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해돋이- 동해 추암마을을 가다] 


정동진보다 더 빨리 해가 뜬다고 하는 동해의 작은 마을 추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육지에 발을 내딛으니 온통 캄캄한 가운데 세찬 파도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온다. 아무도 없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사람들이 많이 없을 거에요.” 


레나스(의사 겸 항해사)의 말이 맞았다. 해는 7시가 넘어야 뜬다고 했다. 그 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요리사는 체력이 철철 흐르는지 벌써 배에서 내렸다.  


“선장! 이제 일어나요! 하늘이 열리는 시간이 다 됐어요!”





으음? 레나스가 어깨를 툭툭 친다. 졸린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하늘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눈깨비처럼 갑작스레 쏟아지는 빗방울에 동해바다의 일출구경에 불안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삼십 여분을 넘기니 어느 새 비는 잠잠해지고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틈새를 벌려가며 한 뼘 한 뼘 번져 나아가고 있었다. 에메랄드 바다 위에 청아한 구름이 이리저리 뒤섞여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무색케 했다. 그 속에서 불타오를 그 강렬한 햇덩어리를 모두가 고대하고 있다. 좀 더 해를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요리사가 말했다. 레나스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나무계단을 오르고 올라 절벽에 이르니 고고한 소나무 숲이 장광하게 펼쳐친다. 나무 사이사이로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바닷물과 기괴한 바윗덩이들이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소나무 숲을 지나 다음 풍경의 계단으로 오르는 순간,


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수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시퍼런 물결이 바다를 가르며 겹겹이 몰려온다. 쉴새없이 바위들을 몰아친다. 바위와 절벽마디마디에 세월이 흔적이 구구절절하게 묻어있다. ‘어디 와 볼테면 얼마든지 와보라’ 하는 듯. 모두들 초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바다와 꼿꼿하게 싸우고 있다. 파도와 파도가 만나 부딪히는 곳, 파도와 바위가 만나 깨어지는 곳. 좌르르 쏟아진 물결의 파동이 새하얀 거품으로 일고 일어나 당장이라도 내 눈 앞에 떨어질 것만 같다. 기상찬 바람을 이겨내며 천지의 변화를 굽어보는 그야말로 단번에 눈맛이 후련해지는 호쾌한 기분에 젖고 만다. 동해의 겨울 파도란 이런 것이구나. 사나이의 거침없는 기상이고 힘찬 기백이구나. 





그리고 마침내 촛대바위에 오르는 순간, 하늘은 이내 붉게 잠기고 만다. 신비로운 바다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촛대의 끝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세상의 점화를 알린다. 이렇게 2012년 마지막 아침의 경종이 울린다. 한참동안 넋을 잃고 절경 속에 피어난 해돋이의 광경을 바라본다. 밀려오는 흥에 못이겨 ‘와~~’ 하고 소리 한번 내질렀다. 그래, 2013년 이겨보자! 맞더라도,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자! 





절벽의 계단에서 내려왔을 무렵, 이미 온 세상이 빛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찬란한 해오름과 마주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조금 더 꽉 쥔 주먹손으로 오겠노라고 이곳과 마음의 약속을 했다.  





곧이어 요리사가 아침 준비로 바빠졌다. 아침은 일명 해돋이라면. 휴대용 가스렌지에 불 붙이고, 냄비에 물을 올린다. 물이 끓을 때쯤, 삼양라면에 햄과 참치를 함께 곁들여 넣는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해돋이면의 스멜이 시장기를 자극한다. 여기서 잠깐. 술이 빠질 수야 없지. 항해사인 레나스를 제외하고, 요리사와 나는 카스 캔을 촤악 까서는 ‘위하여!’를 힘껏 외치며 두둑한 라면식사에 신명을 더했다. 그 때의 맛은, 도저히 표현 불가능이다. 위대한 마무리였다. 


이천십삼년. 해적단 멤버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 것이다. 힘내자! 



