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이야기 - 특선요리 - 연말 달력 이야기 1

 

 

  감색양복을 멋지게 입은 사람이 은행창구에 앉아 있어. 맞아. 아까 봤던 달력아저씨야. 이때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네. 은행직원이 마주 웃으며 말을 건네고 있어. 우리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볼까?

 

  "상환이 완료되었어요. 축하합니다. A고객님"

 

  이름을 듣지 못해서 급하게 A라고 했어. 괜찮지? 우리 아저씨는 여전히 웃고 있어. 지하철에서의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아마 이때가 은행대출을 모두 갚은 시점인 모양이야. 아저씨 축하해요. 앞으로 탄탄대로만 남았네요.

 

  "덕분에 아주 빨리 갚은 것 갚아요. 고마워요."

 

  하고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섰어. 이제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일만 남은 거지. 근데 아저씨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은행직원에게,

 

  "아참 잊을 뻔 했군. 저기 달력 주시오. 2013년 은행달력 말이오."

 

  아, 아까 들고 있던 달력을 여기서 받은 모양이야. 은행직원이 달력을 찾고 있어. 자기 자리에는 없는지 주변 직원에게 물어보다가, 그도 없는지 지점 전체를 뒤지고 있어. 공짜 달력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 은행직원이 분주해지는 것에 맞춰 아저씨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죄송합니다. 이번에 달력 찾으시는 고객이 많아 달력이 전부 소진된 상태입니다."

 

  하는 순간, 아저씨의 얼굴은 처음으로 굳어졌어. 아주 심각한 얼굴, 봐. 미간에 그려진 내 천川자를. 그깟 달력 하나에 뭐 그리 심각해지냐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은행에서 다음해 달력을 받는 일은 아저씨한테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

 

  내가 아저씨한테 들은 이야기를 해줄게.

 

  아저씨는 스물세 살의 첫 월급날에 처음으로 K은행에서 첫 통장을 만들었어. 그 날이 바로 12월 달이라 은행에서 달력을 주었어. 그날부터 아저씨의 은행달력 역사가 쌓인 거야. 무슨 역사냐고. 아저씨의 역사, 아저씨 가족의 역사. 달력 숫자 하나하나에 차곡하게 하루하루의 일들을 쌓아간 거야.

 

  매달 7일에는 별표가 그려지고 숫자가 새겨져. 30여 년 동안 조금씩 늘어간 숫자들, 7일이 무슨 날이냐면? 바로 월급날이었지. 아내와의 첫 데이트 날에는 194×2=388원이라고 적혀있대. 그때 다방커피 한잔이 194원이었거든. 이게 아저씨의 생애 첫 커피였어. 겉으로는 맛을 음미하는 척 해도 속으로는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느냐며 투덜거렸다고 해.

*타인의 첫 커피에 관심이 있다면?  두 남자의 커피 비긴즈*

*고은 시인의 생애 첫 커피가 관심이 있다면? [차 마시는 앵무새] 내 생애 첫 커피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는 매일매일 작은 숫자들이 이어지지. 여기서 퀴즈. 이 숫자들이 뭘까? 3, 2, 1, 0. 정답은 바로 아저씨가 아내에게 사다준 과일의 기록이야. 자두, 복숭아, 바나나, 수박, 귤. 아내가 과일만 찾았거든.

 

  이렇게 35년이라는 시간이 쌓인 거야. 아저씨의 안방 문갑에는 35개의 달력이 소중히 모셔져 있어. 아내가 이따금 꺼내보며 미소 짓는 게 아저씨의 취미야.

 

  한번은 딸애가 무슨 커피 집에서 쿠폰으로 받았다며 다이어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어. 신식이라며 며칠 써본 아저씨는 금방 은행달력을 돌아갔어. 다이어리는 글씨도 작은 게 영 쓸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저녁에 아내와 팔 베게하고 누워 벽에 걸린 달력 보는 재미도 없다며…….

 

  이런 아저씨에게 2013년 은행달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2012년을 마지막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일하고 똑같은 거야. 쌓아갈 내일이 없다는 의미인거지.

*2012년 지구 멸망에 관심이 있다면? 지구 멸망과 동지 팥죽의 관계*

 

  다른 은행달력도 있잖아. 달력을 사도되고. 라고 생각했지? 나도 지하철에서 들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 근데 생각해봐. 다들 '이거 아니면 절대 안 돼.'라는 물건이 하나쯤은 있지 않아? 그게 너구리 라면일 수도 있고, 아이폰일 수도 있고, 스타벅스 커피이기도 하고. 하나의 물건에 하나씩의 사연을 간직하며.

