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3.01.07 연탄, 추억을 말하다 (1)
  2. 2012.12.29 새해맞이 둘 - 새 필통, 병사의 재편성 (2)
  3. 2012.12.28 Happy birthday to you
  4. 2012.12.25 새해맞이 하나 - 색연필 깎기, 그리고 꿈
  5. 2012.12.16 Last christmas
  6. 2012.11.21 호빵은 따뜻하다
  7. 2012.11.11 겨울은 살아 온 날에 대한 추억이다



연일 견딜 수 없던 혹한이 계속됐다. 집에 들어 앉아 있어도 추운 날, 이상한 소리에 보일러실에 들어갔더니 태평양 저리가라 물바다 되어 있었다. 보일러가 터졌는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뭐 별수 없이 세숫대야를 놓고 퍼 나르기 시작했다. 한여름 장마철도 아닌 한겨울에 때 아닌 물난리라니 정말 귀찮기 그지없었다.


한 시간쯤 퍼 나르자 대충정리가 됐다. 보일러실에 물 한번 고였을 뿐인데 아주 귀찮음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맨날 물난리가 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귀찮나 싶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나 어릴 적 연탄불로 한겨울 나던 시절 엄마는 맨날 연탄불을 갈고 관리하고, 얼마나 귀찮았을까 싶다. 보일러라는 편리한 시설에 너무도 물들어 겨울에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이렇게나 짜증나고 귀찮은데 말이다.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우리 예전에 겨울 준비할 때 연탄 얼마나 준비했어? 백장? 이백장?” 엄마는 잠시 생각하지더니 “계산해봐 하루에 두 장 정도 쓰니깐 얼마나 드는지” 겨울이 대략 3개월이라 쳐서 계산 두두려봤더니 백장은 택도 없었다. 


잘은 기억안나지만 겨울에 연탄을 얼마나 들여놓느냐에 따라 그 집안의 부가 상징됐던 거 같다. 돈이 없어 50장 놓는 집, 돈이 있어 한번에 100장, 200장 씩 들여 놓는 집. 연탄이 차곡차곡 쌓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왠지 뿌듯하고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예전엔 연탄을 빌려주기도 했다. 우리 집도 종종 옆집 아주머니에게 연탄을 빌려주고는 했는데 나중에 아저씨 월급날이 돌아와 연탄을 들여놓을 때 갚아주고는 했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기름보일러 기름 빌려주는 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래서 겨울나기에 연탄은 중요하다는 것을 어린나이지만 조금이나마 깨달았던 거 같다.


사실 나에게 연탄은 노는데 사용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지금처럼 쓰레기 버리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던 예전에는 대문 옆 담벼락에 주로 연탄재를 쌓아 놓고는 했다. 겨울철이면 골목 곳곳 쉽게 찾아 볼 수 있던 것이 연탄재였다. 

겨울에 놀 것도 없던 애들에게 연탄재는 참 차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물론 연탄재 차고 놀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많이도 혼났다. 가끔 짓궂은 아이들은 연탄재를 친구들에게 던지기도 해 옷이 먼지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연탄재 재활용의 최고봉은 눈사람 만들 때다. 지금은 연탄재가 없어 그냥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지만 예전엔 연탄재를 굴려서 기본 틀을 잡아 눈사람을 만들었다. 연탄재를 몇 바퀴 굴리면 순식간에 커다란 눈덩이가 만들어지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안에 연탄재가 들어있다보니 그 눈덩이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연탄재가 기본 틀을 단단히 잡아주니 만들기가 편했다. 가끔은 안에 연탄재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눈사람을 부시다가 다리 아파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연탄재는 최고의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연탄재는 겨울철 꼭 필요했는데 눈이 녹지 않고 얼어버린 골목길 제설(?)용이었다. 제설이라는 단어는 사실 어울리지 않지만 빙판길에 연탄재 몇 개 부셔 놓으면 어르신들도 언덕길 오르는데 문제없었다. 지금도 우리 집 앞에는 아직도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빙판길인데 연탄재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가스보일러가 생기면서 집에서는 편리해졌지만 골목길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편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연탄이 없어지면서 연탄재는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연탄재만은 아니었는데 연탄에 꼭 필요한 번개탄과 연탄집게도 볼 수 없게 됐다. 번개탄은 연탄불을 피우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종종 엄마의 심부름으로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사오고는 했는데 그렇게도 불이 안 붙던 연탄이 번개탄 하나면 순식간에 불이 붙고는 했다. 어린나이에 번개탄의 능력은 거의 해리포터 수준이었다.


