐, 야윈 내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거겠지. 뭐, 잘 지내냐고? 그동안 보고 싶어서 혼났지, 임마. 페이스북이랑 미니홈피 글 보면서 참았다. 글은 또 왜 그렇게 뜸하게 올리니? 사진은 참 행복해보이더라. 그 사람이 너한테 아주 잘 해주는 것 같네. 야, 너만 잘 살았는지 알지? 나도 열심히 살았어. 너한테서 성공한 모습 보여주려고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산다, 내가 아주. 야, 그리고 나도 요즘 여자 만나.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 너 아니래도 나 멋지다고 하는 여자 많아…참…보고 싶었다, 많이. 여전히 예쁘구나, 너란 여자.)”

“뭐 해? 잘 지냈냐니깐?”

“응…그…그냥.”          

 

그동안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수천수만 가지 이야기 대신,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 단어뿐이었습니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re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물섬] 꿈꾸는 연구실  (0) 2012.12.17
지구 멸망과 동지 팥죽의 관계  (0) 2012.12.15
[500원] 안부인사  (0) 2012.12.13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다  (0) 2012.12.12
[500원] Intro。500원 짜리 남자  (0) 2012.12.08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0) 2012.11.19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소녀는 나를 알기에 더더욱 슬퍼지네.. 

                                                                - 회상Ⅲ/김태원



~♫~~

익숙해진 핸드폰 알람음, 가장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바꿔 놓았건만 ― iPhone4의 ‘공상과학’ 사운드, 사람 속을 뒤집음과 동시에 달팽이관에서 고막을 거쳐 외이도까지 쭉 긁는 느낌을 줌 ― 그 조차도 어느새 귀에 익어버린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과 함께 분주하기만한 어느 아침 날. 


여전히 잠에 취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남몰래 숨어 있던 동전 500원과 해후(邂逅)하게 되는 그런 날이 꼭 있다. 그럼 보통 우리는 살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딱 그 느낌과 그 타이밍이다.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 된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말이다. 단지 그 느낌의 남자로만 남아있으면 된다. 크게 신경 쓸 사람도, 마음 가는 사람도 아닌, 그냥 바쁜 하루의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하지만 가벼운 미소 정도는 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백원은 너무 작고, 천원부터는 너무 크다. ‘왜 이 돈이 주머니에 남겨져 있지?’ ‘무슨 돈이지?’하며 불안해진다. 심지어 대형마트에서 백원을 넣고 카트를 쓰느냐 오백원을 넣느냐에 따라 카트 회수율과 정돈 상태가 달라진다고 한다. 아직 동전오백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 존재인 것 같다. 디지털 공상과학 사운드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함께 있으면, ‘기적’이라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던 사람, 이 <동전오백원> 카테고리의 글들은 그 한 명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받쳐질 것이다. 10년이란 세월동안 내 마음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그 세월은 한 남자를 500원이라는 값어치로 흥정을 맺게 만들었지만 ― 그렇다. 바로 당신을 위한 글이다. 


앞으로 해적단 수컷들의 눈물겨운 구애 공세를 기대하시라. 당신은 그저 오백원 만큼의 미소만 지어주면 된다. 



* 작곡가 김태원씨는 작곡을 할 때 첫사랑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 역시 이뤄지지 않은 아픈 사랑이다.

* 이글의 초안은 2009년 6월 여름날이다. 언젠가부터 한 코미디언이 “궁금하면 500원~”해서, 나의 동전오백원 프로젝트가 희화화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Written by 동전오배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re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500원] 안부인사  (0) 2012.12.13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다  (0) 2012.12.12
[500원] Intro。500원 짜리 남자  (0) 2012.12.08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0) 2012.11.19
적이 있다는 것, 적이 된다는 것  (0) 2012.11.14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0) 2012.11.13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는 10월의 첫째 주 일요일. 아침공기가 제법 쓸쓸해진데다가 창으로 내리쬐는 햇살도 한결 차분해졌다. 이글이글 아스팔트 기운에 맥을 추지 못하던 담쟁이들도 때를 만났다는 듯 슬그머니 잎새 끝에 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늦여름 태풍이 쓸고 간 하늘 판에는 푸른 물감만 잔뜩 뿌려져 있고, 실낱같은 흰 구름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히 지구 반대편으로 흘러가고 있다. 창밖 프레임 속 풍경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어느덧 1회용 플라스틱 잔에 얼음 꽉꽉 채운 아메리카노 보다는 하얀 머그잔에 따끈한 달콤 라떼 한잔을 내려 마시면서 몸 안의 생기를 북돋아 주고 싶어진다.


  공기가 얼어붙고 태양빛이 멀어져 간다는 것은 그만큼 일상생활의 뜨거움도 한층 식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 공연의 열기로 붉게 달구어졌던 시청광장에는, 푸른 셔츠를 커플룩으로 맞추어 입은 연인과 아빠 엄마 손을 잡고 초록잔디밭을 노니는 꼬마들이 자리를 채웠다. 분수대의 물대포를 맞아가며 뛰놀기에 분주했던 여학생들은 어느 새 도톰한 춘추복 차림으로 변신하여 잔디밭에 모여앉아 겨울용 코트나 피부건조 방지용 화장품 이야기로 대화의 수를 놓는다. 멀찌감치 나무의자를 두고 앉아 슬금슬금 곁눈질로 그녀들의 스케치를 완성해가고 있는 사과모자 아저씨를 보고 있자면 이내 가을이 오긴 왔나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들의 옷차림도, 생각도, 사랑도 가을의 나침반에 따라 키의 방향을 차츰차츰 바꿔가고 있다.