 

  스타벅스 다이어리하고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열심히 17장을 모아서 다이어리를 교환하러 갔는데, "다이어리 물량이 소진되어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점원이 말하면 어떤 기분이겠어? 참담하지. 그리곤 어떤 행동을 하겠어? 스타벅스 다이어리 구하겠다며 이 동네 저 동네 매장은 다 찾아다닐 거잖아.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관심이 있다면? 스타벅스 다이어리- 스티커 모으기 대작전 돌아보기

 

  아저씨도 마찬가지야. 내일까지 꼭 구해주겠다는 은행직원을 뒤로 하고 가장 가까운 매장부터 뒤지기 시작하는 거 보이지? 집념의 사나이. 은행달력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라고 갈 기세야.

 

  결국 아저씨가 들린 은행지점이 10군데야. 자그마치 지하철역 다섯 개야. 대단하지. 그러고 결국엔 득템. 박수 쳐야지. 짝짝짝짝짝. 다행히도 지구가 멸망하는 일 따윈 없어. 2개나 얻고 집에 가는 길에 만난 게 바로 나였지.

 

  "집에 가면서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갈거야. 사과, 배, 바나나, 멜론……."

 

  하고 아저씨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 2012년의 마지막 역사가 채워지는 거지. 상상을 해봐. 과일을 먹으며 아내와 2013년을 써나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나의 이야기는. 아니지. 아저씨의 이야기는 이게 다야.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달력에 삶이 깃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 집안을 한번 둘러봐. 어떤 달력이 걸려있어? 은행달력이야? 회사달력? 아니면 학교달력일까? 병원달력? 아하, 무한도전 달력도 있을 거야. 보여? 그 달력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어때?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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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90년대 만큼 TV에서 외화시리즈를 많이 방영한 시기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의 꿈은 아마도 외화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힘, 신체능력, 두뇌, 창조력, 정의감, 인간애, 유쾌함, 침착함 등등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600만불의 사나이[각주:1]와 맥가이버[각주:2]가 기억에 남습니다. 600만불의 사나이가 힘과 신체능력을 대표한다면, 맥가이버는 두뇌와 창조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상반되는 캐릭터들이지요.

 

  저는 맥가이버가 꿈이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600만불의 사나이는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는지...아니면 우리 집에는 돈이 없어 '사나이'가 되는 비용인 600만불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잘 기억은 안나네요. 600만불의 사나이 흉내내며 계단 5칸(놀라워라!!) 위에서 뛰어내리곤 했지만요.

 

  맥가이버가 되는 것은 쉬우면서도 놀라워 보였어요. 일상생활에서 쓰던 물건들을 새롭게 사용하기만 하면 되었거든요. A와 B를 조합해서 새로운 쓰임을 만든다. 특별한 것을 평범한 것에서 찾는다. 근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물건들의 형태와 성질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이것과 저것을 조합해서 다른 그것을 만드는 창조력도 있어야 하는 일이잖아요.

 

  맥가이버의 능력을 동경하기 시작한 이후로 어머니가 골치 꽤나 썩으셨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모아 댔으니까요. 철제 옷걸이를 구부려 망가뜨리기도 하고, 시한폭탄 만든다고 멀쩡한 시계를 분해하기도 했거든요. 맥가이버칼 사달라고 졸라대기도 했으니까(맥가이버칼만 있었어요...). 아마 이 시절을 살았던 '맥가이버 키드'들도 저와 같지 않았을까요?

 

  집에 도둑이 들 것에 대비해서 갖가지 도구들을 껴안고 잠들기도 하고, 방의 문이 열면 작동하는 부비트랩(!)을 장치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홀로집에'의 케빈도 맥가이버 키드였네요. 그때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케빈이 얼마나 부럽던지 몰라요.

 

  그 시절 많던 맥가이버 키드들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절 익힌 재능을 발휘해 '생활형 맥가이버'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드라이버 없이 가위로 나사를 풀고, 족발 먹을 때 종이컵 1/3을 잘라 쌈장을 담고요. 망치 없이 못을 박고, 스마트폰 액정을 직접 교체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해돋이 보러 가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 참치캔 뚜껑으로 햄을 썰고, 참치캔으로 국물을 떠서 먹고 있을지도 몰라요. 주변의 놀라움을 즐기면서요...

 

  맥가이버는 세계평화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 '맥가이버 키드'들은 가족과 친지의 행복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을까요?

 

  내년, 아니 올해 2013년에 맥가이버가 영화로 리메이크 된다고 합니다. 21세기의 맥가이버는 어떤 모습일까요?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하네요. 최첨단 기계를 남용하는 요새의 첩보요원 속에서 너무 구식으로 보이는 것은 아닌지...그래도 '맥가이버 키드'로서 기대를 가져봅니다.