연탄집게에 대해서는 사실 좋은 기억이 없다. 맨날 잘못하면 엄마한테 연탄집게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사라진 편이 나는 좋다.(웃음) 그게 쇠로 만들어진 거라 생각보다 맞았을 때 많이 아프다. 그래서 연탄 갈 때 잘못한 걸 엄마에게 걸리지 않는 편이 좋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이 잘못했을 경우 들고 있는 물건으로 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연탄은 없어졌다. 그 덕에 연탄가스 중독 같은 사고도 없어졌다. 보일러는 꺼질 염려 없어 많은 어머니들, 며느리들의 걱정을 덜어 줬고 늦은 밤 연탄불이 꺼져 발을 동동 구를 필요도 없어졌다. 지금의 연탄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고 번화가 간판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가 됐다. 그래서 은은했던 연탄불에 구워 먹던 가래떡도, 달고나도 연탄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됐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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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8 09:17

    비밀댓글입니다


[새해맞이 둘 - 새 필통, 병사의 재편성]


필통을 잃어버렸다. 얼추 3주 전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했으니까 12월 초순에 분실한 게 틀림없다.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집안 곳곳 다 찾아봐도 없으니 이건 ‘실종사고’로 마무리 지어도 크게 문제 없으리라 본다. 


그 녀석은 나의 글쓰기에 거의 5년을 넘게 종사했다. 그러니까 내가 쓴 대부분의 글들은 그 필통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밝은 황토색을 지닌 비닐류의 원통형 필통이었다. 쟈크도 튼튼해서 쓰는 내내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다. 믿음직한 친구였다. 슬프다. 이젠 그가 없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나의 듬직했던 펜과 기타도구 등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 상당수를 잃었다.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애도만 표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글쟁이는 글을 써야 한다. 우연인지 필연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들과 나는 2012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인연을 마감했다. 언젠가 훗날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부디 쓰레기통에 폐기처분되지 않고 글을 쓰는 새 주인을 만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를 바랄 뿐이다. 


고로, 나는 본의 아니게 새해맞이 차원에서 새로운 필통을 구해야 했고, 나의 글 작업을 도와줄 필기구 병사들을 다시 소집해야만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교보문고 핫 트랙스에서 엄정한 나의 평가 하에 새로운 필통을 등용했다. 색깔은 기존의 황토색보다 더 어두운 고동색의 필통. 한 쪽 면에 초록색 바탕의 ‘STUDY HARD ■BASIC STYLE■'이 표기되어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딱 촌스럽다. 한국 출신이다. 


그래서 골랐다. 글이 예술의 큰 범주에 포함된다고 해도 글은 어디까지나 글이다. ‘나 대단한 글 쓰는 모모모 작가라는 사람이요’ 미친놈처럼 떠들고 다닐 것 아닌 바에야 그저 책 읽고 필요한 부분에 줄 하나 뚜렷하게 긋고, 잘못 썼으면 지우면 끝인 거다. 그런 그들을 잘 담아주면 된다. 그 외의 역할은 없다. 묵묵히 그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 


필기구들도 마찬가지다. 우선 다행히 필통 밖에 빼놓은 관계로 목숨을 건진 녀석들부터 소개하겠다. 화이트다. 꽤 비싼 값을 하는 친구다. 일반적으로 액체로 가득찬 ‘수정액 화이트’는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므로 기동성이 매우 떨어진다. 빨리 마르라고 ‘후~후~’ 불고 꽤 귀찮은 작업을 요한다. 틀렸다 하면 단번에 죽 그어버리고 그 위에 바로 새로운 내용을 기입할 수 있도록 하는 빼어난 능력의 수정도구다. 이름은 'WHIPER MR5'다. 일본 출신이다. 



검정색 펜을 소개한다. 밴드로 따지면 팀의 베이스다. 이름은 ‘DESK BALL 활’이라고 한다. 글씨 두께가 조금 두껍긴 하지만 부드럽게 써지고 가격도 저렴하다는 면에서 상당히 마음에 든다. 아직도 잉크가 많이 남아있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살아줘서 고맙다. 한국 출신이다. 



자, 그 다음엔 색깔 펜이다. 본래의 각 도구에 따른 역할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 없는 관계로 재편성이 불가피하다. 


1. 빨강펜: 반드시 숙독해야 하는 부분을 표기할 때 사용한다. 실종된 관계로 새로 구입했다. 이름은 ‘동아 애니볼 501’이다. 한국 출신이다. 