  온도계가 내려갔다고 해서 우리들의 마음까지 덩달아 식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그 동안 더운 열기로 인해 제각각 미루어두었던 시시콜콜한 소망거리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고, 표현하고, 공유하고, 소비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아침 산책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공원 평상에 단체로 모여 앉아 기를 수련하는 사람들이라든지 또는 배낭을 메고 서울성곽 정상을 향해 오르는 노인 부부의 걸음걸이는 한여름 쨍 내리쬐는 불볕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공원 숲에 숨어 들어가 달콤한 혀를 섞고 있는 남녀 지간의 모습은 앞으로 외부에서의 애정 행각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를 것을 예고하고 있다. 떨어진 숲의 온도를 연인들이 알아서 맞춰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삼삼오오 줄을 지어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고 있는 레이서들의 숨 가쁜 질주가 점점이 스쳐간다. 이 모두가 계절의 색깔을 바꾸어 나아가는 풍경들이다.


  작년 이맘때쯤엔 그림 그리기에 미쳤는데, 올해는 펜과 키보드가 손맛을 자극하고 있다. 손가락 지문에 가을의 형상이 도돌도돌 새겨져 묘한 생각의 자기장에 이끌려 펜을 끄적 대고 키보드를 연신 두드리고 있다. 모니터 앞에는 따듯한 테이터스 초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막 연인과 문자를 끝낸 달달한 아이폰이 놓여 있다. 커피를 마시며 사랑을 즐기고, 책을 끼고 앉아 나만의 잡동사니 글을 풀어내고 있는 꼴이란 흡사 된장남을 연상케 한다.


  독서란 무릇 글을 쓴 자와 글을 받는 자의 진지하고 차분한 대화이다. 작가와 독자의 커피 한잔의 대화에 남이 함부로 끼어드는 것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여기서 ‘남’은 나를 알고 있는 타인 모두를 지칭한다. 그래서 집안에서 진지하게 책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화장실 청소하는 소리, 쓰레기통 비우라는 엄마의 잔소리, TV 속 걸그룹의 숨 넘어갈 듯한 라이브 소리의 하모니는 마치 나에게 ‘니가 좋아하는 그 쓰레기 책 따위 개나 줘버려’하고 비웃는 것만 같다. 가족들이 잠옷 차림으로 퍼질러 앉아 깔깔대며 쇼 프로를 보고 있는데 나는 한 쪽에서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뜨겁게 섹스하는 대목을 읽는다고 해보자.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적막함이 느껴지는 넉넉한 공간에 숨어들어가 책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너무 시끄럽지도 그렇다고 너무 쓸쓸하지도 않은 카페의 한 구석자리라든지 운동장의 먼 함성소리가 창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학교 연구실의 책상 이런 곳이 딱 제격이다. 나는 책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묻고 책은 나에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되묻는다.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커피와 초콜릿 간식은 필수 아이템이다. 특히 대화의 내용이 점점 깊어지고 높은 고열량의 지식을 짜내야 할 때 초콜릿의 농도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카페인은 고독하게 깊어진다. 달콤한 설탕과 카페인의 마취성분으로 뇌를 달래주면서 나는 옷장 속을 뒤지듯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끄집어낸다.


  독서를 넘어 글쓰기로 이어질 때 카페인과 초콜릿 소비는 최고점을 찍는다. 특히 데드라인을 턱밑에 두고 논문이나 보고서 따위의 딱딱한 내용을 쓸 때 나는 보통 1일 기준 오리지널 콜라 5캔, 아메리카노 3잔, 자판기 믹스커피 2잔, 트윅스 3개, 기타 초콜릿 과자류 3봉지 이상을 먹어치운다. 무한한 카페인을 소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씩씩대는 증기기관 열차 속에 시커먼 석탄 덩이를 탈탈 부어가며 불구덩이의 기세를 올리는 것과 같다.


  카페인 과다 중독으로 이상 증세가 나타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직까지 이런 인스턴트 생활로 인해 곤욕을 치러본 경험은 없다. 다만 카페인 수준이 일정량 수준을 넘으면 조금씩 피로감이 몰려오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먹지 않고 마시지 않은 채 초조한 긴장감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생활이 좋다. 데스노트에서 L이 설탕류 과자를 탑처럼 쌓아두고 밤낮으로 먹어가며 범인 키라를 추적하는 그런 짓거리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해가 지니 바람이 서늘하다. 창문을 닫고 스탠드 불을 켠다. 또 다시 입안에 초콜릿을 살짝 머금고, 딸그락 딸그락 머그잔을 구슬리며 커피를 솔솔 마셔댄다. 그리고 한량 놀음하듯 이글 저글을 이리썼다 저리썼다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러다 간혹 내 앞에 놓인 아이폰으로 연인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다음 만날 데이트 날짜를 정해본다.

 

  커피, 초콜릿, 독서, 사랑은 이렇게 묘한 동거를 이루고 있다.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Fo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갱시기는 맛있다  (0) 2012.11.30
두 남자의 커피 비긴즈  (0) 2012.11.24
호빵은 따뜻하다  (0) 2012.11.21
편의점 음식 어디까지 먹어봤니? - 식사편 -  (0) 2012.11.16
커피우유  (0) 2012.10.31
초가을의 커피, 풍경 스케치  (0) 2012.10.09
Posted by 해적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