 


사진 출처 : http://stargatesg1971.livejournal.com/32534.html

 

* 맥가이버의 만화도 즐기세요. 재미납니다.

맥가이버 패러디 : http://lastplacecomics.com/comics/the-new-adventures-of-macgyver/

생활밀착형 맥가이버 : http://www.pajamaforest.com/2009/10/23/my-macgyver-moment/

 

* 맥가이버에 대한 철학이야기도 있어요. 흥미롭습니다.

맥가이버와 철학 : http://greenbee.co.kr/blog/334

 

 

written by 요리사


  1. 600만불의 사나이는 원래 우주비행사였어요.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에 큰 부상을 당해 시력과 팔다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죠. 그때 특수기관의 도움으로 무쇠팔, 무쇠다리, 매의 눈을 가진 사나이로 다시 태어나게 되요. 사이보그 개조(?) 비용이 600만불이라나요? 그때부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무리들을 '띠.띠.띠.띠.띠.띠.'하는 효과음과 함께 물리치게 되지요. [본문으로]
  2. 맥가이버는 어렸을 때 사고로 부모님와 할머니를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비폭력주의 청년으로 자라나요. 그래서 말할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말했지.'라고 하는 '그랜파파보이'가 되었나봐요. 우연한 기회로 특수요원이 되어요. 뛰어난 두뇌와 임기응변, 전공인 물리학을 바탕으로 최첨단 무기를 가진 악당들을 고작 칼 하나로 물리치고 다니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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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선 요리] 연말 달력 이야기 1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집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대여섯 정거장을 지났을까. 나는 자리에 앉아 보고 있던 책을 가방 속에 넣어 버리고 새삼스럽게,

"이젠 정말 연말이군!"

하였다.

  달력의 숫자가 12월 31일이어서가 아니라 지하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포오즈로 앉아 있어도 표정만은 한결 같다.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표정은 무엇보다도 더 나에게 2012년의 마지막 날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반대편 문이 열리며 50대 후반의 아저씨가 탄다. 감색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긴 모습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얼굴 가득한 함박웃음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편안해지는 기분을 돋워주는 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생각하면서 보니 돌돌 말린 종이뭉치 두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가 하도 궁금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이거 달력이요. 은행달력."

한다.

  보니 종이몽치를 감싼 노란 포장지에 은행이름이 프린트되어 있다.

"아, 그렇군요. 은행 다녀오시나봐요."

하니,

"그래. 은행 여러 곳을 들렀어."

한다.

"은행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봐요?"

물으니 아저씨는 얼른 대답하는 말이,

"이제 다시 시작이요."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35년 전 23살의 나이로 상경했다는 것, 처음에는 남의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는 것, 4년 전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창업을 했다는 것, 저금하던 은행 한 지점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 장사가 더럽게 안 된 것, 1년도 안되어 은행 빚은 커녕 가게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는 것, 2년 만에 가게를 접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빚을 갚기 시작했다는 것, 오늘 부로 그 빚을 다 갚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웃고 계신 거였군요."

하니,

  "빚청산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 근데 그것만이 아니라오. 그러니까"

하면서 다시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문득 낯선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대개 자신에게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식당이나 버스, 지하철에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을 때면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말을 주고받았다.

  달력아저씨는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이야기에 진실로 감격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기 전에 끝났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저는 다음에 내려야 되요."

하니, 달력아저씨는

  "늙은 사람 말 재밌게 들어줘서 내가 고맙지. 이거 가져가."

하면서 내손에 달력 한개를 꼭 쥐어준다. 나는 손사레를 치며 사양하다 못이기는 척 달력뭉치를 받았다. 승강장을 출발하는 열차를 돌아보니 달력아저씨는 여전히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아내와 함께 새 달력을 채워 나가는 아저씨는 상상하며,

  "이제 정말 새해구나."

하였다. 2013년 달력을 봐서가 아니라 달력아저씨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 이태준 '달밤'의 일부분을 따라했습니다.

※ 다음 예고 - 연말 달력 이야기 2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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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해돋이- 동해 추암마을을 가다] 


정동진보다 더 빨리 해가 뜬다고 하는 동해의 작은 마을 추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육지에 발을 내딛으니 온통 캄캄한 가운데 세찬 파도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온다. 아무도 없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사람들이 많이 없을 거에요.” 


레나스(의사 겸 항해사)의 말이 맞았다. 해는 7시가 넘어야 뜬다고 했다. 그 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요리사는 체력이 철철 흐르는지 벌써 배에서 내렸다.  


“선장! 이제 일어나요! 하늘이 열리는 시간이 다 됐어요!”