2. 파랑펜: 찬동하는 글에 표기할 때 사용한다. 원래 사용하던 펜이 있었지만 실종된 관계로 이 ‘STAEDTLER’로 대체했다. 상당히 비싼 친구다. 한 때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했던 친구인데, 나머지 친구들은 거의 다 잉크를 써서 버렸지만 이 친구만큼은 아직도 잉크가 꽤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고맙다. 굉장히 잘 써지고 촉감이 좋다. 독일 출신이다. 


3. 보라펜: 일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상식적인 부분을 표기할 때 사용한다. 이 녀석도 필통과 함께 사라졌다. 당분간 파란펜으로 표기하되, 다른 표식을 하여 구분하는 임시책을 택해야겠다. 


4. 녹색펜: 의문이 들거나 반대하는 글에 표기할 때 사용한다. 이 녀석도 실종되었다. 비판용으로 사용하던 친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 친구를 대신할 도구가 필요하다. 당장 마련하기 어려워 노란색 형광펜으로 대체하였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녹색이 훨씬 보기에 좋다. 이름은 ‘Colorful'이다. 


5. 회색펜: 새롭게 등용한 도구다. 신한에서 만든 것인데, 한 쪽은 굵은 글씨, 다른 한 쪽은 얇은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굵은 글씨는 어떤 특별한 메시지나 문구를 작성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된다. 거금 2500원을 들였으니 앞으로 돈 값을 톡톡히 해 주어야 한다. 이름은 'TOUCH'로 한국 출신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잇. 이 친구 빼놓고 글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색깔이 파, 녹, 빨, 주, 노로 이루어졌다. 각 학자들, 작가들의 견해를 구별하거나, 어떤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나누어 놓거나, 또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 구분할 때 사용한다. 포스트 잇 색깔 끝에 글씨만 간단하게 표기하고 책 갈피갈피마다 붙여 놓으면 나중에라도 발췌할 때 까먹지 않고 온전하게 작업할 수 있어 굉장히 좋다. 일본 3M 출신이다. 현재 빨간색을 다 썼다. 고로, 삼성에서 나오는 빨간 포스트 잇이 달린 펜과 병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필요한 필기도구들의 재편성을 알아보았다. 새해에는 좀 더 강력한 병사들을 소집하여 나의 글쓰기 전선에 절대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이상. 


Written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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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04 16:32 신고

    이거어디서샤셨어요??제발가리켜주세요

  2. 2013.06.04 16:33 신고

    필통

2012.12.28 20:32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말미’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한 소녀가 태어났어요. 요즘과 다르게 집안에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집안의 일 거드는 손 하나 생긴 것이지 경사는 아니었답니다. 지금처럼 학교가 제대로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나날이었거든요. 그래도 소녀는 큰 병치레 없이 건강히 자랐답니다.


시간이 지나 소녀가 17살이 되었을 때 이웃 마을인 ‘계하’의 한 청년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어요. 화려한 예식장은 아니었지만 마을에 조촐한 잔치가 열렸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 두 사람의 화촉을 축하해주었답니다.

조금 시간이 흘러 부부는 머지않아 아이를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뱃속의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어요. 아이를 잃은 이유는 잘 알지 못했지만 부부는 슬퍼했어요. 그런데 이 불행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다음에 생긴 아이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소녀와 청년은 그 누구보다 슬펐답니다. 그래도 둘은 슬퍼도 눈물을 꾹 참았어요.


슬픔을 가슴에 안은 체 1년이 지나자 그 불행은 축복으로 바뀌었어요. 첫아이가 태어난 거예요. 소녀를 빼닮은 여자아이였어요.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둘째 아이, 셋째아이도 태어나 나중엔 8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어요. 하늘이 가엽게 여겼는지 아이들은 하나같이 큰 병치레 하나 없이 나날이 커갔답니다. 어려운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아이들은 누구보다 건강했답니다.


60년 후 12월…

계하마을에는 큰 잔치가 열렸어요. 마을의 가장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의 생일잔치가 열렸거든요. 생일잔치에는 할머니의 8명의 자녀들과 많은 손자, 손녀들이 찾아왔어요. 추운 겨울이었지만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기위해서 멀리서 다들 찾아 온 것이었어요.


할머니의 자녀들도 나이가 많아 머리에 흰머리가 보이기도 했지만 누구하나 병치레 없이 이곳에 모일 수 있는 것에 할머니는 감사했어요. 그리고 자녀들은 이곳에 계신 할머니가 오래오래 사시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했답니다. 


