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중국 후한시대 말, 위ㆍ촉ㆍ오가 천하를 두고 치열하게 다툰 전쟁사다. 역사의 시간으로 재본다면 백년이 채 되지 않은 다소 짧은 스토리다. 중국사 전체의 비중에서 따져 봐도 삼국시대가 자치하는 역사적 의의는 사실 그다지 높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는 동양의 남자들을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려버린 고전 중의 ‘TOP’으로 손꼽히고 있다. ‘삼국지를 열 번 읽은 사람과는 논쟁하지 마라’는 말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여하튼 삼국시대가 실제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히 몰라도, 삼국지가 나에게 미친 파급력이란 매우 깊고 진하다.

 

내가 처음 삼국지를 접한 것은 책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서였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동네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일본 KOEI사에서 출시한 ‘三國志 Ⅲ’ 게임을 알게 됐다.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권모술수와 용병술로 천하를 제압해 나아가는 시뮬레이션 전략에 그만 흠뻑 빠져 버렸다. 그 맛을 잊지 못한 나는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 댁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길게는 한 달 동안 머물며 삼국지 게임을 마음껏 즐겼다. 그곳에는 삼국지에 열광하는 사촌형과 최신형 컴퓨터, 천혜의 골방이 있었다.

 

당시 삼국지 게임은 한글 번역본이 없었던 탓에 한자로 된 자막을 읽고 눈대중으로 숙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통밥으로 익히면 그만일 뿐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문제는커녕 도움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서예학원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학원에서 익힌 한자를 게임에 대입시킬 수 있었고,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사에서 ‘징병’과 ‘모병’의 차이, 인사에서 ‘등용’과 ‘임명’의 의미, 계략에서 ‘이호경식’과 ‘의서의심’이 지닌 각각의 효과는 한자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몰입의 몰입을 거듭할수록 궁금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비를 선택군주로 했을 때, 내가 등용하고자 하는 이 인물이 실제 삼국지에서는 어떤 활약을 했던 사람인지, 신야성에 유비가 주둔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선택하면 조조는 왜 형주로 내려오지 않고 원소와 그토록 격렬하게 싸우는지,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왜 유선의 세력이 삼국 중 가장 미약한지 등등 하나 둘 역사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아버지에게 삼국지를 읽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 아버지가 나에게 준 책은 정비석 작가의『三國志』(1982년 발행, 지혜문화사)였다.

 

총 1510페이지, 모두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은 가로형식이 아닌 세로형식이 많았는데 이 책 역시 그랬다. 읽기에 다소 생소한 감이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3일 만에 모든 내용을 읽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스토리에 넋을 잃었다. 그렇게 한 번 삼국지 전체의 이야기를 훑고 나니 삼국지 게임에 제시된 시나리오 1~5의 타이틀에 대한 경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왕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던 ‘유비의 역사’를 위주로 다시 한번 책을 읽었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로 일어난 후 수십 년을 방랑객처럼 떠돌면서 겪게 되는 시련과 고난의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읽었다. ‘선한 자’의 편에서 사건 위주의 읽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입각해서 다시 게임에 임했다. 그렇게 몇 번을 자꾸 반복하자 뒤에서 지켜보던 사촌형이 한 마디 던졌다. “넌 맨날 재미없게 유비만 하냐? 조조가 훨씬 재밌어!”

 

나는 조조의 뭐가 재미있느냐고 되물었다. 형은 조조가 사람도 훨씬 많고 전쟁도 스케일이 다르다고 했다. 형의 대답은 그 때까지 내 머릿속에 온통 악인으로 찍혀 있던 조조라는 인물을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중요 군주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삼국지를 읽었다. 그리고 그 군주들이 아끼는 측근들과 핵심인물들을 손수 리스트로 작성해보았다. 비로소 삼국지의 균형적 읽기가 성립되었다. 그렇게 게임의 방식도 변해갔다. 

 

이 쯤 읽고 나면 슬슬 삼국지 게임이 지겨워 질 즈음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도 알고, 사람을 얻는 방법도 안다. 정확하게 말해서 게임을 독파한 시점이다. 이렇게 되면 강자보다는 약자를 골라서 게임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장수, 장로, 공융, 유요, 엄백호, 왕랑 등 죄다 한 뙈기 땅만 가지고 있다가 강대국에게 점령당하는 약소국의 군주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주목해서 읽지 않다보니 누군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또 한번 삼국지를 읽게 된다. 삼국지의 미시적 읽기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몇 번을 거듭하여 삼국지를 읽고 나면 인상 깊었던 사건과 인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재추적하고 재구성한다. 나만의 삼국지 읽기가 시작된다. 사건을 조각조각 내보기도 하고, 떼었다 붙여보기도 하고, 가정과 가설을 세워보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사람의 인물에 빠져 버린다. 점점 그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대변해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의 상당 부분을 내 인생에 대입시켜 보는 습관이 생긴다.

 

게임 삼국지 Ⅲ를 완파하고, 소설 삼국지를 열 번 이상 읽어본 소감이다.