으음? 레나스가 어깨를 툭툭 친다. 졸린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하늘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눈깨비처럼 갑작스레 쏟아지는 빗방울에 동해바다의 일출구경에 불안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삼십 여분을 넘기니 어느 새 비는 잠잠해지고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틈새를 벌려가며 한 뼘 한 뼘 번져 나아가고 있었다. 에메랄드 바다 위에 청아한 구름이 이리저리 뒤섞여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무색케 했다. 그 속에서 불타오를 그 강렬한 햇덩어리를 모두가 고대하고 있다. 좀 더 해를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요리사가 말했다. 레나스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나무계단을 오르고 올라 절벽에 이르니 고고한 소나무 숲이 장광하게 펼쳐친다. 나무 사이사이로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바닷물과 기괴한 바윗덩이들이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소나무 숲을 지나 다음 풍경의 계단으로 오르는 순간,


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수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시퍼런 물결이 바다를 가르며 겹겹이 몰려온다. 쉴새없이 바위들을 몰아친다. 바위와 절벽마디마디에 세월이 흔적이 구구절절하게 묻어있다. ‘어디 와 볼테면 얼마든지 와보라’ 하는 듯. 모두들 초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바다와 꼿꼿하게 싸우고 있다. 파도와 파도가 만나 부딪히는 곳, 파도와 바위가 만나 깨어지는 곳. 좌르르 쏟아진 물결의 파동이 새하얀 거품으로 일고 일어나 당장이라도 내 눈 앞에 떨어질 것만 같다. 기상찬 바람을 이겨내며 천지의 변화를 굽어보는 그야말로 단번에 눈맛이 후련해지는 호쾌한 기분에 젖고 만다. 동해의 겨울 파도란 이런 것이구나. 사나이의 거침없는 기상이고 힘찬 기백이구나. 





그리고 마침내 촛대바위에 오르는 순간, 하늘은 이내 붉게 잠기고 만다. 신비로운 바다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촛대의 끝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세상의 점화를 알린다. 이렇게 2012년 마지막 아침의 경종이 울린다. 한참동안 넋을 잃고 절경 속에 피어난 해돋이의 광경을 바라본다. 밀려오는 흥에 못이겨 ‘와~~’ 하고 소리 한번 내질렀다. 그래, 2013년 이겨보자! 맞더라도,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자! 





절벽의 계단에서 내려왔을 무렵, 이미 온 세상이 빛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찬란한 해오름과 마주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조금 더 꽉 쥔 주먹손으로 오겠노라고 이곳과 마음의 약속을 했다.  





곧이어 요리사가 아침 준비로 바빠졌다. 아침은 일명 해돋이라면. 휴대용 가스렌지에 불 붙이고, 냄비에 물을 올린다. 물이 끓을 때쯤, 삼양라면에 햄과 참치를 함께 곁들여 넣는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해돋이면의 스멜이 시장기를 자극한다. 여기서 잠깐. 술이 빠질 수야 없지. 항해사인 레나스를 제외하고, 요리사와 나는 카스 캔을 촤악 까서는 ‘위하여!’를 힘껏 외치며 두둑한 라면식사에 신명을 더했다. 그 때의 맛은, 도저히 표현 불가능이다. 위대한 마무리였다. 


이천십삼년. 해적단 멤버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 것이다. 힘내자! 



Written & Photo by 선장, 선의,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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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도 해는 뜬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머리속에 등장했을 때, 자전거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던 중이었다. 해뜨기 직전의 어스푸레하던 하늘을 기억한다. 동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바로 전까지 새벽 한강변을 자전거로 달렸다. 새벽 자전거는 처음이다. 밤까지 내리던 비는 어느새 물러가 있었다. 얼굴을 스치는 공기가 상쾌했다. 며칠째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는 순간은 한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잘 알 수 있는 곳이 자전거 위이다. 하늘, 공기, 바람, 풍경, 사람, 강물은 때때로 변했다. 그걸 보는 재미가 있다.

 

  페달을 밟는 마음도 수시로 바뀐다. 밖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다가도 어느 순간 안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갑자기 찾아온 생각에 온통 정신이 팔렸다. 화를 내다가도, 후회하고, 원망하다가도, 체념했다.

 

  마음 속을 달리다 지쳐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눈을 돌려 밝아진 밖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문장은 조합되었다.

 

  지금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보일만한 곳을 찾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페달을 부지런히 밟았다. 해는 볼 수 없었다. 방향은 맞았지만 큰 건물이 시야를 방해했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 자리를 떴다.

 

  해를 보지 못해도 날은 밝는다. 주위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회사나 학교에 가려고 일찍부터 일어난 사람들이리라.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서둘러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침 이후로 '서울에도 해는 뜬다'라는 말이 수시로 떠올랐다(늦잠만 자는 주제에). 그리고 최근 들어서 뜨는 해를 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 서울에서 뜨는 해를 보기 시작한 계기를 쓰려다가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다...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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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해는 뜬다] 해는 기다리지 않는다

 

  ....어윽!