Written & Photo by 선장, 선의,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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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0 02:54

 

 

오늘따라 바람이 잘 분다. 15노트. 그야말로 쾌속선이다. 하늘은 별무리로 가득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다와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뒤엉켜 분간하기 힘들다. 하늘에 배가 두둥실 떠가는 것 같다. 심심한 마음에 갑판에 나오니 오늘은 사샤가 없고 요리사가 앉아 있다. 무얼 쥐고 있는지 가만히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뭐해 안자고?"

"그냥요."

"그냥 뭐하는데?"

"그냥 있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손에 온통 허연 가루다. 아아, 그제 아침에 마데이라 섬에 들러 샀던 그 설탕이구나. 설탕은 달콤해서 얼른 팔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샤가 차를 마신다, 빵에 발라먹는다 별 핑계로 야금야금 다 갉아먹을 것이다. 그것에 대비해서 요리사에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더니 아직까진 큰 문제가 없나보다.

 

"왜 그렇게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하얀 게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한데?"

"별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요. 반짝반짝한게 그렇지 않아요?"

"음...썩 그래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육지에 있을 때였어요. 어떤 할아버지한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미난 이야기? 뭔데?"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할아버지였어요. 옷차림은 남루했는데, 눈이 굉장히 맑은 분이었죠. 범상치 않다는 건 당장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매일 그 시장에 놀러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 할아버지와 친구가 됐죠. 그 할아버지가 얘기해주기를 별은 사람의 영혼이랬어요.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씨앗이 되서 하늘로 올라간대요."

 

"오호, 별이 씨앗이라...그럼 꽃도 피나?"

"그럼요.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얼만큼 훌륭한 일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느냐에 따라서 별의 밝기도 달라진대요. 마음에 드는 별을 몇 개 골라서 매일 같이 살펴보면 별빛이 달라지는 걸 금방 알 수 있어요. 점점 빛의 기운이 세지는 건 별이 꽃을 활짝 피우는 거라고 했어요"

"별꽃이 핀다...꽃이 피면 지기도 하나?"

"물론이죠. 그게 바로 혜성이죠. 저기 봐요. 하나가 떨어지잖아요."

"떨어지면 영혼도 사라지나?"

"아뇨. 거꾸로죠. 별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대요. 별꽃을 활짝 피웠던 사람은 그만큼 좋은 가정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고 하네요. 타고난 복이라고 해야하나. 결국엔 모두가 돌고 도는 거죠."

"죽어서 별이 되고, 꽃을 피운다...그리고 꽃잎이 지면 혜성으로 떨어져 다시 살아난다...저기 활짝 핀 꽃들 중엔 내 조상님들도 있겠군. 그치?"

 

"있을 거에요. 언젠가 선장도 저기 어딘가의 별이 되겠죠. 얼마나 빛이 날진 모르겠지만 ㅎㅎㅎ"

"그렇겠군. 그럼 저기 어딘가엔 내 할아버지 할머니 별도 있겠구만."

"그럼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저 별들이 자신의 조상들의 영혼이라고 믿었대요. 왜 밤 12시에 제사를 지내는지 아시겠죠?"

"별이, 아니지. 조상님들이 가장 잘 보이는 때라서?"

"그렇죠. 죽은 영혼들의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라고 하네요. 영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

"나름 일리가 있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웬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나의 조상들을 별꽃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밤이라...요리사 옆에 우두커니 앉아 몇 시간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리사 손에는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별>

 

                                        박영신

 

지상에서 심은 씨앗 중에

가장 멀리에 심은 것이 별이다.

 

떡잎 자라는 가슴이 푸릇푸릇해지는 밤.

 

오늘도 어느 별에서는 꽃이 피고 있다.