 

Written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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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가기 전에 책과 공책, 필통 말고도 꼭 함께 준비해서 가야하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손걸레였다. 손걸레의 용도는 학교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 종례할 때쯤 모두들 책상 밑에 앉아 준비해 온 손걸레와 왁스를 꺼내 바닥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학교는 바닥은 짙은 갈색의 나무 바닥이었는데 학교가 끝날 때쯤이면 모두들 마루 같은 바닥에 앉아 왁스칠 후 손걸레로 자기자리를 닦고는 했다. 그래서 손걸레가 꼭 필요했다. 대부분 친구들은 학교 근처 풍산문방구에서 샀는데 나는 엄마가 예쁜 문양으로 되어 있는 천으로 손수 바느질해 만들어줬다. 문방구에서 사는 손걸레는 다 똑같이 생겼고 두께도 얇아 걸레질을 하다가 바닥의 튀어나온 가시에 찔리기도 했는데 엄마가 만들어 준 내 손걸레는 두꺼워 그럴 염려가 없었다. 나름 아이들에게 자랑거리였다.


손걸레도 챙겼으면 실내화가방을 손목에 걸고 학교에 간다. 깜빡하고 실내화가방을 안 챙기면 큰일이다. 학교 내에는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신발을 벗고 양말 상태로 있어야 한다. 가끔씩 실내화가 없는 아이들을 선생님이 혼내고는 했다.



실내화가방을 있는 대로 흔들어 대며 학교로 간다. 학교를 가는 시간은 대략 걸어서 30분 정도다. 사실 바로 학교로 가면 금방 갈 수 있다. 근데 친구들과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위에서 말한 풍산문방구.


학교를 가는 길에는 3군대의 문방구가 있다. 우선 집근처에 있는 평촌문방구’, 조금 학교를 돌아가면 나오는 풍산문방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슈퍼와 같이 운영하던 동주슈퍼가 있다. 이 세 문방구 중에서도 풍산문방구와 동주슈퍼가 짱이다. 왜냐면 풍산문방구는 다양한 뽑기와 짱깨뽀가 있고, 동주슈퍼에는 많은 종류의 불량식품 때문이다.


우선 먼저 들리는 풍산문방구에서 뽑기를 한다. 커다란 종이에 스테이플러 고정되어 있는 작은 쪽지들 중 하나를 뽑는다. 그리곤 쪽지를 열어보면 순위가 있는데 순위대로 다양한 상품이 있었다. 근데 나는 한 번도 좋은 게 걸려본 적이 없다. 나는 꼭 석수를 받고 싶었는데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다.




5학년 형들은 종이에 있는 뽑기를 하지 않았다. 형들은 짱깨뽀를 통해서 한 번에 여러 장 받을 수 있는 걸 했는데 가위바위보만 잘하면 10장을 받는 형들도 있다. 짱깨뽀에서 이겨 뽑기가 나올 때 소리가 나는 정말 좋아한다. “텅컹 텅컹하는 소리를 내는데 흡사 기계가 바로 뽑아내는 듯 한 소리를 낸다. 나온 종이를 살짝 꺾어서 열어보면 꼴등이 대부분이었다. 뽑기의 1등상품은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자동차였다. 근데 한 번도 걸린 사람을 본적이 없다.

풍산문방구에서 뽑기 한 판 했으면 빠르게 움직여야한다. 풍산문방구에 들리기 위해 조금 일찍 나왔지만 형들 하는 거 구경하느라 조금 늦었다. 빨리 동주슈퍼에 가야한다.



동주슈퍼에 가서 아침에 엄마한테 받은 300원 중 100원으로 학교에서 먹을 불량식품을 사야한다. 나는 많은 불량식품 중에서 특히 꺼벙이를 좋아한다. 친구들은 밭두렁을 좋아하는데 나는 너무 딱딱해서 싫다. 꺼벙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맨날 꺼벙이만 먹는 건 아니다.

가끔은 짝꿍을 사서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학교 끝날 때 먹을 때도 있었다. 돈이 없을 땐 친구랑 50원씩 보태서 하나를 사 나눠서 먹기도 한다. 짝꿍의 두 가지 맛 중에서 나는 보라색 맛을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랑 같이 사면 친구는 빨강색을 줬다.


다른 친구들은 아폴로를 사기도 했고 쫀듸기를 사기도 했는데 쫀듸기와 아폴로는 먹는 게 불편해서 많이 먹지는 않았다. 어떤 친구는 둘둘 말아 놓은 껌 테이프를 사기도 했는데 난 왜먹는 지 잘 모를 정도로 맛이 별로였다. 근데 사실 돈이 없어서 못 먹은 게 많았다. 그래서 나중에 꼭 돈 많으면 피져, 월드컵, 쫄쫄이, 똘똘이, 씨씨, 맥주사탕도 다 사먹을 생각이다.


나는 꺼벙이를 사면 빨리 봉지를 뜯어서 왼쪽 주머니에 몽땅 쏟아 넣었다. 그리고는 학교에 가면서 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먹기도 했고 학교에 가서 하나씩 꺼내 먹기도 했다. 한번은 돈이 많아서 꺼벙이두 개를 사서 한 주머니에 다 넣었는데 그 때의 그 빵빵한 주머니의 두둑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근데 저번에 주머니에 구멍이 난줄 모르고 쏟아 넣었다가 바지춤으로 다 흘러 내려온 적도 있었다. 그래서 주머니에 넣을 땐 주머니가 빵꾸 안 났는지 꼭 확인을 해야 한다.


불량식품을 가지고 학교를 갈 때는 잘 숨겨야한다. 왜냐면 교문 앞에서 꼭 주번 형들이 서 있었는데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뺏었다. 그리고 교문 앞에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안 하면 막 뭐라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 체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을~”하면서 맹세를 하고는 했다. 그렇게 하면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코멘터리+


지금 생각하면 학교에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가 불량식품이라고 불렸던 과자들은 사실 식품식양청의 심의(?) 통과한 과자들이었는데 왜 불량이라는 단어가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오히려 추억의 과자가 됐다.