아직도 계하마을에는 100년 전 말미에서 시집을 온 한 소녀가 살고 있어요. 그리고 많은 자녀들과 손자들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말이죠.



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지금보다 더 오래오래 건강히 사세요.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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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색연필 깎기, 그리고 꿈]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새해가 오고 있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생전 처음이다. 그 동안의 연말에는 "크리스마스에 뭘하지?"만 고민했지, "새해는 어떻게 준비하지?"가 늘 빠져 있었다. 그만큼 나에겐 '새해'라는 것이 무의미했고, '새해맞이'라는 것이 무색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명절되면 일가친척한테 새배하고 새뱃돈 두둑히 받으면 그게 새해인가보다 했다. 조금 더 커서는 1월 1일이 되면 일찌감치 일어나 반쯤 뜬 눈으로 안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전화기를 귀에 걸고 집안어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안부인사 1~2분 묻고 끊는 것이 예사였다. 새뱃돈 받기는 뭐한 나이고, 나이값 한답시고 의례적으로 하는 새해를 위한 일종의 '기계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 '새해맞이'가 아니었다고 믿는다. 내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때가 되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의 한 단락을 장식하는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만큼 나에게 있어 '새해'란 늘 계속되는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휴일 정도에 그치는 그저그런 날의 하나에 불과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일터에 뛰어들고, 그 일터에 병행하여 또 공부를 하겠다고 아둥바둥댔던 지난날의 시절, '새해'가 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새해를 비웃었다. 


"새해? 새해가 오면 뭐가 달라져? 그냥 사는거지."

"새해가 밥먹여 주냐? 호들갑들은 쯧쯧."

"해피뉴어는 무슨...해피하냐? 에라이 새드무비다."


내가 새해를 무시하니, 새해도 나를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늘 새해없는 새해를 맞이하니 그날이 그날이고, 이날이 이날같았다. 쳇바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다. 


2012년을 정리해보면, 꽤 격동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쳇바퀴 인생에서 탈출하고자 내 밥그릇 울타리의 밖을 넘어섰다. 넘어서 걸어가보니 꽤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접해보지 못했던 세계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만큼 기존에 쥐고 있던 많은 것을 잃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스스로 버린 것도 많았다.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법. 뭐든지 기회비용이라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2012년의 겨울이 내 앞에 닥쳤다. 나는 잠시 멈추어섰다. 그리고 그루터기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내가 행복한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서른 즈음에서, 나는 스스로가 일어서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혜민스님 말씀대로 멈추어 보니 비로소 새해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보지 못했던 것들, 겪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겪고 성장하는, 그리고 작지만 내실있는 열매를 맺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2013년'이 아닌 '나만의 새로운 2013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다른 새해 준비작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맞이 첫 작업으로 나는 색연필을 깎았다. 두 다스를 깎으니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노랑, 빨강, 파랑, 보라, 연두, 초록, 황갈, 주황, 검정 등등 여러가지 색깔이 많았다. 여기서 색연필을 예쁘게 다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색연필이 필요할 때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길고 뭉뚝하게 깎는 것이 중요하다. 다 깎고 나면 이면지에 각각의 색연필을 돌려가면서 뭉뚱그리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 그림을 그릴 때 날카로운 선이 나오지 않는다. 색연필 그림에서 삐져나오거나 두리뭉실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날카로운 선은 그림에 해가 되기 때문에 가급적 그런 선이 나오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을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새해맞이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기껏 색연필이냐라고 웃음치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단순히 평소에 하지 않은 비일상적 행동으로 막연히 내년의 희망을 걸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사람 모두에게 각각 주어진 어떤 특별한 재능, 그리고 사명감 정도는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생각할 때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쾅대고,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그런, 불길같이 솟아오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색연필을 깎는 것이다. 내 마음이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너는 전방위 아티스트가 될 운명이라고. 





전방위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조용한 아지트다. 시칠리아 섬에 나는 조그마한 정원이 딸린 2층 집을 지을 것이다. 시칠리아 섬은 가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곳에 지으라고 내 마음이 나에게 말한다. 40대의 나는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사랑하는 아내와 예술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하고 있다. 


새해맞이 기념으로 나에게 아담한 집을 선물한다. 