 

 

Written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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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30 01:29



  몇 시쯤 되었을까. 해가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파도소리가 멀리서부터 밀려온다. 누구의 명령으로 육지에 내렸던 말인가. 당장 눈앞에는 먼지자국이 가득히 쌓인 허름한 벽과 바람 치는 소리에 덜컹대는 나무 창틀이 들어온다.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고 있다. 도무지 어딘지 가늠할 수 없다. 뒷골이 뻑적지근하다. 귀도 먹먹하다. 해머로 뒤통수를 실컷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아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실신하듯 잠든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머리를 드는 순간 포기한다. 아직 두통기가 뇌를 지배하고 있다. 


“그냥 누워 있어요.”


문을 열고 레나스가 들어온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다려진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깔끔하게 접어 올렸다. 어둑어둑한 곳에서 제법 큰 검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 놈이 의사인지 저승사자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이내 손과 발에 뜨거운 수건을 감아준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지?”

“이틀, 아니 오늘로 3일째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왜...이렇게...?”

“선장이 직접 느껴지지 않아요? 두통입니다. 선장의 가장 큰 적이죠.”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요. 요리사는 과일 씻고 있고, 사샤는 마을에 이것저것 사러 내려갔어요. 이번 전투에서 얻은 수확이 많지 않아요. 다들 사기가 떨어져 있어요. 더구나 선장까지...”

“여기는...?”

“세빌리아 인근 마을이에요. 기억 안 나죠?”

“글쎄...알제리항에서 나와서...이스탄불 함대 1척과 붙었고, 배의 전리품을 확인하는 중이었는데...거기까지야.”

“거기부터 선장의 두통이 심해졌죠. 늘 달고 다니는 두통이라고 해도 이렇게 심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나중엔 헛소리도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긴급 상륙을 명령했어요. 당분간 선장은 쉬어야 돼요. 가짜로 쉬는 거 말고.”

“가짜든 진짜든 쉴 틈이 어디 있나.”

“그 생각에서부터 두통을 차곡차곡 쌓아온 거에요. 뇌가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고서 한 방에 보낸 거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겁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다들 기분이 좋지 않겠군.”

“기분들이야 각자 알아서 챙길 거에요. 그런 건 의사인 나로서도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 지금은 신경 꺼요. 선장이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죠? ㅋㅋㅋ 약초를 달였어요. 이 물부터 마셔요.”


  물이 뜨겁고, 쓰다. 마신지 10분 정도 지나니 차가웠던 손과 발에 점점 열기가 돈다. 꽉 막혔던 뒷머리와 위장이 서서히 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파른 숨이 점점 고르게 흐른다. 두통에 못 이겨 채 뜨지 못했던 왼쪽 눈꺼풀이 서서히 문을 연다. 살 것 같다. 


“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어떤 때요?”

“고통에서 회복할 때, 몸에서 열이 풀리고, 손끝과 발끝에 촉감이 뱅글뱅글 돌 때가 가장 몸의 오감이 잘 느껴져.”

“두통의 맛을 제대로 보여줄까요?”

“너도 사샤 닮아가는 거냐? 아무튼...괜한 지병에 모두에게 피해만 줬군.”

“선장의 그 피해의식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겁니다.”

“피해의식?”

“두통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난 지병이니 유전이라고 할 밖에.”

“두통이 났다는 건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두통은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 증상입니다.”

“성실한 나를 칭찬해줘야겠군.”

“그런 뜻이 아니구요. 두통을 겪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정리정돈과 편식입니다.”

“내가 평소에 음식을 가려서 먹었나?”

“내가 말한 편식은 음식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 편식, 기호 편식, 술 편식, 등등.”

“그래서?”

“선장 같은 사람들은 순결주의자란 말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꾸리는 데서 잘 나타나죠.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선장은 더러운 것, 특히 본인이 생각하는 개 같은 인간들을 보았을 때 1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정리하거나 제거하지 못했을 때 2차 충격의 잔해가 남죠.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범위에 선장의 행동이 겹쳤다고 판단했을 때 가장 큰 3차의 충격으로 이어지죠. 3차 충격에 휩싸이고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응어리로 남으면 바로 이런 두통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구요. 제가 지켜 본 관찰결과입니다.”