그리고 손걸레와 항상 같이 가지고 다녀야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왁스다. 왁스도 비누왁스도 있었고 물 왁스도 있었는데 나는 비누왁스를 좋아했다. 왁스가 없는 친구는 옆 짝꿍의 왁스를 빌려 쓰기도 했다. 그리고 걸레질 할 때 나무 바닥의 가시가 가끔 손에 박혀 아팠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 쫀듸기는 구워 먹어야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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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의 전설적인 게임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게임이 바로 마리오 시리즈다. 전편에 이야기한 열혈 시리즈도 역사의 길이 남을 역작이지만 사실 마리오 시리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마리오는 처음 1985년 닌텐도에서 발매한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에서 첫 등장했다. 지금 플레이를 해보면 지금의 화려한 그래픽의 온라인 게임에 비하면 하찮은 그래픽에 단순한 게임성을 지녔지만 85년 당시엔 정말 충격적이었다. 당시의 게임은 갤러그 같은 단순한 게임이 많았다. 갤러그가 재미없다는 소린 아니다. 단지 갤러그 같은 게임보다 마리오가 훌륭하다는 거다.


마리오는 단순함 속에 묘한 매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유의 아이템과 캐릭터성 그리고 아기자기함이다. 아마 마리오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마리오하면 버섯이 떠오를 것이다. 마리오는 버섯을 먹으면 커진다. 버섯을 먹으면 커진다니? 뭔가 오묘하지 않은가? 아무튼 슈퍼마리오가 된 것이다. 


‘마리오=버섯’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만들어 진 것인데 바로 이게 재미있는 거다. 기존의 게임들은 한번 적에게 부디 치면 죽는다.(물론 에너지가 있어 에너지가 줄어드는 형식도 있다) 하지만 슈퍼마리오가 되면 적에 부딪쳐도 한번은 죽지 않는다. 한번에 죽지 않을 정도로 마리오가 쌔 진 것이다. 거기에 꽃을 먹으면 손가락에서 불도 쏜다.  나뭇잎을 먹으면 날고 별을 먹으면 깜찍한 음악으로 바뀌면서 마리오가 무적이 된다.(어릴적 나도 날 수 있을 까해서 나뭇잎을 먹은 적도 있다)

마리오에서 나오는 아이템들은 모두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얼마나 친환경적인가? 게임이라고 허무맹랑한 아이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게 친숙함을 느끼게 해주고 마리오 시리즈만의 고유 게임성이고 아이템인 것이다.


마리오의 전설을 대미에는 배경음악도 한몫했다. ‘따단딴 따단딴 딴~’ 솔직히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음악이다.(아니라면 할 말은 없다)

별을 먹었을 때, 유령성에 들어갔을 때의 배경음악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각각 특유의 매력에 모두 중독됐다. 특히 마리오가 죽었을 때의 음악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아마 이 지금도 배경음악이 귀에 맴도는 사람도 있을 거다) 


거기에 스토리도 착하다. 나쁜 놈 쿠파가 버섯 왕국의 공주인 피치를 납치해 간다. 그래서 배관공인 마리오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구하러 가는 내용이다. 왜 배관공이 납치당한 공주를 구하러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당히 권선징악적인 내용이다. 게임하는 이에게 ‘이 어려운 탄을 깨고 반드시 공주를 구해야해’라는 정의로운 목적의식을 심어준 거다.


이 모든 것이 마리오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마리오라는 게임이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마리오’라는 주인공 때문일 거다. 

대략 40대의 아저씨 모습에 파란색 멜빵바지, 여유 있어 보이는 콧수염까지. 친근한 동네 아저씨의 이미지지만 이 아저씨 못하는 게 없다. 하늘을 날고 잠수도 하며 거북이를 일망타진한다. 웬만한 적들은 다 밟아 죽인다. 역시 마리오다.



마리오 시리즈가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출시되면서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마리오의 동생인 루이지, 매번 피치공주를 납치해 가는 쿠파, 공주를 지키는 역할이나 매번 납치는 남용하는 키노피오, 그리고 마리오의 최고의 파트너 공룡 요시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하나 같이 풍부한 매력을 소지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특히 요시는 마리오가 게임 중에 탈 수 있는데 닥치는 대로 다 먹어대는 모습이 매우 귀엽다. 오죽하면 요시를 타이틀로 내세운 게임도 나왔겠는가. 마리오의 동료 답게 웬만한 게임의 주인공급의 스타성이다.


마리오는 최고의 점프게임이다. 별다른 어려운 조작 없이 점프하나로 먹고 사는 그런 게임이다. 그 점프 하나로 30년을 버텼다. 마리오의 점프 하나하나에 플레이어는 긴장하고 웃는다. 단순한 점프일지 모르지만 마리오의 점프 하나로 횡스크롤 액션게임의 교과서가 된 거다. 아마 마리오가 없었으면 지금처럼 다양한 횡스크롤 액션게임이 안 나왔을 거다. 슈퍼마리오는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탄생 시킨 것이다. 