 

Written by 사샤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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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0:34



“겨울이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이렇게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Wham의 ‘Last christmas’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노래지만 내가 처음 들었을 땐 나의 첫 스무 살의 겨울이었다.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고 성인으로서 발돋움의 설렘과 겨울의 푸근함이 만나 한껏 들떠있던 때였다. 오는 눈만 봐도 두근거림에 밖을 뛰다닐 정도로 풋풋함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Last christmas를 처음 들었을 당시에도 그 풋풋함과 두근거림 그리고 설렘이 함께했다. 


눈 오던 스무 살 겨울. 내가 좋아하는 누나와 함께 탄 버스에서 난 누나의 이어폰을 통해 Last christmas를 들었다. 누나가 듣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뺏어 내 귀에 꽂자 처음이지만 참으로 따듯한 멜로디가 나오고 있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지만 그래도 똑똑히 잘 들리는 단어는 ‘Last christmas’라는 단어. 고개를 돌려고 나는 누나에게 물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왜 캐럴을 듣고 있어?” 누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이 노래는 캐럴이 아니고 팝송이란다.” 팝은커녕 국내 가요도 잘 안 듣던 나로선 크리스마스가 들어가니 당연히 캐럴인줄 알았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그 사람과 난 연인이 됐고 함께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Last christmas를 함께 듣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도 스무 살 밖에 안 된 나로서는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성인으로 맞는 겨울, 첫 여자 친구 그리고 첫눈. 하는 대부분이 처음이어서 인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설랬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 해 겨울이 끝날 때쯤 나는 그 사람과 이별을 했다. 수원 어딘가에 있는 커피숍에서 이별을 통보 받았다. “우리 그냥 누나 동생사이로 지냈으면 좋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이별통보를 받은 그 커피숍에서도 Last christmas가 따뜻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노래 나올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그 사람은 이별을 했다. 첫 이별인 만큼 많이도 아팠다. 죽을 만큼. 이별 후 나는 Last christmas를 듣지 않았다. 

다음 해 더운 여름날 나는 입대를 했다. 이별에 대한 홧김은 아니었지만 예정보다 빠른 입대였다. 입대 후 선임 절반 정도를 전역시켰을 때 쯤 Last christmas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겨울은 아니었지만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리움에 잠시 먹먹했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인지 통칭 싸제의 겨울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노래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상당히 선임이 된 후에도 나는 줄곧 Last christmas를 듣고는 했다. 잘 때도, 내무실에서 쉴 때도. 그러자 어느 날 한 후임이 내게 물었다. “겨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캐럴을 들으십니까?” 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이 노래는 캐럴이 아니고 팝송이란다.” 


예비역이 끝난 지금에도 내 이어폰에는 여지없이 Last christmas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사람 이어폰에서 따사로이 흘러나왔던 멜로디처럼 올 해 겨울도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다. 그 해 겨울처럼.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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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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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1 04:43



뭐랄까. 차가운 바람이 볼이 아리도록 불어도 겨울은 따뜻하다고 말한 것 같다. 하지만 겨울은 따뜻하지 않다. 춥고 쓸쓸함의 대명사다. 그래도 나에게 겨울은 따뜻했다. 정확히는 나를 따뜻하게 했던 것들이 많았다. 호빵도 그중 하나다. 나를 따뜻하게 하는 것. 

겨울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이 호빵이다. 내 입에서 호호 입김 나올 때쯤 슈퍼든 편의점이든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빵이 겨울을 알린다. 


거리 걷다 호빵 연기 피어나면 ‘이제 겨울이 오나’한다. 그리고 그 즈음이면 어머니가 장보며 호빵 한 봉지를 사오시고는 한다. 그러면 확실한 거다. 겨울이 왔다고.

사실 호빵은 찐빵이다. 맛도 비슷하고 만드는 형태도 비슷하다. 달달한 단팥을 넣은 동글동글한 흰 빵에 넣은 모양이 딱 찐빵이다. 단지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가정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찐빵이 필요했고 삼립의 창립자인 허창성이 일본을 방문해 만든 것이 호빵이다. 

호빵이라는 이름 자체도 예쁘다. ‘뜨거워서 호호 분다’, ‘온 가족이 웃으며 함께 먹는다’는 의미란다. 어쩌면 호빵의 사회적 탄생이 찐빵의 매출을 떨어지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찐빵세대가 아닌 나에겐 새로운 추억이요 트렌드였다. 또는 찐빵 세대인 어머니와의 대화를 이어줄 작은 통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쯤 된 사람이라면 호빵하면 다른 것 보다 당시 TV에서 울려 퍼지던 CM송을 기억할 것이다. 가수 김도향씨가 부른 노래인데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하는 노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노래가 TV에서 나오곤 했는데 요즘엔 통 못들은 거 같다. 한간에는 이 노래 때문에 매출이 늘었다고 하니 호빵하면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언제였을까? 내방 없이 단칸방에 세 식구 함께 살던 시절 이유는 기억 없지만 아버지께 굉장히 혼난 적이 있다. 책도 날라 오고 매도 오가던 사이 나는 나름 살겠다는 심정으로 옷도 갖춰 입지 못하고 슬리퍼만 신고 도망 나온 적이 있다. 한 겨울이니 추운 건 당연했다. 흔한 잠바대기 하나 못 걸쳐으니 말이다. 