“순결주의자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

“너무 그렇게 순결, 고결을 고집하지 말아요. 물론 그 생각이 저를 배에 타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늘 유지하고 살면 본인의 삶이 힘들어져요. 너무 무언가를 정리하려고도, 그렇다고 너무 사람을 가리고 챙길 필요도 없어요. 기본에만 충실하면 그 뿐입니다. 기본을 완전으로 가져가려고 하지 마시구요. 완전이라는 것은 단어 상에만 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구요.”

“이젠 심리테스트도 하는군.”

“선장이 생각한 완전의 범주에서 놓쳤다고 판단되는 것들, 놓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것들, 다 주우고 정돈하려 하지 마세요. 여기 선장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눠 갖고, 같이 가는 거에요.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거라구요. 면도도 당분간 하지 말아요. 사샤처럼 턱수염도 더부룩하게 내버려둬야 얼굴도 숨을 쉽니다.”


  잠시 떠든 사이, 창가에 해가 걸렸다. 따스한 햇볓이 내려앉으니 한결 낫다. 요리사가 오더니 레모네이드를 건네주고 간다. 레나스가 몸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컵을 입에 물려준다. 새콤한 물이 들어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샤가 왔나보다. 마을에서 무슨 요리를 봤는데 그걸 해달라고 요리사에게 계속 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알아서 조르고,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들 잘 하고 있다. 나는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 되겠다. 조만간 레나스에게 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시 이불을 깊게 감고, 눈을 덮는다. 


Written/Photo by 선장

Photo: 인천역 카페 팟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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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 그림으로 말하는 남자.]


요리사가 즉석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동댕이치더니 곧바로 슥슥 회를 떠버린다. 멍때리던 선원들이 고기를 보니 저글링처럼 달려든다. 물고기 크기가 엄청크다. 허리만큼 오는 정도의 길이에 늘씬하게 빠진 몸매. 프리즘이 빛나는 비늘이 온 몸을 덮고 있는 녀석인데, 힘이 그야말로 장사다. 펄떡펄떡 뛰더니 꼬리로 요리사 엉덩이를 힘껏 후려친다. 요리사도 지지 않고 물고기의 몸뚱이를 힘껏 내동댕이친다. 저편으로 떨어져 나간다. 물고기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그냥 먹으랜다. 적어도 독은 없으니까 맘 편히 먹으라는 말에 삽시간에 몸뚱이 살점이 사람들의 입으로 흡수된다. 자연은 돌고 도는 법. 초고추장이 모자르다. 나가사키산 와사비가 물고기의 눈가에 점점이 번져 있다. 이 녀석의 눈은 아직도 껌뻑대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맛 있냐?" 최후의 한 마디를 던지고 끝내 눈을 감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마음씨 고운 사샤가 녀석의 눈을 가만히 감겨준다. 뭐라고 중얼중얼 기도를 한다. 종교도 없으면서. 그냥 곱게 먹지 않는다. 


"왜 살려줬어요?"

"뭐?"

"왜 살려줬냐구요?"

"누구?"

"그 때 있잖아요. 그 남자, 멀쩡하게 생긴 허연 사람."

"아."


괜한 질문으로 또 시비를 건다. 딱히 할 말도 없거니와 뭔가 대응하기도 꺼림직한 마음에 입을 잠근다. 질문을 한 건 맞는건지, 그새 손으로 회를 집어 입 안에 가득 넣는다. 또 지껄인다. 


"선장은 그런 사람 싫어하잖아요. 왜 살려줬어요?"

"그러게, 나보고 치료는 또 왜 해주라고 했지? 우리 약품도 별로 없어요. 다음 번 육지 때 사야돼요."


의사 레나스도 거든다. 파도가 잔잔해지니 입도 살아났다. 몸이 안좋은건지, 먹는게 불편해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도 쩝쩝 잘 먹는다. 몸져 누워있던 시체가 살아나 활동을 하니 보기에도 좋다. 좀비 같다. 웃긴 마음에 갑자기 대답을 해주고 싶다. 