피치공주는 30년이나 쿠파에게 납치당하고 있다. 이쯤하면 납치당하기 위해 짐싸들고 준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리오는 또 어김없이 피치공주를 구하러 간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또 기대한다. 슈퍼마리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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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0 17:31

내 등교의 시작은 책가방 챙기기로 시작됐다. 전날 자기 전에 챙겨 놓으면 편한 것을 부지런하지 못한 성격에 맨날 아침에 부랴부랴 싸기 바빴다. 물론 이것도 오전반 일 경우에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우리학교는 학교건물은 크지 않은데 학생은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학교에 갔다. 오전반은 말 그대로 오전에 학교에 가서 오후에 끝나는 반이었고 오후반은 12시쯤 등교해서 5시쯤 끝났다. 이게 한 주마다 바뀌고는 했다. 


둘 다 장단점은 있었다. 오전반은 아침잠 많은 나에게는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거기에 책가방 챙기다 보면 항상 시간이 빠듯해진다. 그래도 좋은 건 무엇보다 일찍 끝나서 애들하고 맘대로 놀 수 있다는 거였다. 오후반은 늦게 학교를 가니 늦잠을 잘 수 있다는 점이 최고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오후반은 오전반 애들 놀고 있을 때 학교를 가야하니 정말 가기 싫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건지 매번 오전반이면 오후반 애들이 부러웠고 오후반이면 놀다가 학교가야 하게 너무 싫었다. 조삼모사가 따로 없었다.


한번은 오후반이라 일찍 일어나(이상하게 오후반엔 아침에 잘 일어난다) 우리 동네의 아이들의 성지인 88오락실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나름 게임 좀 하는 녀석이었던 나는 ‘슈퍼 마리오3’에 빠져서 시간가는 줄도 모른 체 하고 있었다. 근데 빠져도 너무 빠져 학교 갈 시간인데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뒷목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뒤 돌아보니 양손을 팔짱을 낀 체 어머니가 눈을 얇게 뜨시고는 날 내려다보고 계셨다. 속으로 ‘이젠 난 죽었다’를 남발하는 동시에 그대로 집에 끌려가 죽도록 혼났다. 물론 그 덕에 학교는 늦지 않고 잘 갔다.


나의 책가방은 인기 절정의 가방인 ‘2020 원더키디’ 가방이었다. 파란색 배경에 주인공인 ‘아이캔’이 멋진 총을 들고 있었고, 미모(?)의 여주인공인 ‘예나’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가방을 보고만 있어도 절로 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가방과 함께 나의 마음을 항상 흐뭇하게 해줬던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3단 변신 필통이었다. 


이 3단 변신 필통으로 말하자면 일단 필통 외부에 버튼을 누를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고는 했는데 ‘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돋보기가 튀어나왔고, 다른 버튼을 누르면 멋진 모습을 갖춘 연필들이 미사일 발사대에 거치된 것처럼 파바박 튀어나오곤 했다. 이 필통이 있으면 연필이 부러져도 상관없었다. 나의 자랑이었던 3단변신 필통은 오른쪽 끝 버튼을 누르면 연필 깎기가 ‘팍’하고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버튼을 눌러 모든 기능을 활성화(?) 했을 때의 모습은 흡사 대서양에 당당히 서있는 항공모함 같았다. 최고였다.


근데 생각해보면 3단 변신 필통의 연필 깎기는 사용한 적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멋진 ‘샤파’연필 깎기가 있어서 연필을 꽂고 몇 바퀴 휘휘 돌리면 아주 뾰족하게 연필이 깎였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나의 자랑이었다. 

샤파 연필 깎기는 연필이 작으면 고정이 되지 않아서 잘 안 깎였는데 이럴 땐 모나미 볼펜 펜대를 분리해 라이터 불로 살짝 달군 후 몽당연필 뒤에 꽂아 넣으면 새 연필 마냥 길어졌다. 이것이 엄마표 연필깍지였다. 연필깍지 연결 후 연필 깎기에 넣고 고정 후 다시 깎으면 기가 막히게 잘 깎였다. 엄마표 연필깍지는 나중에 빼서 다른 연필에도 끼워 넣을 수 있어서 참 편리했다.


이렇게 그날 공부할 바른 생활, 산수, 말하기 듣기, 쓰기 책을 잘 챙기고, 이에 맞는 공책을 책가방에 잘 넣으면 학교 갈 준비는 끝이었다. 아, 물론 꼭 필통은 챙겨야 한다. 필통 놓고 가면 짝꿍이 못된 아이면 연필을 잘 안 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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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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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견딜 수 없던 혹한이 계속됐다. 집에 들어 앉아 있어도 추운 날, 이상한 소리에 보일러실에 들어갔더니 태평양 저리가라 물바다 되어 있었다. 보일러가 터졌는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뭐 별수 없이 세숫대야를 놓고 퍼 나르기 시작했다. 한여름 장마철도 아닌 한겨울에 때 아닌 물난리라니 정말 귀찮기 그지없었다.


한 시간쯤 퍼 나르자 대충정리가 됐다. 보일러실에 물 한번 고였을 뿐인데 아주 귀찮음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맨날 물난리가 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귀찮나 싶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나 어릴 적 연탄불로 한겨울 나던 시절 엄마는 맨날 연탄불을 갈고 관리하고, 얼마나 귀찮았을까 싶다. 보일러라는 편리한 시설에 너무도 물들어 겨울에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이렇게나 짜증나고 귀찮은데 말이다.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우리 예전에 겨울 준비할 때 연탄 얼마나 준비했어? 백장? 이백장?” 엄마는 잠시 생각하지더니 “계산해봐 하루에 두 장 정도 쓰니깐 얼마나 드는지” 겨울이 대략 3개월이라 쳐서 계산 두두려봤더니 백장은 택도 없었다. 