 

  변기에 앉아 힘을 준다. 쾌변이다. 잠시 행복감을 느낀다. 며칠 규칙적인 생활을 했더니 장운동이 좋아진 모양이다. 물을 내리고 옷매무새를 추스르다 문득 생각한다.

 

  '잠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아, 맞다. 해돋이 보러 하늘공원에 온거지.'

 

  그렇다. 나는 해가 뜨는 것을 보려고 하늘공원에 왔다. 시계를 본다. 오전 7시 53분이다.

 

  새벽에 휴대폰 알람소리에 잠이 깼다. 몇 번을 고민하다 '일.어.나.자.'라고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용케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섰다.

 

  녀석의 기운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용트림을 하는 녀석을 달랬다. 괜찮아, 라며 녀석을 잠재웠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하늘공원에 왔다. 커피와 음악도 빠뜨리지 않았다. 공원 동쪽에 있는 하늘계단을 오르며 상쾌한 설렘을 느꼈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좋았다. 별이 보였다. 오늘은 기필코 해돋이를 보리라 다짐했다.

 

  하늘계단 꼭대기의 전망대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공원까지 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높이 차이도 크지 않아 보이고, 무엇보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어 마음에 들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20분, 해뜨기 24분 전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몸을 움직여 추위를 녹이기도 하고, 해가 뜨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조금 추운 것만 빼면 아주 완벽했다.

 

  사건은 항상 중요한 순간 직전에 터진다. 사건은 오전 7시 41분에 일어났다, 범인은 녀석이다. 추운 날씨 탓으로 녀석이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이런, 3분, 3분이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아까와는 달리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녀석을 무력진압했다. 순순히 말을 듣는 듯 하더니, 녀석은 방심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박을 풀고 달아났다.

 

  7시 43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선택을 해야 했다. 해돋이냐, 팬티냐. 결정은 빨라야 했다. 순간 화장실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냅다 달렸다. 선택은 팬티였다.

 

  장소는 하늘공원 입구이고, 방향은 북서쪽이다. 북동쪽만 되었어도 달리며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정북만 되었어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북서쪽이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다. 시계를 볼 틈도 없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잘못하면 해가 고개를 내미는 것을 눈으로 보는 대가로 녀석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터였다.

 

  이 순간에도 등뒤의 해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여유따윈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뒤는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다.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고, 기분 좋게 녀석을 떠나보냈다.(녀석은 과연 그럴만한 녀석이었다.)

 

  7시 56분에 해와 마주한다. 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해는, 맨 뒤에서 기회를 기다리다 절묘한 코너링으로 무섭게 치고 나가는 3000미터 쇼트트랙 선수처럼, 고개를 내밀자마자 순식간에 하늘로 치고 올라갔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다 잠시 화장실 간 틈에 중요한 순간을 놓친 시청자가 바로 나다. 1위과 2위의 차이는 벌써 2바퀴 반, 무난히 우승할 것이다.

 

  섭섭한 마음으로 해를 쳐다본다. 해는 부드러운 햇빛을 내비친다. '허허, 또 뜨잖아. 내일 보면 되지. 아니면 모레도 있고.'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그래 내일은 기필코 보리라. 꼭 화장실은 들릴 것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못 기대된다.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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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시대의 해적이다] 늑대소년, 그 시절을 향한 무한긍정, 그리고...

 

 

 

 

용산에서 늑대소년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다. 동창회 부부동반 모임인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이 정겨웠다.

 

신호가 얼른 바뀌지 않아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어르신 한 분이 또다른 어르신에게 핀잔를 준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안그래도 그 어르신이 뭘 그렇게 찾으실까 궁금해하던 중이었다. 자연히 귀를 쫑긋 세웠다.

 

"입대할 때 용산에 모였잖아. 육이오 때. 육십년만에 처음 오는 것 같네."

 

대답을 하면서도 어르신은 계속 무언가를 찾았다. 핀잔을 줬던 어르신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스물도 안된 소년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의 심정이란...그가 마지막으로 본 용산의 풍경은 참으로 남달랐겠지. 구름 한 점, 들꽃 하나, 돌맹이 한 개 조차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증기기관차에서 용산역을 바라보며 '돌아올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306보충대에 입소할 때의 느낌조차 세상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라는데...)

 

1953년 용산역 플랫폼의 증기기관차

 

용감했지만 미숙했던, 순수했지만 불안했던, 앳된 청년은 열차를 타고 떠났다가 6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다시 용산역 앞에 섰다. 몸을 실었던 증기기관차는 고물이 되어버린지 오래고, 지금은 KTX가 다니는 세상이다.