도망 나와 갈 곳도 딱히 없어 동네 이곳저곳 돌아다녔는데 너무나 추웠다. 손발은 이미 꽁꽁 얼어 손발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전쟁 난민만큼이나 처량하고 불쌍했다. 추위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주머니에 동전 몇 개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정확힌 기억 없지만 아마도 삼백원 정도였던 거 같은데 삼백원으로 할 수 있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친구네 골목 어귀를 돌 때 쯤이었을까? 구석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피어나는 호빵 연기에 귀신 홀린 것 마냥 동전을 털어 호빵을 샀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 장독대에 쪼그리고 앉아 호빵의 온기로 손을 녹였다. 호빵을 샀지만 먹을 수 없었다. 먹으면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아버지께 들킬까 장독대 뒤에 숨어서 호빵의 온기로 추위를 잊기 위해 양손으로 꼬옥 붙잡고 있었다. 조금 지나 어머니 퇴근길에 숨어 있는 나를 보고 집에 데리고 들어갈 때 그때서야 나는 호빵을 먹을 수 있었다. 그 호빵은 이미 나에게 모든 온기를 전해주고 난 뒤라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매번 생각난다. 호빵 연기 피어날 때면 그 시절 도망쳐 나와 샀던 따뜻했던 호빵을 말이다. 그때 그 호빵은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따뜻한 것. 

지금도 겨울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겨울에 호빵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춥지만 따뜻한 호빵. 그래서 호빵의 따뜻한 기억에 내 겨울은 올해도 따뜻하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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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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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입동이 지났다. 지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긴 날도 아니지만 겨울이라고 달력에서 먼저 알려준다. 동결. 겨울은 확실히 모든 것이 멈춘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학교도 얼어가는 물 마냥 조심스럽게 흐른다. 회사도 한해 마무리라며 의기투합보단 훈훈한 기운이 돈다.


가을 내 화려하게 수놓았던 나무들의 가지에는 앙상함만 가득해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하얀 눈꽃이 필 나무가 불쌍하기까지는 않다. 세탁소 들러 여름 내 맡겨 두었던  외투들 찾아오며 다시 느낀다. ‘겨울이 왔구나’하고.

입에서 피어나는 하얀 입김 호호 불며 겨울을 입감한다. 하얀 눈 올 때면 알 수 없는 설렘에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다. 기대감도 가득하다. 새 학기 준비하며 새 공책, 새 연필, 새해. 설렘 가득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운 게 겨울이다.

한해 마무리한다는 나름 자기합리화적인 변명으로 수만은 술자리에 참여한다.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로 속은 속대로 아파 ‘아, 내년에는 술 좀 줄여야지’라는 부질없는 다짐도 해본다. 속은 아프지만 그래도 빠질 수 없다. 나름 중요한 연내 행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길가의 허름한 포장마차 오뎅 국물이면 따뜻하다. 옷깃 사이로 스멀스멀 넘어오는 겨울바람도 두툼한 목도리 하나면 따뜻하다. 누군가의 체온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따뜻하다는 건 겨울만이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겨울이 꼭 추운 것만은 아니다.


겨울은 살아온 날, 지나온 날의 추억이다. 지나온 날 들에 대해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고 다짐하고 기대하고. 웃기도 울기도, 힘들던 기억도 한 번에 쏟아 나온다. 무언가 아쉽고, 누군가 그립고… 새 것의 설레임과 지나간 날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공존했다. 매번 나의 겨울은 그래왔다.


올해 겨울도 그리 큰 변화 없이 왔다. 거리 포장마차의 오뎅도 다시 김을 모락모락 내기 시작했고 서랍 속 목도리 꺼내 나름 겨울준비도 했다. 단지, 달라진 거라면 나이가 나이인지라 술자리만큼 늘어난 결혼식에 다니는 것뿐이다. 그렇게 또 내 앞에 찾아왔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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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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