잘은 기억안나지만 겨울에 연탄을 얼마나 들여놓느냐에 따라 그 집안의 부가 상징됐던 거 같다. 돈이 없어 50장 놓는 집, 돈이 있어 한번에 100장, 200장 씩 들여 놓는 집. 연탄이 차곡차곡 쌓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왠지 뿌듯하고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예전엔 연탄을 빌려주기도 했다. 우리 집도 종종 옆집 아주머니에게 연탄을 빌려주고는 했는데 나중에 아저씨 월급날이 돌아와 연탄을 들여놓을 때 갚아주고는 했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기름보일러 기름 빌려주는 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래서 겨울나기에 연탄은 중요하다는 것을 어린나이지만 조금이나마 깨달았던 거 같다.


사실 나에게 연탄은 노는데 사용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지금처럼 쓰레기 버리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던 예전에는 대문 옆 담벼락에 주로 연탄재를 쌓아 놓고는 했다. 겨울철이면 골목 곳곳 쉽게 찾아 볼 수 있던 것이 연탄재였다. 

겨울에 놀 것도 없던 애들에게 연탄재는 참 차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물론 연탄재 차고 놀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많이도 혼났다. 가끔 짓궂은 아이들은 연탄재를 친구들에게 던지기도 해 옷이 먼지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연탄재 재활용의 최고봉은 눈사람 만들 때다. 지금은 연탄재가 없어 그냥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지만 예전엔 연탄재를 굴려서 기본 틀을 잡아 눈사람을 만들었다. 연탄재를 몇 바퀴 굴리면 순식간에 커다란 눈덩이가 만들어지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안에 연탄재가 들어있다보니 그 눈덩이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연탄재가 기본 틀을 단단히 잡아주니 만들기가 편했다. 가끔은 안에 연탄재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눈사람을 부시다가 다리 아파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연탄재는 최고의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연탄재는 겨울철 꼭 필요했는데 눈이 녹지 않고 얼어버린 골목길 제설(?)용이었다. 제설이라는 단어는 사실 어울리지 않지만 빙판길에 연탄재 몇 개 부셔 놓으면 어르신들도 언덕길 오르는데 문제없었다. 지금도 우리 집 앞에는 아직도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빙판길인데 연탄재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가스보일러가 생기면서 집에서는 편리해졌지만 골목길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편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연탄이 없어지면서 연탄재는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연탄재만은 아니었는데 연탄에 꼭 필요한 번개탄과 연탄집게도 볼 수 없게 됐다. 번개탄은 연탄불을 피우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종종 엄마의 심부름으로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사오고는 했는데 그렇게도 불이 안 붙던 연탄이 번개탄 하나면 순식간에 불이 붙고는 했다. 어린나이에 번개탄의 능력은 거의 해리포터 수준이었다.


연탄집게에 대해서는 사실 좋은 기억이 없다. 맨날 잘못하면 엄마한테 연탄집게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사라진 편이 나는 좋다.(웃음) 그게 쇠로 만들어진 거라 생각보다 맞았을 때 많이 아프다. 그래서 연탄 갈 때 잘못한 걸 엄마에게 걸리지 않는 편이 좋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이 잘못했을 경우 들고 있는 물건으로 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연탄은 없어졌다. 그 덕에 연탄가스 중독 같은 사고도 없어졌다. 보일러는 꺼질 염려 없어 많은 어머니들, 며느리들의 걱정을 덜어 줬고 늦은 밤 연탄불이 꺼져 발을 동동 구를 필요도 없어졌다. 지금의 연탄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고 번화가 간판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가 됐다. 그래서 은은했던 연탄불에 구워 먹던 가래떡도, 달고나도 연탄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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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8 09:17

    비밀댓글입니다

 

 

  80~90년대 만큼 TV에서 외화시리즈를 많이 방영한 시기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의 꿈은 아마도 외화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힘, 신체능력, 두뇌, 창조력, 정의감, 인간애, 유쾌함, 침착함 등등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600만불의 사나이[각주:1]와 맥가이버[각주:2]가 기억에 남습니다. 600만불의 사나이가 힘과 신체능력을 대표한다면, 맥가이버는 두뇌와 창조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상반되는 캐릭터들이지요.

 

  저는 맥가이버가 꿈이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600만불의 사나이는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는지...아니면 우리 집에는 돈이 없어 '사나이'가 되는 비용인 600만불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잘 기억은 안나네요. 600만불의 사나이 흉내내며 계단 5칸(놀라워라!!) 위에서 뛰어내리곤 했지만요.

 

  맥가이버가 되는 것은 쉬우면서도 놀라워 보였어요. 일상생활에서 쓰던 물건들을 새롭게 사용하기만 하면 되었거든요. A와 B를 조합해서 새로운 쓰임을 만든다. 특별한 것을 평범한 것에서 찾는다. 근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물건들의 형태와 성질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이것과 저것을 조합해서 다른 그것을 만드는 창조력도 있어야 하는 일이잖아요.

 

  맥가이버의 능력을 동경하기 시작한 이후로 어머니가 골치 꽤나 썩으셨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모아 댔으니까요. 철제 옷걸이를 구부려 망가뜨리기도 하고, 시한폭탄 만든다고 멀쩡한 시계를 분해하기도 했거든요. 맥가이버칼 사달라고 졸라대기도 했으니까(맥가이버칼만 있었어요...). 아마 이 시절을 살았던 '맥가이버 키드'들도 저와 같지 않았을까요?