 

연륜있지만 쇠잔했고, 현명하지만 겁많은, 주름진 노인은 역전에서 무얼 찾고 있는 걸까?

 

60년 전 길가에 피어있던 이름 모를 들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먹었던 국밥집을 찾고 있다. 많이 먹고 힘내서 살아오라며 한그릇 더 말아주던 주인아주머니는 살아계실까. 혹시나 해서 찾아들어간 60년 전통 원조 할매 국밥집에서 눈물과 함께 했던 그 맛을 느낀다면...

 

순수했더라고, 좋았더라고, 두렵고 불안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고, 이제는 알았노라고 그 시절을 한없이 긍정하지 않을까?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삶에 힘들어서, 생활에 지쳐 잊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변하지 않은 무언인가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미묘한 장면의 교차, 가끔 이럴 때 주변을 의심하곤 한다...

 

송중기는 잘 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자가 아닌지라,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치들을 때에도 무언가 부족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치열한 소중함의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지막 10분에서 부족한 감정은 채웠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시절의 철수와 순이가 아니라 나이들어버린 순이일지도 모른다고...

 

때론 모르는게 용감한거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는것이 많아져서 겁쟁이가 되버려.

나이 들어 어른이 되면 눈에 안 보이던게 많이 보여. 그렇게 아는게 많아져서 못하는게 많아져.

인생에 딱 한 번 뿐이야. 그 때가 지나면 다신 안 와.

- 늙은 순이가 젊은 손녀에게 -

 

[이미지 출처]

http://wolfboy.interest.me/

http://donsdepot.donrossgroup.net/dr141.htm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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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해는 뜬다]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07:15


  남산을 오르는 버스에 있다. 아마 첫차인 듯하다.. 함께 하는 이들은 네다섯명 정도.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창밖만 바라본다.

  아직 주위가 어둡다. 저멀리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가로등 불빛과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아침의 불빛이 교차하고 있다.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빛의 경쟁. 승리자는 없다. 반복만이 있을 뿐...

  그런 날이 있다. 랜덤으로 틀어놓은 노래가 지금 내 상황과 우연히 겹치는 날.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듯한,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슬픔은 날 가로질러 저 멀리 또 흘러가는데
  허무했던 숱한 밤을 지나서
  또 다시 돌아오는 공허한 공기들
  태양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기회는 언제고 반드시 찾아온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위로...그래 나는 남산 위로 간다.



07:35


  주위는 조금 밝아져있다. 해가 뜨는 시간 7시 43분 41초.

  남산에 도착해서 동쪽이 가장 잘보이는 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나는 시야가 트인 비탈길 중간에 서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따뜻한 캔커피를 만진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긴장을 풀어준다.

  일출을 보려 한다. 동지날을 기점으로 길어지기 해가 보고 싶었다. 지난 밤에 마신 술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생각때문일 수도 있다. 각오를 다지고 싶었나?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가장 긴 밤의 끝자락이라는 시간 속에 있다. 산자락이든 도시의 빌딩 사이든 붉은 빛이 내비치면 나는 어떤 시간 속에 있게 될까?


  나는 가장 긴 밤의 한가운데 있다. 

  나는 가장 어두운 밤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길어지는 태양 앞에 있다.  



08:01


  그저 이쪽이거니 추측할 뿐이다. 거기에는 흘러가는 구름이 있다.

  해는 뜨지 않았다. 아니,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전날 눈을 뿌린 구름이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10초의 고민, 그리고 무엇에 이끌린 듯 남산을 향했다. 구름이 걷힐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는지, 동쪽하늘에 구름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 것도 기대하거나 자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구름 뒤 해를 상상한다. 보이는 듯도 하다.



08:49


  버스로 오른 길을 걷는다. 도시의 풍경이 거기에 있다. 아침의 불빛들만이 그곳에 남아있다.

  나는 무얼 한걸까?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났고, 추운 날씨에 산을 올랐다. 10분 남짓 적당한 장소를 찾았고, 동쪽을 30분 남짓 바라봤다. 길어지는 해는 보지 못하고, 해를 상상했다. 그리고 걷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산을 다 내려오고 큰길로 나섰다. 그 순간 구름 위로 해가 뜨는 것을 본다. 아주 좁은 구름의 틈이다. 그 사이로 해가 보인다. 해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보고 있지 않아도 태양은 뜬다.'

  해는 다시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17:12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7분 40초다. 오후 내내 나와있던 해는 방금 빌딩숲 아래로 넘어갔다. 5분 뒤면 해의 자취는 아예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이 위세를 떨칠 것이다. 다시 밤이 된다. 어제보다 1분 정도 짧아진 밤이다.