"아, 그 사람. 재밌더라구."

"뭐가?"

"그냥, 말하는 게 꽤 흥미로웠어. 아니지, 말은 별로 안했지. 그 사람 직업이 교사더라구."

"교산데 왜 이런데 잡혀오고 그러지? 교사 구라아냐?"

"글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고향에 갈 모양이었던 것 같아. 배를 갈아타고 가는 길에 우리한테 걸린 것 같아."

"그래서 뭐가 잼있었어요?"


요리사도 묻는다. 손이고 몸이고 온통 시뻘건 피투성이다. 야생적인 인간. 


"먹으면서도 잘도 묻는구만. 뭐 딱히 집어 말하면...음..."

"뭔데요 빨리 말해요!!!"


셋이서 일제히 달려든다. 


"뭐야 이 분위기는;;; 그래, 그 놈. 대화를 그림으로 하더라고."

"그림??? 무슨 그림???"


사샤의 눈이 빛난다. 왜 나에게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다. 


"아, 보통 잡혀들어오는 놈들은 눈도 제대로 못마주치고 늘 땅만 보잖아? 근데 그 놈은 아니었어. 나를 편하게...지긋이...바라보더라구."

"형이랑 잘해보고 싶었던 거에요."

"닥쳐. 입에 총알 박아 줄까? 그런 게 아니고. 뭔가...뭔가 모르게 별종이었어. 열의 아홉은, 아니지. 열의 열은 다들 살고 싶어 안달을 내잖아? 돈을 주겠다는 둥, 육지에 누구를 안다는 둥, 별 개소리 다 하고, 가족이 아프다느니 누가 어쨌다느니 착 엎드려서 다들 말이 많다구. 나한테 얘기해야 뭐 통하겠어? 근데 그 놈은 달랐어. 눈이 뭔가가..."

"눈깔이?"

"어, 눈깔이 굉장히 편안해 보였어. 넌 파랗잖아? 그 인간은 붉갈색이었는데, 눈이 말해주더라구."
"뭘?"

"억울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다."

"어떻게 알아요?"


속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그 교사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가 남긴 작은 노트. 소금기에 그새 눅눅해져 버렸다. 그가 그린 집이며, 사람, 동물, 나무, 편지지, 궁전 등등 단 3일만에 제법 여러 가지를 그리고 떠났다. 


"스페니쉬 계열의 사람이었던 것 같아. 요 쏘이 뭐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가까이 가서 얼굴을 쳐다봤더니 웃더라고."

"웃어요? 선장을 보고?"

"깔깔 웃는 거 말고, 그냥 희미하게 웃더라구. 근데 어쩐지 정겨운 느낌이 들더라구. 그래서 손을 풀어줬더니 주머니에서 노트랑 펜을 꺼내던데?"

"그냥 보기엔...뭐 별거 없는데?"


사샤가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그림의 실력도 형편 없거니와 뭔가 자신과 비교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인지 눈썹 가운데에 한자로 '내 천'자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림이 잘났다는 건 아니고 ㅋㅋ.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고는 그냥 그림을 그리더라고. 근데 신기한 건 그림 하나 가지고도 이 놈이 어디 사람이고 가족이 누구고, 누구를 가르쳤는지 다 알겠는거야."

"그래서, 어딜 가던 길이었대요?"

"리스본, 아테네에서 10년 정도 무슨 귀족 아들을 가르쳤던 모양이야."

"그걸 그림을 보고 알았어요?"

"그러니까 신기하단 거야."

"그래서???"


물고기는 이미 끝장이 나 있는 상태였다. 요리사가 일어나더니 포도주를 가져온다. 다들 목이 탔는지 벌컥벌컥 마셔댄다. 다들 얘기에 관심이 많다. 


"아...그래서. 리스본이 지 고향인데,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대."

"그래서 놔준거에요?"

"아니, 우낀 건 결혼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대. 단 한번도."

"........"

"우연한 기회에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거진 8년 동안 편지만 주고 받았다는거야."