 

  집에 도둑이 들 것에 대비해서 갖가지 도구들을 껴안고 잠들기도 하고, 방의 문이 열면 작동하는 부비트랩(!)을 장치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홀로집에'의 케빈도 맥가이버 키드였네요. 그때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케빈이 얼마나 부럽던지 몰라요.

 

  그 시절 많던 맥가이버 키드들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절 익힌 재능을 발휘해 '생활형 맥가이버'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드라이버 없이 가위로 나사를 풀고, 족발 먹을 때 종이컵 1/3을 잘라 쌈장을 담고요. 망치 없이 못을 박고, 스마트폰 액정을 직접 교체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해돋이 보러 가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 참치캔 뚜껑으로 햄을 썰고, 참치캔으로 국물을 떠서 먹고 있을지도 몰라요. 주변의 놀라움을 즐기면서요...

 

  맥가이버는 세계평화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 '맥가이버 키드'들은 가족과 친지의 행복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을까요?

 

  내년, 아니 올해 2013년에 맥가이버가 영화로 리메이크 된다고 합니다. 21세기의 맥가이버는 어떤 모습일까요?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하네요. 최첨단 기계를 남용하는 요새의 첩보요원 속에서 너무 구식으로 보이는 것은 아닌지...그래도 '맥가이버 키드'로서 기대를 가져봅니다.

 


사진 출처 : http://stargatesg1971.livejournal.com/32534.html

 

* 맥가이버의 만화도 즐기세요. 재미납니다.

맥가이버 패러디 : http://lastplacecomics.com/comics/the-new-adventures-of-macgyver/

생활밀착형 맥가이버 : http://www.pajamaforest.com/2009/10/23/my-macgyver-moment/

 

* 맥가이버에 대한 철학이야기도 있어요. 흥미롭습니다.

맥가이버와 철학 : http://greenbee.co.kr/blog/334

 

 

written by 요리사


  1. 600만불의 사나이는 원래 우주비행사였어요.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에 큰 부상을 당해 시력과 팔다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죠. 그때 특수기관의 도움으로 무쇠팔, 무쇠다리, 매의 눈을 가진 사나이로 다시 태어나게 되요. 사이보그 개조(?) 비용이 600만불이라나요? 그때부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무리들을 '띠.띠.띠.띠.띠.띠.'하는 효과음과 함께 물리치게 되지요. [본문으로]
  2. 맥가이버는 어렸을 때 사고로 부모님와 할머니를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비폭력주의 청년으로 자라나요. 그래서 말할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말했지.'라고 하는 '그랜파파보이'가 되었나봐요. 우연한 기회로 특수요원이 되어요. 뛰어난 두뇌와 임기응변, 전공인 물리학을 바탕으로 최첨단 무기를 가진 악당들을 고작 칼 하나로 물리치고 다니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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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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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 15:38



한때 공사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소위 노가다라는 것을 한 것인데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해 오후 5시에 작업이 마무리 되고는 했다.

어느 날 오후 5시가 되어 집에 가기 위해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멀리서 같이 일하는 형님이 날 보며 갑자기 “아이템풀 좀 줘”이러는 거다. 순간 ‘이양반이 날도 안 더운데 더위를 먹었나? 한참 일하는 사람한테 왜 아이템풀을 달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공사현장에서 아이템풀이라니? 그런 이름의 공구가 따로 있었나 싶었다. 결국 내가 “뭐요?”라고 되묻자 그 형님은 다시 한 번 “아이템풀 달라고!!”하는 것이다.


아이템풀이 무엇이던가? 90년대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 시절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따먹기 하며 놀던 때 적당히 있는 집 자식들이 풀던 가정용 학습지 아니던가.

나는 해본 적 없지만 주변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찾아오는 아이템풀 선생님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였다. 잘 놀다가 갑자기 엄마의 “아이템풀 선생님 오셨다”라는 한마디에 함께 놀던 친구들을 뒤로한 체 집으로 향해야 했으니 말이다. 뭐 지금의 ‘빨간펜 선생님 오셨다’ 이런 거였다.


부족하진 않지만 넉넉지 않은 집 아들이었던 나는 나름 부러움의 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학습지를 대신 풀어 준적도 더러 있다. 여기서 조금 설명을 더하면 요즘 아이들 학습지야 그림도 있고 컬러풀하지만 당시 아이템풀은 정말 주구장창 수학문제가 있었다.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문제만 말이다. 지금 하라고 해도 난 못할 것을 내 친구들은 그나마 잘 참고 했던 거 같다.


문득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는 ‘응답하라 1997’을 보니 ‘이젠 내 어린 시절이 복고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템풀을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시기도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 80년대에도 사람이 태어났냐고 나를 약 올리던 형들처럼 말이다.

아, 참고로 그 형님이 찾던 건 ‘아이템풀’이 아닌 ‘라인 테이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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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열혈이다


패밀리가 비록 8비트 게임기이기는 하나 사실 전설적인 게임이 많았다.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도 그렇고 ‘에닉스’의 드래곤 퀘스트가 좋은 예다. 이 둘은 나중에 게임계의 큰 획을 긋는 대작인데 이후로 계속적으로 시리즈가 출시되어 전설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처럼 잘 찾아보면 대작의 시초이거나 괜찮은 작품이 패밀리에 많았는데 특히 ‘게임은 협동이다’를 보여준 작품이 있으니 바로 ‘열혈 시리즈’였다.