  

  밤이 되면,

  글은 집어치우고 나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스위트피 - 가장 어두운 밤의 위로

youtu.be/ud71GYV1RhM


 

written by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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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0 02:54

 

 

오늘따라 바람이 잘 분다. 15노트. 그야말로 쾌속선이다. 하늘은 별무리로 가득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다와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뒤엉켜 분간하기 힘들다. 하늘에 배가 두둥실 떠가는 것 같다. 심심한 마음에 갑판에 나오니 오늘은 사샤가 없고 요리사가 앉아 있다. 무얼 쥐고 있는지 가만히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뭐해 안자고?"

"그냥요."

"그냥 뭐하는데?"

"그냥 있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손에 온통 허연 가루다. 아아, 그제 아침에 마데이라 섬에 들러 샀던 그 설탕이구나. 설탕은 달콤해서 얼른 팔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샤가 차를 마신다, 빵에 발라먹는다 별 핑계로 야금야금 다 갉아먹을 것이다. 그것에 대비해서 요리사에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더니 아직까진 큰 문제가 없나보다.

 

"왜 그렇게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하얀 게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한데?"

"별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요. 반짝반짝한게 그렇지 않아요?"

"음...썩 그래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육지에 있을 때였어요. 어떤 할아버지한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미난 이야기? 뭔데?"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할아버지였어요. 옷차림은 남루했는데, 눈이 굉장히 맑은 분이었죠. 범상치 않다는 건 당장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매일 그 시장에 놀러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 할아버지와 친구가 됐죠. 그 할아버지가 얘기해주기를 별은 사람의 영혼이랬어요.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씨앗이 되서 하늘로 올라간대요."

 

"오호, 별이 씨앗이라...그럼 꽃도 피나?"

"그럼요.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얼만큼 훌륭한 일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느냐에 따라서 별의 밝기도 달라진대요. 마음에 드는 별을 몇 개 골라서 매일 같이 살펴보면 별빛이 달라지는 걸 금방 알 수 있어요. 점점 빛의 기운이 세지는 건 별이 꽃을 활짝 피우는 거라고 했어요"

"별꽃이 핀다...꽃이 피면 지기도 하나?"

"물론이죠. 그게 바로 혜성이죠. 저기 봐요. 하나가 떨어지잖아요."

"떨어지면 영혼도 사라지나?"

"아뇨. 거꾸로죠. 별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대요. 별꽃을 활짝 피웠던 사람은 그만큼 좋은 가정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고 하네요. 타고난 복이라고 해야하나. 결국엔 모두가 돌고 도는 거죠."

"죽어서 별이 되고, 꽃을 피운다...그리고 꽃잎이 지면 혜성으로 떨어져 다시 살아난다...저기 활짝 핀 꽃들 중엔 내 조상님들도 있겠군. 그치?"

 

"있을 거에요. 언젠가 선장도 저기 어딘가의 별이 되겠죠. 얼마나 빛이 날진 모르겠지만 ㅎㅎㅎ"

"그렇겠군. 그럼 저기 어딘가엔 내 할아버지 할머니 별도 있겠구만."

"그럼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저 별들이 자신의 조상들의 영혼이라고 믿었대요. 왜 밤 12시에 제사를 지내는지 아시겠죠?"

"별이, 아니지. 조상님들이 가장 잘 보이는 때라서?"

"그렇죠. 죽은 영혼들의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라고 하네요. 영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

"나름 일리가 있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웬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나의 조상들을 별꽃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밤이라...요리사 옆에 우두커니 앉아 몇 시간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리사 손에는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별>

 

                                        박영신

 

지상에서 심은 씨앗 중에

가장 멀리에 심은 것이 별이다.

 

떡잎 자라는 가슴이 푸릇푸릇해지는 밤.

 

오늘도 어느 별에서는 꽃이 피고 있다.

 

 

Written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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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30 01:29



  몇 시쯤 되었을까.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파도소리가 멀리서부터 밀려온다. 누구의 명령으로 육지에 내렸던 말인가. 당장 눈앞에는 먼지자국이 가득히 쌓인 허름한 벽과 바람 치는 소리에 덜컹대는 나무 창틀이 들어온다.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고 있다. 도무지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뒷골이 뻑적지근하다. 귀도 먹먹하다. 해머로 뒤통수를 실컷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아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실신하듯 잠든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머리를 드는 순간 포기한다. 아직 두통기가 뇌를 지배하고 있다. 


“그냥 누워 있어요.”


문을 열고 레나스가 들어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려진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곳에서 제법 큰 검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 놈이 의사인지 저승사자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이내 손과 발에 뜨거운 수건을 감아준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지?”

“이틀, 아니 오늘로 3일째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왜...이렇게...?”