"희한한 사람도 있네요."

"그 편지 하나를 보여줬어. 근데 편지지에 별 얘기도 없어. 글씨 몇 자 없는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 줄 알아?"

"이미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거잖아요."

"그래, 나중엔 둘이서 글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마음을 전했다 그러더라고. 정말 별 게 없어. 그냥 단순한 드로잉이야. 그 녀석이 산 새 책장. 여자가 가꾸는 화분, 화장대. 그냥 일상의 이런저런 것들을 간단하게 그려서 서로 그림으로 대화를 나누더라고. 그 그림을 보여주는데...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너희들이 봤어야 해."

"나 배에서 내릴까요?"

"어디 헤엄쳐서 가봐. 어쨌든,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을 편지로...더군다나 그림으로 소통하는 그 방법이 꽤 흥미롭더라고. 그게 나한테도 먹혔으니 그 놈은 목숨을 건진거고."

"역시, 남자는 한방이 필요하군요."

"여기 다 한방씩은 갖고 탔잖아?"

"죽빵 한 방 드릴까요?"

"먹었으면 치우고 가서 닥치고 잠이나 자."


날이 슬슬 어둑어둑 저물어 간다. 다 먹고 남은 물고기의 잔해를 햇볕에 널어놨더니 갈매기들이 훨훨 날아와 조근조근 쪼아 먹는다. 그래, 다같이 사는 세상. 너희도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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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 적이 있다는 것, 적이 된다는 것.] 


파도가 거세졌다. 배가 꽤 출렁인다. 이제서야 비교적 먼 바다로 나온 것 같다. 우리의 이동경로에 여러 적함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가급적 밤을 이용해서 항해하는 것이 좋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 밤하늘에는 호빵만한 하얀 달이 둥그러니 떠 있고, 주위에는 깨알같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다. 배를 둘러본다. 아침에 실은 함포가 묵직한 것이 든든해 보인다.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우리도 어느 정도 규모가 커 지면 좀 더 내구성이 강하고 노트가 좋은 갤리온급의 배로 바꿔야 한다. 지금의 배로서는 앞으로의 애로사항들을 헤쳐나아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하나둘 겹친다. 갑판대에 나와 앉아있는데, 저편에서 사샤가 걸어온다. 


"선장, 추워죽겠는데 밖에서 뭐해요?"

"넌 뭐 하고 있냐?"

"난 이것저것 그려보려는데 쉽지 않아서, 그리다 관뒀어요. 술 좀 남은 거 있어요?"


사샤 입에서 포도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놈이 배에 있는 술의 족히 반은 먹어치우는 것 같다. 옷 이곳저곳에 온통 물감 투성이에 술 자국 천지다. 배에 있으면서 단 한번도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리 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러워보이지 않는다. 냄새도 딱히 나지 않는 것 같고. 눈이 파래서 그런가? 잠시 훑어보고 있자니 더럽게 트림을 연거푸 해댄다. 


"요리사한테 가면 술을 왕창 줄 거야. 저번 전쟁에서 어디 불타고 있는 배에 들어가더니 포도주 스무통 정도 건져서 들고 오는 걸 내 눈으로 봤어."

"그거 다행이군."

"의사는 뭘하고 있지?"

"파도가 심하다고 멀미 중이라 못 움직인데요."

"으휴, 의사가 멀미를 하다니, 병이 나면 간호를 해줘야할 지경이군."

"의사에게 술을 주고 올까요?" 

"사샤."

"왜요?"

"저번 육지 때 머리좀 자르지 그랬어. 영 거지꼴인데?"

"누가 볼 것도 아닌데 뭘 신경써요?"

"그럼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그림은 왜 그리지?"

"같은 질문이잖아요. 그럼 선장은 누구 보라고 약탈질 해요?"

"하하, 따는 그렇기도 하군. 넌 그런 도발적인 면이 아주 해적스러워."

"해적보고 해적스럽다고 하는 건 어이가 없군요."

"사샤."