패밀리를 가졌던 유저라면 한번쯤은 해봤을 정도로 유명하고 패밀리의 대중적인 게임이었다. 일단 친구와 함께 2인 협동 플레이가 가능했다는 점은 우리들이 열광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기존에 2인 플레이가 되는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인 플레이기는 하나 먼저 게임을 하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 받는 식의 게임이 많았다. 2인용이기는 하나 협동적인 모습은 없던 것이다. 물론 전설의 슈팅게임인 ‘트윈비’나 ‘배틀시티’ 같이 게임이 있긴 했으나 협동이라 긴 보단 같이 한다(?) 정도의 느낌이었다. 같이하는 친구가 적의 총알을 피할 수 있게 도와 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열혈 시리즈는 찐한 우정을 체험할 수 있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열혈 격투전설’의 경우 열혈 시리즈의 여러 캐릭터들이 나와 무술을 겨루는 게임(사실 무술이라기 보단 그냥 패싸움 같았다)이었다. 2인 플레이시 나와 친구가 한 팀이 되어 함께 상대방을 물리쳐야했다. 친구가 맞고 있으면 달려가 롤링어택을 날려주고, 내가 맞고 있을 땐 친구가 달려와 니킥을 날려주고는 했다.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우정이었다.


캐릭터 고르는 방식도 특이 했다. 이름과 생일, 혈액형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졌고, 무술의 종류가 달라졌다. 그래서 주로 좋은 무술과 능력치가 나오는 생년월일과 혈액형은 외워두고는 했다. 나는 특히 마샬아츠를 사용하는 캐릭터를 좋아해 외워두고 사용했는데 검정 도복바지를 입고 발차기를 샤샤샥 날리면 이소룡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최고였다.


열혈 시리즈엔 ‘쿠니오’와 ‘리키’라는 주인공이 있었는데 모든 시리즈엔 꼭 나왔다. 흡사 김성모 만화에서 ‘강건마’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김성모의 만화에서는 강건마는 어떤 작품에 나오던 킹왕짱 쌔지만 열혈 시리즈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쿠니오와 리키가 제일 후졌다. 웬만하면 주인공이 제일 쌜 법도 한데 별로 특징도 없고 그렇다고 멋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게임을 하면서도 거의 골라본 적 없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스토리 모드를 하다보면 이 녀석들을 플레이하게 되는데 하는 동안 내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쿠니오와 리키의 우정만큼은 최고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열혈은 시리즈물인데 열혈격투전설 빼고도 ‘열혈’이라는 이름을 붙친 온갖 스포츠가 존재했다. 열혈하키, 열혈축구, 열혈농구, 그리고 올림픽을 연상케 하는 열혈신기록.(우리는 주로 열혈 운동회라 불렀다) 이밖에도 많지만 내가 주로 한 것은 이것들이었는데 모두다 깨알 같은 재미와 협동이 존재했다.


열혈시리즈가 협동이 존재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모든 시리즈엔 폭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열혈’이란 단어가 붙은 이상 일반적인 스포츠 게임을 상상하면 큰 오산이다. 열혈하키의 경우 하키채로 패는 것도 모자라 그냥 주먹도 휘두를 수 있었다. 


특히 마구를 쏘기 위해선 대략 3초가량 슈팅 버튼을 눌러 기를 모아서 쏴야 했는데 기를 모으는 3초가량은 거의 무방비 상태다. 초반 한두 판의 경우 컴퓨터가 좀 모자라 기를 모으는 동안에도 잘 건드리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인공지능도 좋아져 기를 모은 다 싶으면 하키채 찜질을 받기 일쑤였다. 

이때 다시 한 번 뜨거운 우정이 빛을 바라는데 기를 모으는 동안 내 친구는 슈팅을 방해하러 오는 상대방을 있는 족족 쳐 패고는 했다. 물론 내 친구가 마구를 위해서 기를 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가? 생각만 해도 뜨거운 우정이 아닌가? 친구의 마구를 위해서 내 한 몸 던져 친구를 지킨다! 그 정신은 정말 휘트니 휘스턴 지키던 캐빈 코스터너 저리가라였다. 하여튼 ‘열혈’이란 단어가 붙은 이상 정상적인 스포츠는 아니었다. 

열혈시리즈의 최고의 장점은 협동이라 말했지만 사실 최악의 단점(?)도 사실 협동이라는 점이었다. 협동이 되는 만큼 우정파괴의 위험도 도사렸다. 



다른 시리즈도 비슷하지만 열혈 격투전설의 경우 상대 팀만 때릴 수 있던 게 아니라 같은 편도 타격이 가능했다. 쉽게 말해 내가 내 친구의 캐릭터도 팰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를 위기에 구하기 위해 날렸던 롤링어택이 상대팀과 함께 내 친구도 함께 날렸을 땐 욕설이 튀어나오기 딱 좋았다. 