“선장이 직접 느껴지지 않아요? 두통입니다. 선장의 가장 큰 적이죠.”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요. 요리사는 과일 씻고 있고, 사샤는 마을에 이것저것 사러 내려갔어요. 이번 전투에서 얻은 수확이 많지 않아요. 다들 사기가 떨어져 있어요. 더구나 선장까지...”

“여기는...?”

“세빌리아 인근 마을이에요. 기억 안 나죠?”

“글쎄...알제리항에서 나와서...이스탄불 함대 1척과 붙었고, 배의 전리품을 확인하는 중이었는데...거기까지야.”

“거기부터 선장의 두통이 심해졌죠. 늘 달고 다니는 두통이라고 해도 이렇게 심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나중엔 헛소리도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긴급 상륙을 명령했어요. 당분간 선장은 쉬어야 돼요. 가짜로 쉬는 거 말고.”

“가짜든 진짜든 쉴 틈이 어디 있나.”

“그 생각에서부터 두통을 차곡차곡 쌓아온 거에요. 뇌가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고서 한 방에 보낸 거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겁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다들 기분이 좋지 않겠군.”

“기분들이야 각자 알아서 챙길 거에요. 그런 건 의사인 나로서도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 지금은 신경 꺼요. 선장이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 약초를 달였어요. 이 물부터 마셔요.”


  물이 뜨겁고, 쓰다. 마신지 10분 정도 지나니 차가웠던 손과 발에 점점 열기가 돈다. 꽉 막혔던 뒷머리와 위장이 서서히 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파른 숨이 점점 고르게 흐른다. 두통에 못 이겨 채 뜨지 못했던 왼쪽 눈꺼풀이 서서히 문을 연다. 살 것 같다. 


“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어떤 때요?”

“고통에서 회복할 때, 몸에서 열이 풀리고, 손끝과 발끝에 촉감이 뱅글뱅글 돌 때가 가장 몸의 오감이 잘 느껴져.”

“두통의 맛을 제대로 보여줄까요?”

“너도 사샤 닮아가는 거냐? 아무튼...괜한 지병에 모두에게 피해만 줬군.”

“선장의 그 피해의식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겁니다.”

“피해의식?”

“두통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난 지병이니 유전이라고 할 밖에.”

“두통이 났다는 건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두통은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증상입니다.”

“성실한 나를 칭찬해줘야겠군.”

“그런 뜻이 아니구요. 두통을 겪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정리정돈과 편식입니다.”

“내가 평소에 음식을 가려서 먹었나?”

“내가 말한 편식은 음식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 편식, 기호 편식, 술 편식, 등등.”

“그래서?”

“선장 같은 사람들은 순결주의자란 말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꾸리는 데서 잘 나타나죠.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선장은 더러운 것, 특히 본인이 생각하는 개 같은 인간들을 보았을 때 1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정리하거나 제거하지 못했을 때 2차 충격의 잔해가 남죠.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범위에 선장의 행동이 겹쳤다고 판단했을 때 가장 큰 3차의 충격으로 이어지죠. 3차 충격에 휩싸이고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응어리로 남으면 바로 이런 두통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구요. 제가 지켜 본 관찰결과입니다.”

“순결주의자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

“너무 그렇게 순결, 고결을 고집하지 말아요. 물론 그 생각이 저를 배에 타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늘 유지하고 살면 본인의 삶이 힘들어져요. 너무 무언가를 정리하려고도, 그렇다고 너무 사람을 가리고 챙길 필요도 없어요. 기본에만 충실하면 그 뿐입니다. 기본을 완전으로 가져가려고 하지 마시구요. 완전이라는 것은 단어 상에만 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구요.”

“이젠 심리테스트도 하는군.”

“선장이 생각한 완전의 범주에서 놓쳤다고 판단되는 것들, 놓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것들, 다 주우고 정돈하려 하지 마세요. 여기 선장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눠 갖고, 같이 가는 거에요.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거라구요. 면도도 당분간 하지 말아요. 사샤처럼 턱수염도 더부룩하게 내버려둬야 얼굴도 숨을 쉽니다.”


  잠시 떠든 사이, 창가에 해가 걸렸다. 따스한 햇볓이 내려앉으니 한결 낫다. 요리사가 오더니 레모네이드를 건네주고 간다. 레나스가 몸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컵을 입에 물려준다. 새콤한 물이 들어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샤가 왔나보다. 마을에서 무슨 요리를 봤는데 그걸 해달라고 요리사에게 계속 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알아서 조르고,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들 잘 하고 있다. 나는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 되겠다. 조만간 레나스에게 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시 이불을 깊게 감고, 눈을 덮는다. 


Written/Photo by 선장

Photo: 인천역 카페 팟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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