"아, 그렇게 진지하게 부르지 좀 마요. 그냥 어이! 이렇게 부르던가."

"내 맘이다 이 자식아."

"알게 뭐야. 젠장."


투덜투덜대면서도 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옆에 붙어 있는 놈이다. 그건 또 특이한 이 놈만의 성격 중 하나다.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데, 말투는 틱틱 내뱉는게 영 재수가 없는 게, 그게 이 놈의 문제다. 뭐 그렇다고 그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난 왜 해적이 됐을까를 생각해봤어."

"또 어이없는 철학적인 세계로 빠져들었군요. 그래서...답을 냈어요?"

"아니, 돌이켜 봤는데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어."

"그게 답이에요."

"응?"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면, 태어났으니까 태어난거지 다른 이유는 없잖아요? 선장은 해적이 됐고, 그 과정에서 뭐 여러가지 일들은 있었겠죠. 자 봐요, 내가 걸치고 있는 앞치마가 참 깨끗하죠?"

"너 만큼 깨끗하다."

"이렇게 이 색 저 색 묻히다 보면,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그리고 있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 때부턴 달려들어서  마구 이것저것 더 넣어보기도 하고, 파도가 심하면 잠시 붓을 놨다가도 또 그려대고...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는거라구요. 선장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하나의 그림이죠."

"사샤 니가 더 철학적인 것 같다."
"웃기는 소리. 난 그런거 몰라요. 그냥 물어보니까 술 취한 김에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거지."


이 놈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왜 육지에 분노하고, 바다를 택해 이렇게 망망대해로 나와 선원들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떠도는지, 그 원인을 따지자고 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사샤가 떠들어대는 말은 그냥 아무거나 다 갖다 붙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느 한 구석엔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럼 하나 또 물어보지."

"아, 이 양반 술을 안먹어서 그런가 참 질문도 많네."

"그럼 적이란 건 왜 있지? 어느 새부터인가 보이지 않던 적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 같아서."

"어느 새부턴가? 늘 있던 게 아니구?"

"아, 적은 늘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눈에 띄게 식별되는 것 같아서."

"여봐요, 선장. 선장!"

"왜?"

"적포도주는 무슨 색깔이죠?"

"옷에 묻은 색깔보니 대충 보라색 아닌가?"

"보라색은 뭔데요?"

"보라색이 뭐냐니?"

"보라색은 파랑과 빨강이 만나서 이루어진 색이라구요. 파랑과 빨강을 섞어쓰면 그림에서 불이 나요."

"불이 난다구?"

"그냥, 내가 즐겨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해둬요. 상극과 상극이 만나니 그림이 상대적으로 자극적이고 강한 인상을 주게 되죠. 중간에 어떤 색깔들이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희석시켜주지 않으면 안되요. 만약 둘이 만나 부딪히면 보라색이 되는 거구요. 그거 알아요? 보라색은 죽음의 색이라는거?"

"누가 그래?"

"내가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

"파랑이 있고, 빨강이 있어요. 파랑이 있으니까 빨강이 있고, 빨강이 있으니까 파랑이 있죠. 둘 보고 왜 있냐 물어보면 할 말은 없는 거에요. 원래부터 있는 거에요 아군 적군은. 수면 위에 적이 올라와서 무서워요?"

"조금 무섭기도 해. 그런데 뭐 별 건 없지."

"좋은 자세군요. 조금 무서워 할 줄도 알아야죠. 그래야 우리도 죽지 않고 살아남지. 근데 너무 심각하게 적에게 곤두세우지 마요. 원래부터 빨강과 파랑은 있었던 거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아요."

"시원한 답이군."

"추운데 들어가요. 술이나 먹어요 같이."


초겨울의 밤이 깊고 검게 흘러간다. 출렁출렁대는 배의 움직임이 좋다. 주말에 또 한번의 풍랑이 예고된다. 그 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충분히 휴식을 취해둬야 한다. 좋은 밤이라고 해두자.  


Written by 선장

Painted by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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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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