이게 심해지면 한명이 삐지고 “너랑 안 놀아”가 나올 수도 있는데 오락기 주인이 삐져 그만한다고 해버리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오고는 했다. 게임을 계속 같이 하기 위해선 주인장 녀석의 비위를 조금씩은 맞춰주고는 해야 했다. 어린 나이지만 사회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우정파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열혈 시리즈는 이후 여러 게임기에 이식되고 했다. 그러나 패밀리만큼의 큰 빛을 보지 못했다.(물론 우정파괴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열혈남아(熱血男兒)가 아닌가? 키 작던 나도, 내 친구도 쿠니오와 리키 못지않게 열혈남아였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남자라면 역시 열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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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로 걸려오는 전화의 양이 줄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114의 역할을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114로 전화하여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보다는 직접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여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 전 시절엔 집에 하나씩은 가지고 있던 전화번호부를 이용해 전화번호를 찾고는 했다. 물론 이 전화번호부도 시간이 지나면서 114 때문에 차츰 없어지기 시작한 것 중 하나다. 그런데 전화번호부를 없어지게 만든 114도 스마트폰이라는 최첨단 장비로 인해 서서히 없어져 가는 것이다. 디지털 첨단 장비의 출현으로 인해 점차 사라져가는 것들이 비단 114뿐일까?


집에 한 권씩 가지고 있던 전화번호부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찾아 줄긋던 시절 ‘삐삐’라고 불렸던 무선호출기의 등장은 사회적인 큰 이슈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조금이나마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다.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무선호출기에 연락받을 전화번호를 남겨 연락을 취하는 방식인 무선호출기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불편하고 상상도 못할 방식이지만 그 당시엔 정말 획기적이고 사회에 큰 이슈를 자아낼 만했다.


무선호출기를 이야기하자면 공중전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1인 1 휴대폰 시대라 공중전화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그 당시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공중전화의 위치까지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슨 통화를 그리 길게도 하는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던 사람도 있었다. 더불어 공중전화부스 안에는 꼭 쇠사슬에 묶여 있던 전화번호부도 함께 있었는데 사람들이 필요한 부분을 찢어가 항상 너덜너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중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동전을 바꾸러 다니는 사람들, 공중전화 위에 지갑을 올려놓고 갔던 사람들 그리고 전화카드. 공중전화에 관한 에피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전화번호부나 공중전화, 무선호출기 등 한때는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휴대폰이라는 첨단 장비의 보급으로 점차 잊혀가는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대중화는 진정한 디지털 시대의 시작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휴대전화의 등장은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함으로써 더 이상 개인적으로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됐고, 공중전화는 비바람을 피하는 용도 정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무선호출기는 ‘아! 내가 이걸 사용하던 시절도 있었지’하고 추억을 되짚어볼 만한 물건이 됐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고 나서 우리 생활에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약속장소의 결정’이 아닐까 한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약속장소를 미리 정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하루 전 혹은 미리 연락해 “어디서 몇 시에 만날까?”라고 했던 것들이 이제는 휴대폰을 통해 바로바로 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함께 실종된 것도 있으니 바로 ‘약속 시간’이다.


명확히는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시간’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약속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코리아 타임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은 약속시간에 늦게 되면 상대방이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책임감 덕뿐인지 약속시간이 잘 지켜졌다. 휴대폰의 보급된 후부턴 늦더라도 연락이 가능하니 조금은 늦어도 된다는 생각이 약간은 생겼나 보다. 물론 휴대폰으로 인해 엇갈리고 답답한 마음도 사라졌다고는 하나 핸드폰이라는 최신식 기기 덕에 사람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것조차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휴대폰의 진화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작고 휴대하기 편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기의 개념을 떠나 사진, 동영상 촬영 등 어느새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아갔다. 휴대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하기도하고 허전하기도 하며 휴대폰도 없는데 괜히 문자소리가 귀에 맴도는 경우를 한 번쯤은 느껴봤으리라…


오늘날 휴대폰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편해졌다. 그러나 지하철이나 친구들끼리 만나서도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자면 삭막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배고파 끓였던 라면의 받침이었던 그을린 전화번호부가 그립고 따뜻했음을 느낄 때가 있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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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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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14 15:04 신고

    kbs에서 인간의 조건이라는 예능하는데 그거 보면서 핸드폰 없애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전화번호부까지는 몰라도 ㅋㅋ 요즘 '기억', '감성' 이런게 핫이슈인듯요.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모두들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내가 초등교육을 받을 시기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국민학생이니?”라고 물어보면 “네?”하고 반문이 돌아온다. 아마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일 테니 되묻는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초등학교로 바뀐 건 1996년 이후다. 일제강점기 일본왕의 칙령으로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인 ‘국민학교’로 불렸는데 광복이후에도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민족정기회복차원에서 명칭을 국민에서 초등학교로 변경했다.

물론 나는 그 변경사항 없이 그대로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초등교육을 마쳤다. 내가 졸업한 이후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일지 몰라도 난 어쨌든 초등학교를 다닌 적은 없다.


처음엔 초등학교라는 게 입에 착착 붙질 않아 주구장창 국민학교라고 말하곤 했다. 근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고 익숙해지니 국민학교라는 말이 더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 프로그램만 해도 국민학교라는 단어만 써도 알아서 초등학교로 척척 바꿔주고 있어 일일이 고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컴퓨터도 국민학교라는 단어가 어색한 것이다.


아픈 의미를 지니고 시대 속에 잊혀 진 단어지만 나에겐 그냥 어린 시절이다. 국민학교를 나왔다고 내가 일본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도 아니고 일본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철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풋풋하고 때 묻지 않았던 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그립고 아쉬운 그런 시절. 넉넉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고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꿈으로 가득하던 시절, 그 꿈 많던 시절의 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written by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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